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Mar 28. 2023

식욕과 허기에 관한 글

 ᅠ마음이 위축되면 식욕을 컨트롤하지 못한다. 허파에서부터 작게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이 뭔가를 내놓으라고 재촉한다. ‘그거 먹는다고 살이 찌진 않아.’ 하울링인지 마이크 에코인지 자꾸만 날 설득하려고 든다. 근데 이건 허기와는 무관한 공복감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공허다. 곳간이 텅 비면 채워 넣고 싶게 마련이다. 원래는 자존감이나 낙관이 좀 있거나 적어도 별거 없다는 식의 허풍이라도 쌓아 뒀어야 하는데 바닥이 드러나면 뭐라도 넣으라고 곳간 관리자가 나를 재촉한다. 단순한 배고픔이라면 적당히만 먹어도 채워지는데 공허해지면 적당히만 먹어서는 포만감이 들지 않는다. 공허가 정서에 관련한 고통이라면 그 원인부터 찾아야 하지만 밤에 찾아오는 나약한 내 면모는 원인의 원인을 타고 올라가도 맞닥뜨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장 손쉬운 해결책으로 배달앱을 택하는 것이다. 내가 급할 때 찾는 건 보통 라면이지만, 속이 쓰릴 정도로 허기가 극심한 날에는 배달의 민족에게 도움을 청한다. 전화 한 통이면 내 텅 빈 마음을 채워줄 바삭바삭한 선물상자가 도착한다. 하지만 손쉬운 답은 늘 정답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고작 이만 원짜리 치킨으로 마음을 달랠 턱이 있나. 어림도 없지. 그건 마치 한갓진 지차체의 청년정책처럼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하다. 아무리 MBTI를 하고 혈액형을 들먹여도 내 마음을 정확히 안다는 건 요원하다.


 회사에서 담배를 피우며 분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다 하나같이 스트레스 때문에 핀다고 말한다. 내가 스트레스에 커피와 초콜릿을 먹는 것처럼 잠시간의 포만감을 위해 연기를 피운다. 그분들 붙잡고 애연은 장기적으로 보면 건강에 해로우니, 아니 오히려 장기적으로 따지면 건강을 해치는 길이니, 운동이라도 해보라고 하면 그 말이 들릴 턱이 없다. 아니 누가 모르나, 운동 좋은 거. 운동 다 해봤지. 근데 오히려 스트레스만 더 쌓이던데. 실로 그렇다. 운동은 즉각적인 대처로는 부적합하다. 운동으로 인한 효과는 점진적이라서 느리고 지루하다. 정체 구간도 있고 사람에 따라서는 눈에 띄는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담배로 스트레스를 지지고 있는 분들에게 어찌 금연을 권할 수 있을까. 내가 배달의 민족과 연을 끊지 못하는 이유와 다를 게 없다. 곳간이 텅 비었고, 우선 손에 잡히는 뭐라도 넣어야 할 터다.


 배가 극심하게 고프면 언성이 커지면서 뭐라도 더 먹겠다고 떼를 쓰는 소리가 들린다. 꽹과리도 치면서 협박도 한다. 널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해 주겠다는 경고성 멘트가 들려온다. 그냥 기분 문제로 보여서 무시하려고 하지만, 호르몬은 그렇게 쉽게 물러서는 나약한 놈이 아니다. 처음에는 찬물과 함께 영양제를 먹고, 나중에는 아몬드를 씹어먹지만 그건 근원적인 허기를 채워내는 음식이 아니다. 벌겋고 걸쭉하고 쫀득하고 과하고 펄펄 거리는 뭔가여야만 한다. 가령 마라탕이나 양념치킨 같은 거 있지 않나.


ᅠ  갑자기 닥쳐오는 공복감은 딱히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해소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통증 없는 정체불명의 허기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터치 세 번이면 누군가가 닭을 튀기고 무를 챙기고 일사불란하게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는 걸 상상하면 위로가 된다. 방금까지 찌푸렸던 미간이 펴지면서 비로소 의자에 몸을 편히 기댈 수 있다. 저녁 내내 억척스럽게 운동한 게 말짱 도루묵이 될 테지만 상관없다. 이러려고 운동하기도 했으니까. 벨이 울리고 시커먼 옷을 입은 라이더가 방금 튀긴 닭을 문 앞에 두고 떠나면 삭막했던 기분도 헐겁게 탁 트인다.


ᅠ 한때, 상사와 사이가 멀어지고 프로젝트에 몰리면서 운동을 놓아버린 때가 있다. 그땐 일을 하다가 ᅠ지칠 때는 곧잘 치킨을 시켜 먹었다. 치킨을 먹다 보면 목화밭에서 핍박받으며 혹사당하던 미국 노예들이 왜 퇴근하면 그렇게 닭튀김을 찾았는지 알만했다. 그땐 지금과 달리 싸고 간편한 음식이었을 테니까. 그때야 먹을 게 없어서 목이나 날개 같은 살이 없는 부위를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다가 기름에 튀겼다지만, 나는 이왕이면 단백질이 풍부한 배달 음식이라는 이유로 구운 닭을 먹는다. 칼로리 문제로 튀김옷을 입힌 닭은 웬만해서 피한다. 이왕이면 구운 닭을 애용하고, 콜라는 받지 않고 제로 음료를 마신다. 좀 더 침착한 상태라면 보쌈이나 회를 시켜 먹는다. 피자와 파스타는 망하는 길이다. 그건 소개팅 만남 용도 외에는 백해무익한 밀가루 덩이다. 버거킹에 가더라도 감자튀김 대신 코울슬로를 먹는 것과 같은 요령이다. 구차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최악보다는 차악이니까. 열받는다고 라면 네 봉에 대창구이 같은 걸 먹으면 그건 파멸과 같다. 복구도 불가능하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죽자는 거다.


ᅠ 그러다가 이성이 끊어진 시기가 찾아왔다. 헬스장도 걸렀다. 상사에게 종일 시달리다 퇴근하고 너무 열받아서 배달의 민족에게 구호 요청을 했다. 배에 구멍이 뚫린 듯 허전했다. 매일 봐야 하는 사람과 사이가 틀어지니 사무실에 있는 게 고역이었다. 그땐 회사가 너무 가기 싫어서 KBS 아침마당을 틀어놓고 발기 부전에 고전하는 중년 아저씨가 하는 말을 듣다가 출근 시간을 놓치기도 했다. 간혹 밤을 새우고 회사에 일찍 도착하면 지하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출근 시간 1분 전까지 버티다 들어갔다. 단 1초도 사무실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퇴근하면 퇴근했다는 안도만큼 내일 출근이 고통스러웠다. 나만 보면 노여워하는 실장은 인간 개조를 시키겠다고 식칼을 들고 덤볐고, 난 조그만 자존심을 세워가며 항변했지만 끝내 고개를 숙이고는 목을 내밀었다. 내 목구멍이 고작 포도청이라는 걸 확인할 뿐이었다. 포도청에 붙잡힌 내 목구멍은 계속 사식을 원했다. 굽네치킨 쿠폰이 냉장고를 가득 메웠다. 근데 그렇게 배가 부르게 먹으면 도무지 운동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혼자서 치킨 한 마리는 충분히 먹지만, 운동을 하러 가기에는 충분히 배가 부르다. 1인 가구는 이게 문제다. 대신 먹어줄 사람도 없으니 미련하게 끝까지 먹는다. 왜 반 마리는 팔지 않는 건데. 팔아 봤자 한 마리랑 3천 원 차이 나서 무조건 한 마리는 시키게 만들겠지. 비뚤어진 나는 운동도 빠지면서 먹는데 탐닉했다. 월급 대부분이 배달앱으로 나갔다.


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이 유일한 위안이던 때였기에 난 배달의 민족과 끈끈한 유대감을 느낀다. 밤이면 혼자 방에서 치킨을 흡입하며 나를 달래던 때에는 그들이 나와 한민족이었다. 음식은 내게 뭔가를 요구하지도 내가 어떻다 지껄이지도 않았다. 먹을 때는 오직 나뿐이었다. 그렇게 체중은 계속 불어났지만, 난 그런대로 낙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매일 체중계에 오르면서도 무거워지는 나를 막을 순 없었다. 치킨 무의 물을 따라내고 허겁지겁 뼈를 발라내며 닭 한 마리를 먹어 치우는 쾌감을 떨칠 수 없었다. 과식에 수반되는 필연적인 죄책감과 불쾌함을 잘 알면서도 메마르고 쪼그라든 마음을 감쪽같이 복구해 주는 야식의 위로에 넘어갔다. 배달 온 치킨과 함께 유튜브 교양 채널을 틀어놓고 보는 둥 마는 둥 발골에 집중하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치면 난 얼른 눈을 돌렸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씹고 있던 걸 마저 다 삼키기도 전에 또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몇 번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는 내 모습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내일은 꼭 다시 헬스장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ᅠ 난 당시 뚱뚱하지 않았지만 금세 몸이 좌우로 벌어졌다. 몸이 마치 식빵처럼 불어났고, 숨소리가 쌕쌕거렸다. 난 두툼한 내장 지방을 물침대 삼아서 출렁거렸다.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직장에서 심하게 들볶인 날에는 과자를 달고 살았다. 치킨 맛 과자에 피자 맛 과자를 먹었다. 스윙칩에서 치토스와 홈런볼까지 가리지 않았다. 분명히 저녁에 구내식당에서 제육과 상추에 밥을 산더미처럼 먹었는데도 퇴근하면 기운이 없어서 군것질거리를 찾았다. 회사 건물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는 세븐일레븐에 있었고, 난 아르바이트생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몽쉘과 신라면을 계산대에 올려놨다. 부끄러웠지만 그 와중에 제로 콜라를 섞어서 불편한 기분을 달랬다.


ᅠ 그 시절을 기억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금요일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 일이다. 주말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해치고 나아가 구석 자리에 앉아서 보통 때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했던 두툼한 스테이크를 시켜 먹었다. 상냥하게 몸을 숙이고 주문받는 직원의 다정한 눈빛을 모른 척하고 티본스테이크를 시킨 적도 있다. 왠지 혼자 가는데 샐러드바만 이용하는 게 부끄러워서 4인 가족용 스테이크 코스를 시켜 먹기도 했다. 아이패드를 켜고 뚝뚝 떨어지는 레어 고기를 씹으면서 드라마를 봤다. 아마 그때 난 회사에 다니면서 당한 모욕을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했던 것 같다. 내쳐진 자존심이 좀처럼 바로 서지 않아서 내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한 것이었다.


 ᅠ사무실에는 커피를 달고 살았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독한 커피를 내려서 링거 사이즈 컵에 담아서 계속 마셨다. 컵을 얼굴에 대고 후루룩 거리면서 회의 시간을 버티는 게 내가 가진 최소한의 방패였다. 너무 화장실을 자주 가서 담배 피우는 사람보다 더 자리를 비웠다. 그땐 옷에 누런 얼룩이 많았는데, 누가 보면 점심에 짬뽕이나 김치찌개를 먹다 흘렸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종일 커피잔을 찰랑거리며 들고 다닌 탓이었다. 퇴근해서도 도롯가에 있는 작은 커피숍에 들어가서 블랙커피를 비우고 또 비웠는데, 음식에 곁들여 마시기도 했고 커피만 마시고 나오기도 했다.


 ᅠ몸이 불어나니 옷 쇼핑도 잦아졌다. 퇴근길에 백화점 1층 자라 매장에 들렀다. 다른 덴 가지도 않고 오직 스페인 스파 브랜드 자라에 가서 옷을 골랐다. 직원이 날 따라다니지 않아서 좋았다. 유니클로보다는 매장이 어두워서 좋았고, 직원은 불친절했지만, 마음에 쏙 든 만큼 무관심했다. 시장판처럼 켜켜이 쌓인 매대에서 몇 벌을 골라 나 혼자만 있을 수 있는 탈의실에 들어갔다. 내가 절대 입고 나갈 수 없는 화려한 옷을 걸치고 거울을 바라봤다. 가관이었다. 왜 그랬는지 자꾸만 입어봤다. 자라라는 브랜드가 타깃으로 하는 고객은 길쭉하고 늘씬한 체형이라서 나는 소화할 수 없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입지 않을 옷을 사들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처럼 무절제하게 살았는지 믿을 수 없다. 스무 해 넘게 유지해 오던 체형이 망가지고, 오직 방종으로 지탱하는 내가 무섭기도 했다. 요즘도 까딱 잘못하다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다. 당시에는 이상하게 관능을 향한 욕구가 없었다. 야릇한 충동으로 외로운 밤을 달구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허기만 쨍쨍했다. 주변에 나를 위로해 줄 상대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딱 버림받은 개츠비 꼴이었다. 섹스를 향한 욕구는 식욕만큼이나 흔하지만 내세울 수 없었다. 섹스에는 훨씬 더 많은 수치심이 붙어 있었다. 그저 삶을 충만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인정받기 어려운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허기는 자연스럽게 내세울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몸을 비비고 서로 온기를 나눠 가지는 순간이 주는 충만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뜨끈한 라면 국물이 주는 따스함은 내가 쉽게 취할 수 있는 온기였다. 꼭 끌어안아 등을 두드려주는 것만이 버티게 하는 밤처럼, 트림하며 거북한 속을 감내하며 애벌레처럼 누워서 자는 배부른 위안도 엄연했다. 치유란 그다지 거창한 게 아니고, 내가 내 몸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는 거라면 과식도 빼놓을 수 없는 자구책임이 분명했다.


 나는 당시 작은 아파트에서 살며 평범하고 소박한 시간을 보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일터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저녁에는 친구와 맥주 한잔을 기울이는 식이었다. 휴일에는 놀이터에서 친구와 함께 햇볕을 쬐기도 했다.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갈등이 시작되고 관계가 삐걱이면서 연이어 직장마저 위태로워졌을 때 다툼이 시작됐다. 걸머져야 할 책임감과 앞으로 일어날 변화가 두렵기만 했다. 하지만 그 고민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럴만한 마음을 갖지 못했다. 그 사람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걸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소박하고 불완전한 모습의 행복이 삶의 본질이라기보다는 내게 일어나는 사고로 여겼다. 그래서 현실을 둘러싼 빗장을 그에게 풀었다. 난 한밤중 꿈에서 깨어나 불현듯 서글픔을 느끼기도 했고, 옆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안도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지만 그 순간 위안이 되는 마음을 공유하지 못했다. 그게 그 시절이 내게 남긴 회한이다. 야식에 집착하던 시절이 지닌 원인의 원인이다.


ᅠ 후회하고 자책하고 이를 갈아도 같은 실수를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헛발을 차는 것이 삶의 작동원리인지도 모른다. 굴레와 같은 탐닉이 자아낸 기행은 욕지기라도 뱉고 싶을 정도로 자괴감을 자아낸다. 난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헬스장을 가고 닭가슴살을 데워 먹는다. 떨어지더라도 적당히 넘어지는 수준이어야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그냥 굴러버리면 기어 올라오는 데만도 한참 걸린다. 난 나를 괴롭히던 상사와 부서가 달라지면서 다시 루틴을 되찾았다. 삶이 정상궤도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인연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시 헬스장을 다니고 건강한 몸을 되찾고 나서야 그 시절은 아주 특이한 과거가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어느 날 겪은 유체 이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