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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7. 2023

독서에는 이름난 클래식, 운동에는 육두문자 힙합!

 난 지적 허영을 짤랑거리는 장신구처럼 달고 다닌다. 스피노자의 잠언인 깊게 파기 위해서 넓게 파기 시작했다는 말을 어디서든 아는 척을 하려면 뭐든 얕게라도 알아둬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래서 뭘 접하든 이것저것 주워들으며 감만 잡다가 조금 복잡해질라치면 돌아서는 패턴이 생겼다. 깊게 파려고 넓게 팠는데 지쳐서 삽을 내려놓고 다른 웅덩이를 찾아 나서는 꼴이다. 호기심이 많아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니 재미는 있는데, 스페셜리스트와는 멀어져 버렸다. 짤랑짤랑 거리는 뜨내기보다는 제너럴리스트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쪽이다.


 음악 감상도 마찬가지라 플레이리스트에는 이름난 클래식 교향곡 번호를 올려두지만, 그냥 남들이 좋다고 하니 따라 듣는 정도다. 누구나 알만한 곡을 들으면 취향보다는 허영을 더 즐길 수 있다. 듣다가 지루해도 곡이 가진 명성과 그에 따라붙는 정보를 습득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가령 베토벤이 쓴 마지막 4중주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16번 마지막 악장 첫 페이지에 적힌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라는 말을 얹을 수 있지만,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 평온함이 돋보이는 마지막 악장이 흘러나와도 난 누구 음악인지 몰라 갸우뚱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지식이다 보니 속은 텅 빈 깡통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현대 사회에서 예술감상은 물론 어떤 옷을 입고 뭘 먹는지가 그 사람의 계급을 표상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내가 아무리 개인의 취향이라고 바득바득 우겨봤자 기호라는 건 알게 모르게 출신 계급을 반영한다. 그러니 인스타그램에 고급스러운 취향을 남에게 드러내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취향은 계급적 과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있어 보인다는 말도 우열을 내포하는 의미가 있다. 지적이고 비싸 보이며 외모가 훤칠하고 하는 걸 보니 좀 사는 집 애라고 여길 때 있어 보인다고 하지 않나. 난 살면서 그 '있음'의 범주에 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심지어 운동할 때도 없는 걸 있어 보이기 위해서 제대로 배우려고 했다. 그렇다고 있어 보이기만 하고 없는 건 싫어서 더 초조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음악은 내가 넘볼 수 없는 저 너머 영역으로 느껴진다. 난 억지로라도 내 취향에 클래식 음악을 추가해서 내 계층 배경을 있어 보이는 무엇으로 둔갑시키려고 애를 썼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쓴 책에서 그은 밑줄을 떠올렸다. "음악은 정신 예술 중에서 가장 '정신적인' 것으로, 음악에 대한 사랑은 '정신적 깊이'에 대한 보증이 된다."(구별 짓기 중) 근데 아무리 좋아해 보려고 해도 귀에 감기질 않으니 늘 멀게만 느껴진다. 정기적으로 공연장에 가고 공중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비발디의 사계'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이게 그렇게 유명하단 말이지,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지만 금방 잠에 든다.


 오직 순수한 땀방울과 삶을 향한 열정만 있어 보이는 헬스에도 계급의식은 떠나질 않는다. 난 어려서부터 왜소한 체격과 작은 키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랐다. 깔창이 나오던 초창기부터 애용했고, 키가 커 보이기 위한 옷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거의 스키점프 자세로 거리를 활보할 무렵에야 발목에 무리가 가서 깔창을 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만난 헬스는 없는 내가 있어 보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있어 보이는 애들 앞에서 흉부를 펴고 얘기할 수 있는 세계였다. 난 어디 가서 헬스는 내게 건강한 정신과 단단한 체력을 줘 삶을 바꿀 수 있었다고 얘기했지만, 정작 내 속에서 가장 중요했던 목표는 어디를 가든 꿀리지 않는 몸이었다. 왜소하다고 평가 절하당하지 않고 볼품없다고 무시당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 헬스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헬스는 내 지겨운 열등감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긴 시간 운동을 하면서 특출 날 건 없어도 건강해진 몸을 만들고 나니 근력은 이제 내 가장 강력한 자산이 되었다. 문화 소양이나 학력과 같은 건 말마따나 몇 시간을 떠들어야 드러나지만, 몸뚱이는 첫 만남부터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사용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인플루언서의 외모 아닌가. 난 어려서부터 금전상의 여유와 지성을 갖추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가장 열심히 한 건 쓸만한 몸을 만드는 일이었다. 어딜 가든 기죽지 않기 위해 헬스장에 출근했다. 손쉽게 사람을 구별 짓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기 위해서만 운동을 한 건 아니지만, 그걸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사실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은 힙합이다. 부르디외가 얘기한 음악이 가진 정신의 깊이는 잘 모르겠고, 힙합은 일말의 지식 없이도 그냥 들으면 좋다. 일종의 '길티플레져'처럼 어디서도 말하지 않고 혼자 즐기는 취미다. 내가 힙합을 즐기는데 미세한 가책을 느끼는 이유는 전적으로 가사 때문이다. 힙합 가사는 직설적이고 때론 폭력성이 짙다.  욕설이 잦은 데다가 여성 비하적인 혐의를 지울 수 없는 가사도 흔히 볼 수 있다. 드러내 놓고 얘기하기엔 부담스럽다. 내가 힙합 팬을 자처하면서 힙합을 향한 편견을 조장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힙합은 에어팟에 나오는 걸 들을 때가 가장 속 편하다. <나쁜 페미니스트>를 쓴 록산 게이도 여성 비하 가사가 가득한 힙합 음악을 즐긴다고 고백하지 않았나. 그 중독성이 거의 마라탕 급이다. 요즘처럼 정치적 올바름과 혐오 감수성을 중시하는 시대에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서 음악을 들을 때도 주위 시선을 살피게 마련이다. 느슨한 순결 의식과 주색에 경도된 망나니 같은 가사에 내가 얼마나 큰 즐거움을 느끼는지 글로도 쓰지 못하겠다. 당연히 대부분의 힙합은 쿨하고 건전하지만 내 취향이 그렇다는 말이다. 쇼팽과 베토벤을 멜론 플레이리스트에 올린다고 그 밑에 깔린 블랙넛과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곡이 사라지진 않는다.


 글을 쓸 때는 물론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든지 슈만의 <사육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처럼 글에 집중하기 좋은 음악을 즐기기도 한다. 말 그대로 배경음악으로 깔기 좋은 연주곡이다. 하지만 운동할 때는 힙합 가사를 자양분 삼아 거리를 뛰고 고중량 쇳덩이를 든다. 내가 최고고 너는 나보다 한 수 아래일 뿐이라는 힙합의 자기 자랑 정서가 기분을 한껏 고양한다. 그만큼 힙합은 헬스가 가지고 있는 호방한 정사와 일맥상통한다. 힙합은 가사가 중요한 장르 특성상 그 표현 범위가 광의적이기 때문에 난 항상 가사를 곱씹으며 멘털을 부여잡는다. 에두를 거 없는 직선 주로의 쾌감이 내 몸을 움직이게 한다.


 내게 발라드는 따분하고 록은 과잉이며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는 낯 간지럽다. 오직 대중가요에서 힙합만이 제멋대로에 건방지고 안하무인이라서 좋다. 있어 보이는 척하려고 애썼던 모든 허영을 벗어던지고 힙합 특유의 방자하고 교만한 태도에 매료됐다. 래퍼 스윙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힙합에 관해 잘난 척을 누가 더 멋있게 하는가의 싸움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발라드가 사랑 타령만 하듯 힙합도 자화자찬이 장르 특성일 뿐이다. 에미넴의 등장 이후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이겨내고 내가 랩으로 부자가 됐다는 자수성가 랩이 판을 쳤다. 거기에 돈 자랑, 작업물 자랑, 애인 자랑, 시계 자랑, 신발 자랑, 인맥 자랑하는 건 덤이다. 더 새롭고 참신한 라임과 플로 위에 제 자랑을 얹는 게 포인트다. 그건 내가 글을 쓰는 욕구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고유한 시선을 드러내고자 가사를 쓰는 건 내 모습이다. 어제 쓴 가사를 오늘 행하지 못하면 구려지는 것도 힙합과 글쓰기의 동질감이다.


 어둡고 키치한 데 끌리는 욕구는 어디 가서도 풀기 어렵다. 불투명한 용기에라도 담고 싶은데 그럴 때 힙합이 내 숨통을 틘다. 늘 말조심하고 삼가야 하는 것 투성인 직장 생활을 하면서 힙합을 듣는 이유다. 특히 점심 식후에 의자를 뒤로 젖히고 힙합을 들으며 숨통을 틘다. 김 부장의 잔소리에 시달리다가 퇴근하면 쇳덩이와 씨름하면서 가사를 읊는다. 좆같은 걸 좆같다고 말할 수 있는 세계에서 난 한껏 자유롭다.

 그들은 말한다. 가지런한 세상은 재미가 없다고, 난장을 피우면서 꽥꽥 소리를 지르자고. 고요한 사무실을 다 뒤집어 놓으라고. 네가 제일 잘났으니 다른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아이들에게 아무리 얌전히 있으라고 말해봤자 입만 아픈 것처럼, 세상 모든 재미는 사실 뒤엎고 까불대는 카오스의 세계에 있다. 사사건건 바름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대놓고 삐뚤어지고 싶은 반항심을 가까스로 참고 사는 내게 힙합은 배경 음악이 아니라 이마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계엄령에 가깝다. 나는 대체로 균형과 질서를 추구하지만, 일이 고되고 힘들 때는 괴성을 지르다가 종국에는 널브러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비트 안에서만큼은 좀 더 상스럽고 못돼먹고 건들거려도 괜찮으리라.


 실제 헬스장에서는 욕설을 많이 한다. 세트 수를 채워가면서 근육이 다 소진됐을 때 숨 가쁨과 통증이 찾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욕설을 뱉는다. 귀에서는 평소에는 감히 입에도 꺼내놓지 못할 가사가 흘러나오고 난 변태처럼 히죽거린다. 김연경 선수나 조재진 선수도 시합 중에 욕설로 유명해지지 않았나. 사실 욕설은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하다. 거리는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일곱 살배기 유치원생마저 “씨발, 어쩌라고!”라는 말로 부모를 놀라게 하는가 하면, 온라인 공간은 욕의 향연장이라도 되는 듯 매일 같이 참신한 욕설이 터져 나온다. 다들 살기가 퍽퍽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니 말로 푸는 거겠지. 실제 욕설은 신체 고통을 경감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힙합의 비속어 가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힙합은 오해와 달리 이별에도 효력을 발휘했다. 내가 장밋빛 두근거림을 갖고 밝게만 살 때도 힙합을 들었지만, 느닷없이 혼자가 됐을 때도 어김없이 힙합이었다. 나를 지켜준 건 내면의 힘도 아니고, 제임스 조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적었던 "다가오라, 삶이여"와 같은 멋들어진 문장도 아니었다. 어딘가에 여자들과 자빠져서 금목걸이를 차고 시건방진 표정으로 랩을 하는 래퍼들의 도움이 컸다. 손에 든 책이 무색할 만큼 상스럽고 천박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유로웠던 그들이 나를 돌려세웠다.


 긴 세월 혼자 살면서 힙합이 없었다면 꽤 섭섭했을 것이다. 여태껏 힙합 음악에 관해 단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내 뇌를 차지하는 지분을 가지고 주주총회를 열었다면 힙합은 세 번째 상석에 앉아서 거만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을 것 같다. 불량해 보이는 그 친구에게 여태 감사의 말을 전하지 못했다. 힙합이 없었다면 나는 내 깜냥에 맞지 않는 흉측한 옷을 입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힙합이 없었다면 점잖은 일만 골라하는 샌님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뭐든 이치에 닿지 않는 짓은 삼가고, 꼴사납고 경솔하고 분별없고 때론 눈살이 찌푸려지는 문장을 용기 내 적진 못했으리라. 힙합이 없었다면 난 오래전부터 관능적인 관계는 포기하고 교양 있고 명예로운 사람 뒤꽁무니나 쫓으며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을 탕진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딱딱한 잔소리나 해대는 지루한 어른이 되었을지도. 나는 힙합 덕분에 도덕적 감화를 물리치는 대신에 온갖 애정 행각을 위해 뼈를 깎는 변신을 기꺼이 감수했던 제우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때 순위표에도 올라가기 어려웠던 국힙은 이제 오버그라운드에서 당당히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힙합은 <쇼미더머니>가 모든 것일 수 있다. 누군가에겐 아이돌의 랩이 힙합일 수도 있겠다. 그도 물론 모두 힙합이다. 매주 홍대 클럽에서 푸처 핸섭을 하고, '힙합플레이야'를 구독해야 진정한 리스너가 되는 건 아닐 것이다. 난 그냥 힙합이라는 삶의 태도가 좋다. 내게 힙합은 현실의 반영이다. 과거의 자책이 악착스럽게 따라붙고, 미래를 향한 걱정이 갈수록 날 옥죄어 올 때 비트를 켠다. 헬스장은 고독해서 비트가 뛰놀기 좋은 공간이다. 세트를 늘려갈 때마다 힙합곡을 고르면서 기운을 찾는다. 래퍼들은 천편일률적인 삶의 틈바구니에서 엉뚱한 짓을 일삼고도 꽤 멋지게 살 수 있음을 알려줬다. 현재의 폭을 잔뜩 넓혀놓고 가당찮은 불안일랑 들어오지 못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난 거만한 표정으로 비트에 맞춰 발을 구른다. 알게 모르게 권위적으로 구는 치들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쭈욱 비트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사진 출처: 영화 8 mile 스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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