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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28. 2023

당신 일상에는 어떤 물건이 있나요

 일어나자마자 미세모 오랄비 칫솔로 이를 닦았다. 가끔 시간이 없을 때는 리스테린으로 입가심만 하고 나가는데 오늘은 입이 퍽퍽해서 꼼꼼히 닦았다. 어제 야식으로 먹은 라면 탓이다. 어려서부터 밤에 닦은 이를 아침에 또 닦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냄새가 문제라면 후라보노껌 하나면 감쪽같은데 말이다. 근데 요즘에는 치과에서 결제하는 비용을 보고 있노라니 왜 아침에도 칫솔을 드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다. 치과는 잇몸에서 피가 나서 무서운 게 아니더라. 방심하면 피 본다.


 몇 해 전에 필립스 전동 칫솔을 큰 마음먹고 사서 썼다. 근데 한 달도 채 못 된 어느 날 욕실 바닥에 떨어뜨려서 박살이 났다. 순간 메두사를 마주친 얼간이처럼 돌덩이가 되어버렸다. 몸체가 반토막이 나니 보증기간이고 뭐고 수리도 안 해줬다. 그 이후로는 그냥 싸구려 칫솔만 쓴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에서 우아하게 전동 칫솔을 쓰는 배우를 보면 속이 쓰리다. 처음 진동 칫솔을 살 당시에는 왠지 하루 세 번 양치를 해도 즐거울 것 같았는데,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라서 전동 칫솔도 귀찮기는 매한가지였다. 역시 양치질은 손목을 대차게 휘두르면서 닦아내는 게 속이 편하다. 열심히 키운 전완근을 어디에 쓰겠나. 


 출근 전에 몸 좀 녹이고자 필립스 반자동 커피메이커에 커피를 끓여 마셨다. 사회생활 초창기에 값비싼 일제 황동 드립커피세트를 샀을 때는 아침마다 여유를 부리면서 커피를 마실 줄 알았다. 근데 보아하니 내 직장생활에는 출근만 있지 아침이란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아까운 칼리타 드립커피세트는 당근으로 처분했다. 대신 그 흔한 필립스 커피머신을 샀다. 머신은 자동이니 영화에서 본 것처럼 신문이라도 읽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신문은커녕 점점 더 잠이 부족해져서 커피를 입에 댈 시간도 없을 만큼 아침은 빡빡했다. 가끔 너무 급히 마셔서 커피를 쏟거나 혀가 익어버렸다. 일본에는 소 혀를 익힌 요리도 있다지만, 커피를 마시다 익은 혀는 입을 다물기도 힘겹다. 그래도 필립스 커피 머신은 참 잘 산 것 같다. 십만 원 내외하는 가격이지만 예약도 되고 원두도 자동으로 갈아준다. 전동 칫솔에서부터 내 첫 전기면도기, 처음 산 CD 플레이어(Compact Disk Player)까지 모두 필립스였던 걸 떠올려보면 난 이 네덜란드의 대기업과 궁합이 잘 맞는 모양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배낭 여행할 때 기차 옆자리에서 만난 노부부에게 내 이름을 필립스라고 소개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이 네임 이즈 필립스. 아이 헤브 빈 유징 필립스. 두 유 언더스탠드?' 난 유머랍시고 환히 웃으면서 당시 내가 입었던 박지성 선수의 PSV 에인트호번 축구팀 유니폼을 가리켰다. 유니폼에는 에인트호번의 스폰서 사인 필립스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필립스 이즈 소 굿. 베리 아주 좋아. 아이 라이크 필립스 레이저 앤드 지성 팍.' 노부부는 내 얼굴과 유니폼을 번갈아보면서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박지성 유니폼을 입고 필립스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얼간이는 좀 무서웠을 것이다. 수염도 없으면서 면도기 운운하는 것도 기이해 보였겠지. 그리고 내 발음은 면도기의 Razor와 레이저빔을 구분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내 유머는 처참히 실패했고, 그들과 더는 얘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네덜란드 축구 리그에서 암스테르담 지역 연고 팀은 아약스다. 그리고 그 아약스의 전통의 라이벌팀이 PSV 에인트호번이다. 만약에 부부가 열혈 축구 팬이었으면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필립스라는 놈을 가진 지성 팍을 가만히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고 낯이 뜨거워진다.


 폭스바겐 골프를 타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춥고 피곤해서 걸어가기 싫을 때는 승용차를 활용하는데, 정말 딱 출근할 때밖에 안 써서 조만간 처분할 생각이다. 내가 폭스바겐 차량을 산 건 순전히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하루키 소설을 좋아했는데, 주인공들이 꼭 폭스바겐 차를 탔다. 나도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도심의 방 두 칸짜리 맨션에 혼자 살면서 폭스바겐 골프를 타고 과거의 연인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질한 하루키형 남자들이 쿨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있어 보였다. 하루키의 표현대로 폭스바겐은 안전하고 경제적이면서 화려하진 않지만 꾸준하고 평범한 미덕이 있었다. 처음 딜러 말에 이끌려서 팸플릿을 보고 시승까지 했을 때, 이 차야말로 내 평생의 인연이라고 느꼈다. 운명적이라는 말은 참 진부하지만, 난 차를 보고서도 그걸 느꼈던 거다. 근데 지금은 어떤가. 난 하루키를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고, 차는 애물단지처럼 세금과 기름값만 잡아먹는다. 딜러는 처음에는 잘해주더니 이제는 문자도 씹는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변하기 마련이고, 내 신형 폭스바겐도 이제 많이 낡아버렸다.


 내가 남들과 다르게 차를 애용하는 시간이 있다. 난 점심을 먹고 사무실이 시끄러우면 골프 안에 들어가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잔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폭스바겐’에 달린 ‘라디에이터’에 대한 묘사를 읽고 “폭스바겐에는 라디에이터가 없는데요.”라고 문의한 독자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에서는 폭스바겐에 라디에이터가 달렸다고 상상해 주세요.”라는 말을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그가 만든 세계에서는 라디에이터가 작동하니, 실제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지극히 문학적인 대답이지만, 내 귀에는 폭스바겐을 타면 어떤 상상이든지 떠올릴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는 말로 들렸다. 나도 비슷하게 폭스바겐이 제공하는 강렬한 엉따를 즐기면서 마치 거기가 아늑한 료칸 다다미방이라고 상상하며 독서를 즐긴다. 상상은 힘이 세서 책도 잘 읽히고 커피도 달다. 차는 비좁고 청소를 안 해서 먼지가 많은 데다가 공기가 차가워서 손이 좀 시리지만, 도시에서 드문 내 일 인분의 공간 아닌가. 덤으로 폭스바겐은 스피커가 훌륭해서 브금으로 깔린 쳇 베이커의 연주가 근사하고, 큰 마음먹고 택한 천연가죽 시트가 내 몸을 요람처럼 감싼다. 거기다가 남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캄캄한 루마 선팅 필름을 설치한 덕분에 철저한 보안성까지 갖췄다. 오늘은 정영목 씨가 새로 번역한 민음사 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뉴욕에서 배회하는 홀든 콜필드와 온천 여행을 했다. 아무래도 차를 팔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후에는 영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서 남몰래 아이폰 12 mini로 유튜브를 시청했다. 한쪽 귀에는 에어팟 프로를 끼고 안 보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JTBC 뉴스룸을 즐겼다. 오늘은 여당 대표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약이 이어졌다. 귀를 기울여 봤지만 사실 별로 들을 건 없었다. 정책은 사라지고 네거티브 공세만 이어졌다. 레퍼토리도 식상 그 자체였다. 땅 투기, 성인지 감수성, 가족 특혜, 과거 행적, 진정성, 계파 갈등까지. 어쩌면 이렇게들 전형적인지. 야당 당대표의 사법 리스크도 심각하지만, 집권 여당의 혼란도 못지않았다. 상대 후보를 야설 작가라고 규탄하는 발표를 듣고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무실에서 딴짓하는 걸 들킬까 봐 목을 킁킁거리면서 웃음소리를 기침 소리로 둔갑시켰다. '푸흐흡 킁킁킁 콜록콜록'


 이제 텔레비전 없으니 9시마다 뉴스를 보겠다, 드라마를 보겠다며 싸우지 않아서 좋긴 한데, 그래도 가끔 텔레비전을 둘러싸고 가족들끼리 모여 앉아서 과일이라도 먹는 아늑한 기운이 그립다. 어쩌면 더는 그런 시간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각자 폰을 들여다보는 게 지나치게 재밌어져서 터치 없이 멍하니 티비를 보는 게 어렵지 않은가. 하긴, 폰 탓만 할 순 없다. 집에 티비가 두 대가 되고, 피시방이 생기고 노트북과 태블릿을 하니씩 가지면서 넷플릭스랑 왓챠에 가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각자도생은 공고히 굳어졌다.


 요즘에는 사무실에서 에어팟을 끼는 걸 제멋대로인 MZ세대를 놀리는 대표적인 밈으로 쓰는 모양이다. 아마도 타인의 말에 잘 휘둘리지 않고, 조직 생활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는 신세대의 특징을 과장한 것이리라. 나도 몇 번 봤는데 살짝 찔렸다. 난 쉰세대에 가깝지만, 에어팟을 꼽고서 잘만 일해왔다. 하지만 에어팟을 끼고도 계속 뭘 듣지는 않는다. 그냥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서 사위를 고요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니까 전화 소리나 동료들 목소리 정도는 다 듣고도 남는다. 짬이 좀 차서 눈치는 볼 줄 안다. 근무시간에 집중이 안되거나 졸리면 슈베르트 즉흥곡이나 뉴스 채널 따위를 틀고 기분전환을 하는 용도로 쓴다. 에어팟 밈이 유행처럼 번지기 전까지는 에어팟을 끼고도 별문제가 없었는데, 요즘에는 확실히 눈치가 보이게 됐다. 그래서 스스로 타협한 끝에 한쪽만 꼽기로 했다. 난 가끔 수업 시간에 몰래 라디오를 듣던 고등학생 시절처럼 한쪽 손으로 귀를 막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일할 때까지 에어팟을 쓰니 거의 종일 귀를 막고 사는 꼴이다. 특히 집안일할 때나 걸어 다닐 때 참 좋다. 뭔가를 볼 땐 다른 걸 동시에 하기 어렵지만, 들으면서는 다른 걸 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왜 아직까지 라디오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능하다. 자투리 시간에도 뭔가를 들으면서 배우고 즐길 수 있다는 건 에어팟이 내게 준 축복이다. 그리고 퇴근 후에 헬스장을 가거나 강변을 뛸 때도 에어팟은 내가 힘들지 않도록 이런저런 좋은 말을 많이 해준다. 난 이동진, 김혜리, 유시민, 김종배, 김겨울, 김지윤 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하루를 이야깃거리로 꽉꽉 채운다. 확실히 이런 생각도 든다. 세상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막고픈 심정이랄까. 뉴스에 나오는 내용은 심각하기 그지없지만, 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갈등이다. 확실히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가깝다. 하지만 현실의 소음은 나를 괴롭히고 날 방해하며 어쩔 때는 나의 적을 상기시킨다. 확실히 뉴스보다 내 속을 더 뒤집어 놓는 얘기들이다. 그러니 속 편하게 나는 귀 막고 사는 놈이요, 하며 귀머거리를 자처하는 것이다. 나 좀 건들지 마소, 나 SNL에 나오는 맑눈광이오, 하며 시위하는 것이다.


 한참 일을 하고 나서는 참호에 몸을 숨긴 군인처럼 파티션 밑에 바짝 엎드려서 코털을 다듬었다. 인그로운 헤어까지 뽑아낼 수 있는 고가의 전문가용 족집게다. 가격을 알면 놀랄 거다. 면도기 대신 족집게로 코털과 수염을 다듬기 시작한 지도 한참 됐다. 주변에서 우려가 컸지만, 난 털이 별로 없어서 할만했다. '그거 잘못 뽑으면 피부 다 망가져요. 피부암도 걸릴 수 있다고요.' 그럼에도 난 아랑곳 않고 손바닥만 한 거울을 구석에 놓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참아내며 마지막 한 올까지 제거했다. 코털을 뽑으면 뇌척수막염이 생길 수 있다는 전문가의 인터뷰를 본 적은 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는다. 내가 왜 이렇게 겁이 없나 생각해 보니 다 형 탓이다. 어릴 적에 형은 늘 외출하기 전에 현관 거울 앞에서 가츠비 왁스를 바르고 남자의 향기 스프레이를 뿌리고 다이소 눈썹 칼로 눈썹을 다듬은 후에는 최종적으로 코털을 점검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족집게로 보란 듯이 굵은 코털을 뽑아냈다. 그게 참 꼴 보기 싫었던 난 '코털 뽑다가 죽을 수도 있대'라고 경고하듯 얘기했지만, 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형은 잠자코 남은 털을 다 뽑아내고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코털 뽑다가 죽을 운명이라면 내가 깨끗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일 테니 신경 끄고, 내가 나간 사이에 내 방에 들어가면 뒤질 줄 알아라.' 그건 그랬다. 그게 그렇게 위험하다면 코털 뽑다가 죽은 사람도 한두 명쯤 뉴스에 나와야 하는 거 아닐까. 오히려 형 방으로 들어가는 게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짓이었다. SNS가 이토록 발달한 요즘도 코털 뽑다가 병원에 실려 간 사람 얘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내가 SNS를 잘 안 해서 그런가. 혹시 이런 괴소문이 다 족집게와 코털 면도기, 코털 제모액까지 모두 파는 다이소와 쿠팡의 모략인가. 이렇게 다들 털을 뽑아내기 바쁘니 필립스 면도기가 망하는 거지. 난 다이소의 고위급 중역이 몰래 한 해커를 고용해서 전국의 모든 병원에서 코털 뽑다가 죽은 사례를 지워달라고 지시하는 광경을 상상했다. '코털과 관련한 모든 데이터를 지워주셔야 합니다. 우선 선입금하고 모두 지워진 걸 확인하면 잔금을 치르겠습니다.' 난 형처럼 코털 뽑다가 죽을 운명은 아닐 거라고 굳게 믿으며 여전히 코털을 뽑으며 산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 운동 용품 리스트다. 단백질 가루는 신타를 주로 먹는다. 헬스 스트랩은 바르사그립을 쓴다. 헬스 장갑계의 에르메스라고 불리는 최고의 가죽 스트랩이다. 물통은 블렌더 보틀을 쓴다. 동그란 알이 들어가 있어서 뭉치기 쉬운 프로틴 가루를 맑게 섞어준다. 간을 보호하기 위한 밀크시슬과 크레아틴은 필수다. 영양제를 챙겨 먹지 않는 헬스인은 직무유기다. 김종국이 그러지 않았나. 먹는 것까지가 운동이라고. 무거운 중량 운동을 할 때는 챔피언 벨트처럼 생긴 SBD 벨트를 매고 복압을 유지하면서 허리를 보호한다. 허리를 다치면 인생이 허무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꼭 찬다. 운동화는 나이키 메트콘을 신는데 평평하고 쫀쫀한 느낌이 바닥을 강하게 눌러준다. 실은 부끄럽게도 무릎보호대와 팔목보호대도 있다. 관절은 한 번 손상되면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러고 보면 처음에는 헬스를 맨몸으로 했는데 이제 온갖 장비를 쓰면서 한다. 나이를 먹다 보니 겁도 많아졌고, 예전만큼 운동능력이 나오질 않으니 비싼 도구의 힘을 빌리려는 심보가 생겼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냥 헬스장에서 주는 티셔츠를 입어도 되는데 나이키 타이즈와 언더아머 트레이닝 쫄티도 챙겨 입는다. 거울 속의 내가 멋져 보여야 운동이 더 잘된다. 이건 과학적으로 입증되진 않았지만 기분이 모든 걸 좌우한다는 걸 운동하는 사람은 다 안다. 


 가만히 보면 미니멀리스트로 산다고 떵떵거렸는데, 축소지향은커녕 잡다한 물건에 둘러싸여 산다. 여전히 터치 몇 번으로 인스타에서 본 필수템 따위를 쇼핑한다. 책, 연필, 라코스테 티셔츠는 정기적인 지출을 요한다. 이러니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물건을 만지고 사용한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진 삶을 원했지만, 내가 지금 사는 꼴을 보면 켜켜이 쌓인 물건들에 기대서 사는 형국이다. 물건도 사람과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물건에는 사람 간의 이야깃거리가 담기고, 손때 뭍은 물건일수록 추억이 페이스트리처럼 포개진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좋은 추억이 담긴 물건만 갖고 살아야 마땅할 것이다. 비슷한 얘기로, 소설 <일식>으로 유명한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자기 전부를 좋아하기는 어려워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내 모습을 좋아하는 건 어렵지 않다는 취지로 얘기한 바 있다. 스타벅스에 가서 오늘의 커피를 시키고 맥북으로 글을 쓰는 날 사랑하긴 어렵지 않다. 필요 없는 모든 세간을 가져다 버리고 비좁은 집을 넓히는 라이프스타일은 자긍심을 부른다. 어떤 물건을 곁에 두는가가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증거일 수 있다. 반복해서 실망과 혐오가 엄습하는 이 우주에서 난 어떤 물건을 사랑하고 어떤 물건은 밀어내며 나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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