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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1. 2023

어느 날 겪은 유체 이탈

소재 <근육통>

ᅠ토요일 아침, 시계를 보니 벌써 느지막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길게 쓰려고 했는데 극심한 근육통에 도통 일어나기가 버거웠다. 어제 어깨 운동을 무리했더니 등부터 목까지 단단히 뭉쳐있었다. 몸을 뒤척이며 계속 잠을 청하다 보니 연달아 꿈을 꿨다. 꿈속에서ᅠ여러 지인과 소파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눴다. 장소는 너른 풀밭이었고, 나는 온갖 제스처를 동원해서 내 심정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는 친구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힐링캠프 녹화장에서 다섯 시간은 족히 촬영한 기분이었다. 여덟 시간을 내리 자고도 지치는 걸 보니 대화가 꽤 심각했던 것 같다. 도무지 가닿지 못하는 관계, 거치적거리는 잡념, 휘둘리는 육체가 뇌리에 새겨졌다. 요추 부근이 뻐근한 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발가락을 꼬며 내 방 곳곳을 둘러봤다. 이불은 빤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얼룩덜룩하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 어제 입고 빨래통에 넣지 않은 운동복이 소파 뒤편에 변사체처럼 유기되어 있었다. 아뿔싸, 소파 뒤는 걸레로 닦은 지가 반세기는 넘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어제 너무 무게 욕심을 낸 모양이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한동안 멍하니 벽지만 쳐다보며 시간을 축냈다. 오스카 와일드도 파리의 꾀죄죄한 호텔에서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벽지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고 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이 나겠다. “


 근육통은 나 같은 헬스인에게는 반갑고도 무서운 손님이다. 왠지 운동이 잘 되었다는 기쁨을 줌과 동시에 그날 하루를 망가뜨린다. 건강하게 지내려고 운동을 하는데 근육통이 생기면 몸을 움직이기도 버겁다. 오늘 소중한 토요일 오전도 그렇게 침대에서 벽지와 씨름하면서 흘려보냈다. 근육통으로 옴짝달싹 못하면서 생각만 많아졌다. 길어지는 말, 도저히 서술할 수 없는 감정이 온방을 부유했다. 도대체 뭘 기대했길래 난 친구에게 그렇게 나를 드러냈을까. 


 어제 만난 민구는 다리를 꼬고 내 얘기를 들었다. 난 진솔하게 얘기한다는 게 자꾸만 변명조로 날 변호하기 빴다. 얘기를 이어가면서 잠차 내 바닥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걸 느꼈다. 전하려던 진심은 온 데 간 데 없이 적나라한 내 내면의 누추한 면모가 여과 없이 삐져나왔다. 주책맞게 이것저것 다 꺼내놓으면서 동정을 바랐을까. 스멀스멀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내 약한 환부를 드러내놓고, 기어코 상대의 아픈 구석을 끄집어내야 돈독한 사이라고 믿어버리는 미련한 심보였다. 민구는 어색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난 혼자 남아 식은 커피를 다 마시고 집으로 향했다. 


 어제의 내가 너무 싫어, 발작 같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실눈으로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백지장 같은 빛을 바라보며 어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직 더 생각할게 남은 모양이다. 방구석에서 이러고 있는 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 퀴퀴한 원룸방은 나뿐이라서 누구도 날 볼 수 없었기에 더 누워있을 수 있었다. 벽지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이토 준지 만화에나 나올법한 기괴한 형상을 떠올렸다. 어느 순간부터 근심은 사라지고 한낮의 관능에 빠져들었다.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을 때처럼 일상 언어와는 다른 시적 언어가 나를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일찍이 절망의 골수분자였던 그녀의 뇌세포가 방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져 나와 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이 시대의 사랑 중) 시인의 시어는 도통 잘 읽히지 않아서 하나하나 뜯어보게 만들었다. 텔레비전을 켜면 나오는 과잉된 발라드처럼 우악스럽지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을 알아주는 신통한 효력이 있는 말투였다. 어쩌면 시어에서 느껴지는 낯선 비탄과 절망에 위로받으려고 최승자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만 이러는 건 아니구나, 하는 못난 위로가 있다. 


ᅠ허리를 두드리며 몸을 뒤척였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카페로 갈 생각이다. 아니 생각은 벌써 채광 좋은 카페에 앉아 있다. 뭔가 대단한 걸 쓰고 싶은 욕심은 없는데, 뭐라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음이 급하다. 대체 왜 밥벌이에는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이런 고민에 휩싸여 사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운동이 몸을 쾌하게 하는 행위라면, 아마도 글은 정신의 헬스가 아닐까. 무거운 글을 쓸 때는 힘들지만, 샤워를 마치고 거울 속 나를 보면 왠지 모르게 더 늠름해져 있다. 어릴 적 마시던 코카콜라처럼 목구멍이 따끔하지만, 그 통각에 일상이 청량해진다. 확실시 쓰고 따가운 고통 안에 일시적인 깨우침도 있는 것이다. 


 몸을 뒤집어서 다른 쪽 벽을 보고 누웠다. 한낮 백일몽은 점차 야릇한 상상으로 번지고,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뭉근한 감각에 휩싸였다. 지나간 매혹에 매여 현실을 잊고자 하는 꼴이 우스웠지만, 한때는 온 마음을 줬던 순간이라 두 시간은 너끈히 공상에 빠질 수 있었다. 방문을 잠그고 곡기까지 끊어내며 생각하느라 바쁘다고 외쳐댔던 더벅머리 중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한때 가장 뜨거웠던 시기를 미적 기준으로 삼는다던데, 내가 지금 딱 그 꼴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우리 집이 최악이어서, 그땐 침대에 누워서 매일 밤 기도했다. 부모님 싸우는 소리에 이어폰을 귀에 박고 모든 게 끝나길 바랐다. 이 망할 놈의 집구석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차고 나갈 상상을 했다. 같은 옷을 며칠씩 입고 매일 라면만 먹어도 상관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혼자가 되길 염원했다. 중학생 때 유달리 좋아했던 만화가 <기생수>였는데, 만화의 첫 문장이 딱 내 심정이었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 인간 개체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간이 100분의 1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100분의 1이 될까." 당시에 내 몸에는 죽음에 대한 병적인 탐닉과 지독한 콤플렉스가 무작위로 갈마들었다. 나 자신을ᅠ백반집 손걸레 정도보다 못하게 여겼다. 대충 몇 번ᅠ닦아내도 음식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더러운 테이블이었다. 세상이 미워서ᅠ정체 모를 뭔가가 나타나서 온 인류를 절멸시켰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사시사철 고작 젖과 좆과 질 문제로 골몰하는 나를 누군가 응징해 주기를 바랐다. 그때 나를 엇나가지 않도록 붙들어 준 게 어쩌면 이런 공상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공상과학에 탐닉했다면 과학자가 될 수도 있었겠으나, 공상만 하다 보니 글을 쓰는 자가 되었다. 방구석에서 온갖 음습한 생각으로 벽지를 더럽히는 한량에 머물렀다. 난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


ᅠ자다가 무슨 꿈을 꿨는지 몸에서 땀 냄새가 심하게 났다. 나는 어렵사리 소파에 기대앉아 텅 빈 거실을 바라봤다. 샤워하고 옷을 입고 또 매일 타던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게 버겁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오늘은 공연을 보는 날이니까 서둘러야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종로에 위치한 한 예술극장에서 보기로 했다. 대충 샤워를 하고 머리에 뭐를 좀 바르고 신경 써서 옷을 입었다. 어깻죽지가 계속 아파지는 게 오늘은 헬스 하기 어려울 것 같다.


ᅠ공연에 들어가기 전에 스타벅스에서 글을 썼다. 머금고 있던 생각을 털어내려고 최대한 솔직하게 적었다. 그 와중에 배가 고파져서 과일과 바나나를 시켜 먹고 요구르트에 샌드위치까지 먹었다. 날이 좋아 보여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ᅠ근육통을 삭혔다. 창가 넘어 인파를 구경하며 계속 어깨를 문질렀다. 창밖으로는ᅠ뭐가 그리 재밌는지 시시덕거리는 사람들이 즐거워 보였다. 뭐 하러 그렇게 아름다운지, 곧 없어질 텐데. 오후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손만이 홀로 남아 싸웠다.


커버사진 출처: 설리에 관한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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