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Dec 28. 2022

품에 안아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

 준규가 대전으로 내려간 지 불과 보름이 못 미쳐서 부고 문자를 보내왔다. '고인은 아버지, 상주는 준규, 장례식장은 대전 외곽.' 보통은 이럴 때 전화하지 않나? 갸웃하는데 문자 하나가 더 왔다. '민진아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러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언제 대전까지 가냐. 카카오맵으로 찍어보니 대중교통은 어렵고 차로 때려 밟아도 두 시간 반이었다. 졸음을 참아가며 대전까지 가자니 암담했다. 펜대 운전은 오래 할 자신이 있는데 고속도로 운전은 한 시간만 하면 잠이 쏟아졌다. 졸음쉼터에서 졸도한 사람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고 곯아떨어진 사람들과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싫었다. 여자친구랑 초밥에 에스프레소를 즐겨야 마땅한 화창한 주말에 돼지 수육에 육개장이 웬 말인가.


 계좌이체라는 간편한 교환가치로 퉁칠까 했지만 설마 그럴 수 있을 리가. 녀석이 한 게 있는데. 그래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고 내 간사한 머릿속도 주고받음이 덧셈과 뺄셈의 산수로 바삐 돌아갔다. 삐리리리 계산이 딱 떨어졌다. 이건 갈 수밖에 없는 값이다.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등가는 만들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경사는 못 가도 조사는 가야 한다는 흔한 말도 결괏값을 '가야지 뭐'로 마땅함’으로 반올림시켰다. 컴컴한 내 방 천장을 칠판 삼아서 오늘 시간 계획을 짰다. 지금이 정오니까 가는데 두 시간 반, 가서 좀 개기다가 다시 돌아오면 대충 저녁 8시면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곤경에 처했을 때 긍정 회로를 돌리고 보는 내 버릇은 매년 쪼그라져 가는 질량과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보존할 수 있게 도와줬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집 앞 스타벅스에 사이렌오더로 미리 커피를 시켜뒀다. 숏 사이즈에 샷 추가 공짜, 차량 픽업 오케이. 인생이 스타벅스처럼 계획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면 싶었다. 머리를 안 굴려도 여과 없이 기냐 아니냐로 딱 떨어지면 얼마나 개운할까.


ᅠ바벨을 어깨뼈 위에 얹은 듯 몸이 무거웠지만 어렵사리 개수대 앞에 섰다. 귀찮으니 양치는 생략하자. 껌 씹지 뭐. 머리도 깨끗하네. 세안은 건너뛰고 뻗친 머리만 대충 가라앉혔다. 간밤에 넷플릭스를 보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재생한 지 불과 15분 만에 여자친구가 먼저 잠들었고 나도 도리 없이 실신했다. 되도록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으로 가자. 장례식에 포마드랑 백탁 크림을 바르고 가는 건 좀 이상하니까. 거울 속 나는 밤새 복잡한 수식과 씨름하다가 막 잠에서 깬 무능력한 학자처럼 보였다. 아닌가 더러운 노숙자인가. 마음을 고쳐먹고 이를 닦으면서 대전 외곽 장례식장에 도착해 있을 준규를 생각했다. 아버지가 죽으면 뭐부터 해야 하지? 사별한 아픔보다 우선 눈앞이 캄캄할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 전화를 걸면 다 알아서 해주나. '저기 성인 남성이 죽어서 전화했습니다. 누구냐고요? 제 아버지요. 네 제가 존경하는 분이셨어요. 흑흑.' 다음으로 누구에게 문자를 보내지. 형이 알아서 해주려나. 아니면 장례 가이드 책을 속독하면 될까. 이래서 상조 회사에 가입해놓는 건가. 경황이 없을 준규가 안쓰러웠다. 형제도 없어서 허둥지둥 댈 텐데. 이렇게 사는 데 꼭 필요한 건 학교에서 교육해주면 좋을 텐데. 난 쓸데없는 미적분에 허덕이던 지난 시절과 미적분은커녕 4차 방정식부터 버거워하던 준규가 죽음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풀어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ᅠ서울에서 일하던 준규가 대전으로 내려간 건 작년 일이다. 녀석은 고교 졸업과 동시에 대졸 사원이 대부분인 무역 회사에 입사해서 7년을 다녔다. 불황에 남들이 다 이직할 거라니 공무원 준비한다니 난리를 칠 때도 별 탈 없이 다녔다.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운 좋게도 회사와 함께 성장한 사례다. 근데 작년 여름 국외 출장을 간 도중에 잘 다니던 회사를 잃었다. 호텔 방에서 막 씻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대표가 방문을 두드렸다. 어디서 구했는지 양주 한 병을 들고서. 그는 호텔 유리잔에 술을 콸콸 따르더니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했다. 그간 고마웠다면서. 회사 사정이 안 좋다고. 회사 사정에 빤한 준규로서는 그런 흔한 말이 자기를 놀리는 것 같더란다. 회사 사정이 안 좋을 때 제일 먼저 정리할 거면 고맙다는 말도 거짓말이 아니겠냐며. 양주가 발렌타인이나 조니워커였으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을 텐데 고작 윈저였다나. 집 도어록 비밀번호까지 외울 정도로 친한 회사 대표는 못내 미안했는지 눈을 내리깔고 준규가 붙임성 있고 친절하지만 때때로 정직하지 않아 더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했다. '뭐가 정직하지 않은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자를 거면 이유라도 제대로 알려 주셔야죠.' '정직함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니까 다른 이유는 굳이 알 필요가 없을 것 같네.'


 회사에서 짐을 빼고 잔뜩 열이 뻗쳐서 나를 찾은 준규는 차라리 재정 상황 악화라는 뻔한 말이 더 좋았겠다며 인간으로서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 준규는 해고 통보를 받은 후에 한 달가량은 정리한답시고 회사에 계속 출근했다. 사장 얼굴을 보고 한 번은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는 한창때 신창원처럼 신출귀몰했다. 한 달은 월급도 나왔다. 준규는 이직 준비도 포기하고 대표가 지신에게 한 말을 계속 떠올렸다. 친절하지만 정직하지 않다는 것. '이게 무슨 말이야! 당나귀야 조랑말이야. 소개팅에서 착하게 생겼다는 말과 뭐가 달라. 친절한 건 멍청하다는 얘기고, 정직하지 않다는 건 믿을만한 놈이 못 된다는 의미잖아. 내가 그 코딱지만 한 회사를 어떻게 키워놨는데. 무려 칠 년이야! 어떻게 사람이 그러냐.' '야 뭘 또 네가 다 키우냐. 그냥 다닌 거지.' 회사가 지금도 코딱지보다 크다고 보긴 어렵다는 걸 아는 나로선 회사가 사람을 자르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는 녀석이 너무 순진해 보였다. '하긴 정직하지 못하다니. 진짜 개소리이긴 하다. 넌 너무 순진해서 탈인데.' '뭐라고 개새끼야. 누구 놀리냐.' '아니, 그게 아니고 넌 정직함 빼면 시체라는 거지.' 상심이 커 보여서 못 이긴 척 공감해 줬다. 늘 회사를 욕하던 놈이었으니 이제 자기 사업을 해봐도 좋지 않겠냐며 위로를 보탰다. 녀석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아 보였는데 모처럼 내린 겨울눈이 무척 따듯해 보였다. 녀석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내가 대표 딸이랑 몇 달 만났어.' '그게 뭔 소리야. 누가 누굴 만났다고?' '대표 딸내미가 인턴으로 입사했는데 내가 사수였거든. 막 진지하게 만난 건 아니고, 그냥 친해져서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한동안 붙어 다녔어. 진짜 엄창까고 진지한 건 전혀 아니었다. 고작 두어 달이야. 근데 설마 하니 그것 때문에 무슨 오해가 있었나 싶어. 그렇다고 괜히 말했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까 봐 묻지도 못했네.'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설마 다 한 거야? 딸내미는 뭐래?' '연락도 안 받아. 그래서 답답해서 미치겠어.' '야 그건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앙심을 품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너 그 딸내미랑 헤어질 때 진지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말 했어, 안 했어.'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그게 내가 정직하지 않은 거야?' '아니 지나치게 솔직했던 거지. 어쩌면 대표 입장에는 배신감 같은 거? 뭐 배은망덕 정도?' 옥신각신하던 우리는 회사가 그거 하나뿐이냐는 하나 마나 한 결론을 짓고 헤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주에 준규는 대전 본가로 아버지 일을 배우러 내려간다는 짤막한 문자를 보내왔다. '아버지 평생소원이 내가 그 코딱지만 장갑 공장에 출근하는 거였잖아. 어차피 백순데 소원이라도 들어드려야지.' 준규 아버지는 지역에서 꽤 큰 가죽장갑 공장을 운영했다. IMF다 수출 규제다 뭐다 하면서 주변 공장이 다 쓰러지고 넘어질 때도 여태까지 버텨오셨다. 그 장갑 브랜드는 엄지 손가락만 구멍이 뚫려있는 디자인이었는데, 준규는 단 한 번도 그 장갑을 낀 적이 없다. 준규의 트라우마는 술만 마시면 한 켤레의 장갑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져야 하는 많은 협업 과정을 일장연설하는 아버지의 쓴소리였다. '아버지가 엄청 좋아하시겠네.' '아니, 별 말 없어. 막상 간다니까 걱정이 태산인가 봐.' '그래? 네가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드려라.' '야, 근데 네 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거 때문인 것 같아.' '그게 뭔데?' '내가 정직하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솔직해서 이런 꼴이 된 것 같다고.' '너 너무 솔직하다는 말을 내가 칭찬으로 쓴 건 아니라는 거 잘 알지?'


ᅠ세시가 넘어서 장례식장에 도착해보니 생각보다 사람이 북적였다. 장례식장 구석에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서 상조회사 유니폼을 입은 거구의 아주머니가 성리해 보이는 얼굴로 떡을 담고 있었다. 좌식 테이블이 놓인 식장은 구평 남짓했고, 출입문 반대쪽 벽에는 여러 화환이 늘어서 있었다. 그놈의 해병대 전우회와 로터리 클럽에 농수산물협동조합까지 있었다. 그간 코로나다 뭐다 한창 결혼식과 장례식에 오라는 말이 없어서 편했는데, 규제가 끝나가니 다들 와서 마스크를 벗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칙칙한 날씨와 달리 전등 빛이 너무 세서 실내인데도 손차양을 만들 뻔했다. 빈 테이블을 찾아서 혼자 앉았는데 옆 테이블에 남자애 한 명이 컵에 든 물을 뱉었다가 마셨다가 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침부터 공복이어서 출출하던 나도 육개장을 받아 들고 거의 석션을 했다. 수육을 리필해서 집어먹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건 상조회사 솜씨인가. 병원에서 주는 건가. 장난 아니네. 식장을 기웃거리다 보니 무리로 온 준규네 '전' 회사 사람들이 보였다. 그래도 회사 다닐 때 열과 성을 다했다는 준규 말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휴일인데도 다들 함께 온 모양이었다. 꽤 친한 친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면서 식장에 갈지 말지 망설였던 내 무거운 몸뚱이가 오늘따라 부끄럽게 느껴졌다. 편하다는 이유로 내색하지 않는 예의라는 걸 지키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간 다 이해하겠거니 하면서 가까운 사람이라도 차려야 하는 예의를 생략해 왔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그렇다고 다음 주에 열리는 친구 결혼식에 가겠다는 말은 아니다. 조사가 아니라 경사니까.


ᅠ자세히 보니 식장 안 온도가 상당한데도 코트를 벗지 않고 가운데에 앉아서 금방 갈 거라는 의사를 드러내놓고 떠드는 대머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기운이 회사 대표 같았다. 높은 사람을 모시기로는 지지 않는 나로서는 저 인자함을 가장한 거들먹거림을 잘 알고 있었다. 저 민머리에 누구나 내게 잘 보여야 한다는 좋게 말하면 여유 나쁘게 말하면 오만함이 베어졌다. 대머리는 침통한 표정이었지만 기민하게 언제 자리를 뜰지 살피고 있었다. '뭐가 저리 급해? 밤에 월드컵 보려고 그러나? 나도 보고 싶은데.' 막 어느 노부부 조문객을 맞고 온 준규가 회사 사람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좀 먹었어? 오느라 수고했다. 멀어서 안 올 줄 알았는데 고맙다 야. 졸리진 않았어?' '졸렸지. 졸음쉼터를 진지 삼아서 죽음을 뚫고 왔지. 휴게소 양념감자가 아니었으면 차 돌릴 뻔했다.' '병수는 왜 같이 안 왔어?' '병수 소식 못 들었냐. 그 새끼 요즘 상태 안 좋아.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우스갯소리를 나누자 녀석은 긴장을 푸는 눈치였다. 우린 말없이 함께 앉아서 밥을 좀 먹었다. 준규도 이제 한숨을 좀 돌렸는지 편해 보였다. '수고했다. 근데 아버지 왜 갑자기 그러신 거야?' '오래전부터 간이 안 좋았는데 막상 사인은 급성 심부전이란다.' 녀석은 뭔가 허탈한 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딱 내려가고부터 상태가 확 나빠지더라고 후계자가 왔다 이건가. 진짜 이게 뭔가 싶어. 너무 뻔하잖아. 아, 잠깐만.' 그러다가 불쑥 준규가 패딩에서 책 하나를 꺼내왔다. 내가 지난번에 책 하나 추천해달라고 해서 선물한 '숨결이 바람 될 때'였다. '이거 책 좋던데, 이런 책 더 없냐. 추천 좀 해줘.' '추천? 그거 내가 선물로 준 거니까 네가 간직하고, 내가 비슷한 책으로 하나 더 보내줄게.' '그래 이런 책 좋더라. 죽음을 다루는 데 뭔가 힘이 나는 그런 책 있잖아.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좀 읽으셨는데 좋아하시더라고.'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걸 알고 선물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건넨 선물이 빚어낸 긍정적인 여파에 난 고무됐다. '그래 내가 꼭 기가 막히게 재밌는 놈으로 하나 더 보내마.' 나는 다 읽은 책을 선물하는 버릇이 있는데, 준규를 만나러 가기 전에 내가 원래 골라든 책은 론 마리스코가 쓴 '슬픔의 위안'이었다. 요즘 워낙 녀석 일이 안 풀리고 가끔 글도 써보고 싶다고 한 게 기억이 났음에 에세이 장르로 골랐다. 제목만 봐도 주눅 든 사람에게 쥐여주기 딱 맞지 않나. 근데 막상 책을 집어 드니 아까워졌다. 그래서 내가 비교적 덜 아끼는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선물했다. 별 의도는 없었고 서른 중반에 죽은 작가도 이렇게 의미 있고 알차게 사는데, 앞날이 구만리인 우리도 좀 힘내보자는 의사 표시였다. 근데 엉뚱하게 투병하는 자와 간병인에게 위로를 건네는 식으로 얻어걸려서 과녁에 명중한 것이다. 이런 우연은 생물과 같아서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맞아 들어가면 운명이라는 걸 떠올리게끔 한다.  


ᅠ아직 저녁 조문객이 들이닥치기 전이라 그런지 여유가 좀 있었다. 둘 다 허리띠를 살짝 푸르고 쉬는데 수정이가 태어난 지 고작 석 달밖에 안 된 아기를 품에 안고 왔다. 가뜩이나 마른 몸에 상복이 좀 큰지 치렁치렁했다. 준규에게 거의 떠맡기듯이 아이를 맡기고는 육개장 국물부터 떠먹었다. '배고파서 혼났네. 어떻게 사람이 나한테 먼저 한술 뜨라는 말도 안 하고 너 혼자 먹냐. 진짜 어이가 없다. 누가 보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 거야.' '야 난 네가 먹은 줄 알았지. 왜 이렇게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시비야 시비는. 네 말대로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잖아. 좀 이해 좀 해봐. 밥 먹는 거 가지고 바가지 긁지 말고.' '난 아침부터 은아 챙기느라 고생고생했어. 여기까지 혼자 운전해서 왔다고.' 준규가 더는 말을 붙이지 않고 딴 데를 쳐다보자 수정이도 별말 없이 밥을 먹었다. 대전에 있느라 오랜만에 은아를 보는 준규는 어색해 보였다. 누가 화장실 다녀올 때까지만 남의 자식을 떠맡은 행인 같았다. 여차하면 바로 주고 떠날듯한 표정이 압권이었다. '은아야 저 인간이 네 아비가 맞냐. 아무리 봐도 아닌데.' 난 장난을 걸었는데 준규는 엄중한 표정으로 더 말하면 뒤진다는 강력한 의사 표시를 해왔다.


ᅠ유심히 보니 정말 잘생긴 아기였다. 아기에게 훤칠하다는 말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말 그대로 이마가 빛이 나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남형 아기였다. 아기가 너무 잘생기니 약간 징그럽기도 했다. 원래 아기는 외계인처럼 생겨서 신비로운 건데, 태어날 때부터 이목구비를 갖고 태어난 것 같았다. 문득 나도 안아보고 싶어졌다. 불현듯 호소하듯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좀 보면 안 될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준규가 바로 아이를 건넸다. '나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조금만 맡아주라.'


ᅠ아기를 품에 안았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눈을 부릅뜬 은아는 나를 가차 없이 사로잡았다. 손목과 다리가 보들보들하고 이마에는 얇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얼마나 부리부리하게 잘생겼는지 감탄이 다 나왔다. '어쩌면 이리 예쁘냐? 은아야.' 웃을 때 눈매도 사람을 녹이는 데가 있었다. 머리숱은 얼마나 또 풍성한지. '너 얼마나 많은 남자를 울리려고 이렇게 예쁘게 태어난 거야.' 파우더 냄새랑 섞이긴 했지만, 살냄새가 국밥처럼 구수했다. 뽀얀 발가락에는 발톱이 깨알만큼 자라나 있었다. '은아도 커서 러닝 해라. 발이 커서 잘 달리겠다.' 내가 말을 걸자 색색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 침묵을 온전히 품은 듯 고요하기도 했다. 시간이 좀 지나니 은아가 잠이 들었다. 나는 새로 구운 전이 나와도 입 하나 대지 않고 은아만 봤다. 잠든 아이를 슬슬 흔들어 보았다. 은아는 조금 들썩거리다가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아이 몸이 이렇게 따듯한지 전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안긴 건지, 내게 안긴 건지 알 수 없는 오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아기를 어르며 주위를 돌았다. 준규와 수정이가 다투는 말도 허공으로 스러졌다. 고스톱을 치는 사내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무리가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얘기도, 실속 없는 한탄도 희미해졌다.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기를 품에 안는 게 즐거웠다. 내 품에 안긴 완벽한 자그마한 생명체를 지키기 위해 내 육감이 바짝 섰다.


ᅠ준규와 수정이는 이런 나를 앞에 두고 언쟁을 계속했다.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식장 모든 이가 눈치챌 만큼 격한 다툼이었다. 난 작은 목소리로 은아에게 부모의 쌈질을 중계했다. '싸운다. 또 싸운다. 저러려면 왜 결혼했는지 몰라. 싸우려고 결혼했나. 하긴 싸우면 시간은 순삭이니까. 우리 은아도 순살치킨 좋아하니? 여기 호박전 너무 맛있다. 냠냠.' 장례식장에서 얼굴을 붉히는 두 사람을 보니 설날 특집 프로그램이 따로 없었다. 소리만 죽이고 보면 속사포같이 주고받는 만담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던 몇몇 희극인이 생각났다. 수정이의 목소리는 흉측했고 준규는 특유의 비웃는 표정으로 약을 올렸다. 몇몇 이혼 위기를 넘겨온 부부답지 않게 한없이 가벼웠다. 수정이는 더는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서서 내게서 아가를 빼앗아서 자리를 떴다. 애가 잘 자는데 추운 식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상실감이 느껴져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기의 따스한 체온이 사라지면서 우울해졌다. 다시 아기를 안고 싶었다. 그 온기와 감촉을 떠올랐다. 호박전보다 따사롭고 포근한 은아의 숨 냄새를 맡고 싶었다. 표정도 좀 살펴보고, 배 속은 소화기관이 잘 돌아가는지 듣고 싶었다. 난 늘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고 살았다. 막 울고 제멋대로 굴면 얼마나 골치가 아플까. 지나가는 아가를 보면 귀여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짐짓 다가올라치면 흠칫거렸다. 그런데 어제는 아이를 안고 흔들거리는 친구 모습에 경외감을 느꼈다. 아기가 다시 너무 무거워져서 내게 도움을 청하기를 바랐다. '내가 왜 이러지? 아기를 낳고 싶은 걸까? 자장가를 불러주는 아빠 노릇을 하고 싶은 걸까? 그건 어림도 없지. 그럼, 뭐지?'


ᅠ그날 장례식장에서 밤을 지새웠다. 운구를 할 네 명 중에 하나로 선발됐다. 나는 당연히 그럴 생각으로 온 것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속으로는 좆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새벽에 접어들며 중간에 졸기도 하고, 밖에 나가서 월드컵 중계를 보기도 했다. 시간이 너무 안 가서 준규와 오래전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 오래되어서 쉰내가 풀풀 나는 그런 얘기. '야 그땐 붕어빵이 다섯 개에 천 원이었어. 오백 원어치도 팔았는데.' '맞아. 그땐 그랬지. 피시방도 오백 원짜리 있었는데. 지금은 궁중요리도 주문할 수 있다며 ㅋㅋㅋ' 시답잖은 얘기를 하고 있으려니 서로의 일상에 같은 색으로 처진 빗금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래도 지천으로 깔린 시간을 등에 업고 우리 각자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죽음에 관해, 결혼에 관해, 오늘 안은 은아의 미래에 대해, 아까 자리를 지키다가 미모의 여성분이 들어오자 사색이 되어서 자리를 뜬 전 직장 동료에 관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친구에 대해서. '졸라 늙었던데? 졸라 삭었어.' '졸라 어이가 없네. 난 문자도 안 보냈는데 어떻게 알고 왔지. 졸라 신기하다. 못 본 사이에 졸라 고생했나 봐.' 그 못지않게 늙어버린 삭아버린 준규는 학교 다닐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내밀한 감정을 쏟아냈다. 아버지에 관해, 결혼생활에 관해, 두려운 미래에 관해. 끝나지 않을 권태로운 일상에 관해. 매일 붙어 다니던 시절보다 더 많이 준규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새벽 세 시가 넘어가면서 몸이 쑤셔왔다. 휴지를 베개 삼아 베고 모로 누워서 초저녁에 집에 가버린 은아를  떠올렸다. 불현듯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딴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혀 보지 못하는 곳에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마치 평행우주에 뜬 달빛처럼 영롱한 빛으로 날 내리쬔다. 난 죽음의 공간에서 홀로 웅크리고 뜻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불안한 마음에 구겨진 옷을 털고 밖으로 나가 오래전 사진을 넘겨봤다. 마치 내 존재의 증거를 찾으려는 듯 아이클라우드를 휙휙 넘겼다. 나는 그곳에 있었지만 지금 나와는 어째 딴판이었다. 아까 찍어둔 은아 사진도 보였다. 아기가 사랑스러웠고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 도시가 빚어내는 어둡고 사악한 그림자로부터 아기를 보호해주고 싶어졌다. 은아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이 또한 나를 기쁘게 했다. 내가 아기를 편하게 해 준 것 같아 뿌듯했다.

작가의 이전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