'씀'이라는 에세이 쓰기 모임을 2년 가까이 참여하고 있다. 사실 처음 모임 제목을 정할 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에세이답게 아무거나 쓰면 되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필과는 다른 에세이 본연의 의미에 관해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어인 에세이(essay)는 '시도' 또는 '시험'의 뜻하는 '에세'(essai)에서 파생한 단어다. 더 나아가 에세는 '계량하다' '음미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엑시게(exigere)'가 어원이다. 그러므로 에세이는 글쓴이가 세상을 유심히 관찰하고 가늠해낸 끝에 자신의 인간성을 정교하게 녹여낸 글임을 알 수 있다. '에세'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프랑스의 몽테뉴다. 그의 대표 저서 <수상록>이 불어로 'Les Essais'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나 자신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죽음, 우정, 동물, 전쟁, 여행, 섹스, 취향 등등 여러 가지 주제를 자기 자신이 보고 느낀 걸 기준으로 탐구했다. 보통 수필이 따를 수에 붓 필자를 써, 손이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에세이는 수필보다는 태생부터 좀 더 무거운 내용을 다룬 산문이었다. 몽테뉴는 에세이 글을 인생을 찬미하는 창구로 쓴 것 같다. 지켜보고 얘기하고 생각하고 다시 끄집어내는 글쓰기의 과정을 사랑의 한 측면으로 본 것이다. 사랑을 속삭일 때 나라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서 꽤 다르게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나. 도킨스처럼 유전자 기계라던가 하는 시니컬한 말은 통하지 않는다. 나의 취향이 얼마나 남다른지 보여줄 때 테이블의 주인공은 떼놓은 당상이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나를 가리킬 땐 잠잠하던 세포가 일제히 봉기하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에세이 쓰기 모임은 삶을 구석구석 사랑하는 일이다. 이왕 바쁜 시간을 쪼개 모인 바, 놓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목소리로 호응하며 무릅쓰고 공감을 표해 마땅하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고유한 특질에는 뭐가 있을까. 훤칠한 키, 중후한 목소리, 그의 향수 냄새. 어쩌면 조금은 세속적인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직업과 사는 동네, 옷 브랜드와 성적인 기호. 이처럼 무수한 식별자가 있을 텐데 시간이 지나도 어슴푸레하게나마 기억에 남는 건 뭘까. 난 누군가의 예술 취향을 감지할 때 그가 남달라 보인다. 좋아하는 화가, 책장에 꽂힌 서적, 좋아하는 글귀와 그가 쓴 문장이 도드라져 보인다. 예술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애를 쓴다는 점에서 겉보기와 다른 사상과 감정까지 다뤄낸다. 모임을 할 때도 예술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귀가 열린다. 예술은 사는데 별 쓸모가 지적질일랑 '셧더퍽업'하고, 예술에 탐닉하는 그 순간이 지닌 관능에 충실히 하다. 어떤 책을 가지고 다니며, 어떤 영화를 보고 한 줄 평은 어떻게 썼는가. 어떤 작가의 작품을 보러 굳이 발품을 팔아 주말을 할애했는가. 오늘 쓴 글은 작품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거장 ‘마틴 스코시지’의 말을 거론한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마틴 스코시지가 전 세계 시네아스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유는 장르적인 틀 안에 지극히 사적인 면모를 풀어내는 솜씨 덕분이다. 마틴 스코시지의 페르소나는 총으로 사람을 쏘고 마약을 밀수하고 배신과 암투를 벌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가족을 목숨처럼 챙기며 놀랍게도 최소한의 직업윤리를 지켜내려는 한 개인의 위엄을 간직한다. 어디 그뿐인가.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며 샤워하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읽으며 잠자리에 든다. 검은색 옷을 좋아하고, 커피는 동네에서 파는 콜롬비아산 신선한 커피다. 사랑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갱 영화도 로맨틱한 면모 없이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스펙터클을 연출함과 동시에 늦은 밤 집에 들어와 외투를 벗고 침대맡의 백열등을 켜는 남자의 근심 어린 얼굴도 놓치지 않는다. 그는 잠들기 전에 어떤 글을 휘갈겼을까. 오이 2개, 가지 1개, 두부 1모는 아니지 않을까. 난 그런 글이 궁금하다. 진짜 잘 만든 이야기는 내용과는 동떨어진 한 사람의 습관과 취향에 민감하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범죄 소설인 <나를 찾아줘>의 주인공 ‘닉’은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기자이고, 뉴욕의 맨해튼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며 당대의 작품을 관람하고 글을 쓰는데 잘생기고 훤칠하다. 닉은 뉴욕의 지성으로 불려도 손색없는 삶을 살다가 아내를 만나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취향을 무기 삼아 그녀를 꾀어낸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점차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이 사라지고 일하던 잡지가 하나둘 폐간하면서 하루아침에 실직하기에 이른다. 두 사람은 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고, 애정이 사그라드는 걸 느끼며 자주 다툰다. 점차 갈등이 심해지자 닉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이를 목격한 아내는 복수를 다짐한다. 이 과정에서 아내가 느낀 배신감의 요체는 바람도 아니고 가난해진 집안 꼴도 아니다. 더는 지성적이고 낭만적이지 않은 남편에 대한 원망이다. 나와 꼭 맞는 것처럼 보였던 닉의 취향도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자 변색했다. 세간의 말처럼 삶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허세로 둔갑했다. 그렇다면 그가 읽고 쓴 수많은 책과 영화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가 주머니에서 동전 꺼내듯이 인용했던 멋진 글귀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건 고작 사랑에는 쓸모없는 심심풀이 땅콩이었단 말인가.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서로의 취향에 반해서 만난 커플이 붕괴하는 과정과 어렵사리 다시 봉합되는 수단이 전부 글쓰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기가 막히게 쓰고 멋진 글귀로 아내를 홀리던 남자는 경제적으로 무능해지자 입을 닫는다. 아내는 배신한 남편에게 조작한 일기로 살인자 누명을 씌우고 탈출한다. 그는 결국 아내가 글로 남긴 힌트를 해독하며 누명을 벗고, 다시 그녀와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실감한다. 이처럼 사랑에도 취향의 문제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난 연애소설을 좋아한다. 연애를 얘기하는 척하면서 사람이 사는 양태와 존재 지향에까지 손을 뻗는 그런 책들. 사는 게 사실 사랑하다가 고꾸라지고 다시 사랑을 찾는 과정에 불과한 거 아니냐는 위태로운 과장도 용인하는 세계. 권태로운 저녁 밤도 애처로운 연인 앞에선 흐드러지게 춤을 추게 마련이다. 자주 인용하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다"라는 문장은 이승우 작가의 연애소설 <사랑의 생애>의 첫 문장이다. 사랑의 불가항력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선언과 같은 시작이다. 소설은 우리는 사랑에 휘둘리고 사랑에 잠식당해 허우적대는 광경을 보여주며 불가항력에서 불가해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사랑은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이라서 소설가가 기웃대는 좋은 곡식 창고다. 인간은 사랑 안에 있을 때 통속에 놀아나게 마련이고, 그때 우스운 비장함과 비열한 면모가 베어진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을 하고, 이성을 잃고 한 여자에게 목을 맨다. 비실비실 흘러나오던 조소는 어느 순간부터 속 쓰린 공감으로 둔갑하고, 의도치 않은 자기 반영과 앞날의 모색하고 도모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래서 난 유치하다는 속설을 비웃듯 꽤 '잘 쓴' 연애소설을 좋아한다. 어쩌면 연애는 취향의 극단에 선 영역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어떤 상대에 끌리고, 이런 상대는 별로라고 말하는 건 나를 드러내기에 제격이다. 술자리에서 그렇게들 이상형을 묻는 이유가 뭘까.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어떤 배우를 좋아하고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그건 내 취향과 걸맞은 상대인지를 가늠하려는 것 아닐까. 얼마 전 술자리에서도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이상형 배틀을 벌이고 있었다. 외모 얘기는 부끄러워서 적당히 숨기고, 성격과 대화와 같은 추상적인 건 대체로 자신 있게 말하는 게 귀여웠다. 다들 조잘조잘 사랑을 꿈꾸고 있다. 난 그들이 사랑 '얘기', 정확하게는 '연애담'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연애소설을 좋아하는 것처럼 적당히 이상적이고 적절히 통속적인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상형 중에는 식물 키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나왔다. 옆에서 가진 게 개털이면 어쩔 건데, 라는 겐세이가 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일요일 아침에 화초에 물을 줄 수 있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만나겠다고 했다.
바쁘게 살다 보니 놓치고 사는 것들이 있다. 목전에 닥친 일을 해치우기 바빠 과거를 복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린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여지라는 '카르페 디엠'을 입버릇처럼 되뇌지만, 오늘을 수습하는데 경황이 없어 허둥대다가 잠자리에 든다. 삶은 사람과 자연 사회와 역사가 두텁게 둘러싸인 형국인데 좀처럼 그에 부합하는 사유를 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다운 삶, 내가 원하는 인생이 뭔지 고민하는 데 소홀해진다. 살기 바빠지면 취향은 가장 먼저 사라진다. 삶을 사랑하는 데 지쳐 나가떨어진다. 관찰하고 얘기하기는커녕 달아나기 바쁘다. 내 일상에 나를 드러낼 고유한 뭔가가 없어지면 인생은 삼인칭으로 둔갑한다. 그게 연애든 독서든 에세이든 뭐든 간에 일인칭 단수로 이인칭 대명사를 계속해서 의식하는 삶이길 바란다. 내 취향이 고작 생계에 치여 낡거나, 닳지 않기를 바란다.
표지사진 : 팀 아이텔의 2011년작 ‘Untitled(Obser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