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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6. 2023

재즈와 춤과 스포츠의 일상

ᅠ요즘 지하철에 타면 뉴스 대신 눈을 감고 재즈를 듣는다. 존 콜트레인의 연주에 집중하면 세상이 온통 재즈로 물든다. 슬며시 눈을 뜨고 휘청이는 사람들을 보면 꼭 재즈 선율에 스텝을 밟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리의 몸짓은 재즈 즉흥 연주처럼, 박자를 임의대로 만들어갔다. 실로 재즈다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앞뒤 재지 않고 흔들리는 승객들을 재즈로 둔갑시킨 건 삶을 조금이나마 낙관하려는 노력이다. 명백한 오해지만, 뭐 갈 때 가더라도 재즈 한 곡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다. 빽빽한 하루에 이 정도 틈 하나 벌리지 못한다면 숨이 턱 하고 막힐 것이다. 이러니 누군가 재즈에 관해 묻는다면 난 먼저 붐비는 지하철을 떠올릴 것이다. 흔들흔들 비틀비틀 끄덕끄덕. 힘겨워 보이지만 오늘 밤에는 재즈다운 순간을 맞이할 거라는 기대감이 배어난다. 신도림역, 문이 열리고 한바탕 춤을 추고 난 그들은 기분이 째지는지 경쾌한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간다. 재즈는 그치지 않는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람과 부대끼는 밀폐 공간은 여름방학 때 놀이동산을 방불케 한다. 말 그대로 지옥이다. 다들 이 지옥을 벗어나려고 일을 하는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어떻게든 지옥마저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쪽이다. 재즈를 상상하는 것도 그런 시도다. 다른 방법으로는 독서가 있다. 책 속에는 상상에나 나올법한, 상상만 해도 즐거운, 상상과 달리 비참한, 상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심심한 그런 이야기가 있다. 어쨌거나 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이 주어진 셈이다. 서울대입구역까지 가야 하는 난 가방에 있는 책 한 권을 떠올렸다. 맞은편 좌석에ᅠ흰색 후드 티셔츠를 입은 학생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와중에도ᅠ책을ᅠ읽고 있었다. 난ᅠ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그루브를 타듯 몸을ᅠ살짝ᅠ앞으로 구부렸다. 티가ᅠ나지ᅠ않게ᅠ슬쩍 표지를 봤다. 제목은 익숙한데 작가ᅠ이름이ᅠ통 낯설었다. 감성 에세이인가. 그는ᅠ몸이ᅠ흔들림에도ᅠ미간을ᅠ살짝ᅠ찌푸리면서ᅠ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한 남자가 몸으로 책을 툭 치고 지나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에ᅠ빠져ᅠ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런의ᅠ'인셉션'에라도ᅠ들어간ᅠ사람처럼ᅠ그에게ᅠ실제는ᅠ없고ᅠ오직ᅠ픽션만ᅠ있는ᅠ모양이었다. 어떤 이야기일까. 나도 급히 독서가 끌렸다.


 나는 이상하게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호감이 간다. 책을 읽지 않으려는 세상에서 그 재미있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제쳐두고 독서하는 그들과 느슨한 유대감을 느낀다. 가방에서 힘겹게 책을 꺼내 폈다. 어제 등 운동을 과하게 해서인지 등 허리께가 뻐근했다. 어제 운동을 함께한 원도는 내 자세 지적에 머리를 굴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선배 너무 빡빡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오늘 일도 빡셌잖아요.’ 너무 맞는 말이어서 살짝 당황한 나를 구해준 건 경찬이였다. “선배 전 빡세게 할래요. 헬스는 정신력이죠.” 나도 맞장구를 쳤다. “난 평생 독서에 재미를 못 붙였는데 그냥 독서하는 내 모습이 좋아서 죽어라 읽었더니 취미가 돼 있더라고. 헬스도 마찬가지 같아. 좀 힘들어도 그냥 생각 없이 열심히 하다 보면 점차 몸이 좋아지고 재밌어져.” 선배답게 멋진 말을 하려던 거였는데, 실은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잔소리하고 보니 뱉은 말이 있어서인지 무리하게 들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나도 참 한심하지. 그렇게 말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원도에게 적당히 살살하라고 말해줄 걸 그랬다. 삶은 운동 말고도 힘든 게 훨씬 더 많으니까. 운동마저 골치를 썩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적당한 게 좋다 적당히.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책을 펴고 독서를 시작했다. 몇 자 읽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시름시름 앓는 소리가 나왔다. 등이 뻐근해지면서 노곤한 하품을 제지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적당히가 안 됐다. 픽션보다는 재즈에 어울리는 날이었다. 이어폰 볼륨을 높이고 독서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자연스럽게 적당히 적당히.'


 나는 집이 좁다 보니 서재가 없다. 세상에 서재라니. 내 나이대에 서재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어렸을 때는 내 나이쯤 되면 서재가 있는 집에 살 줄 알았다. 집은 그저 숙식 공간이다. 책은 보통 식탁 겸용 책상이나 잠들기 전 침대에서 읽지만, 오직 독서만을 위한 공간은 없다. 어쩔 수 없이 책을 보관하는 공간은 마련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이 쌓이면 독서할 공간을 빼앗긴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운동은 어디서든 할 수 있지만 집이 좁으면 원하는 동작을 취할 수 없다. 바벨을 어디에다 둘 것인가. 헬스장이라는 공간이 중요한 이유다. 내게 지하철은 전적으로 독서 공간이다. 어디론가 실려 갈 수밖에 없는 도시 직장인에게 대중교통에서 갖는 자투리 시간은 뭘 읽기에 적합하다. 귀에서 울리는 재즈 연주도 결국 독서에 재미를 더하기 위한 소음 차단용이다. 비트에 맞춰 한 단어씩 집어먹는 재즈로 말하면 인티그레이션이다. 이제 몇 정거장 남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무거웠지만 독서 모임에 제출할 발제문 작성에 마음이 급해졌다. 근데 독서에 열중하려 하면 할수록 오늘 김 부장이 열을 내며 내게 뱉은 말, 올 초와는 달라져 버린 그 거친 성미가 빚어낸 모욕이 책 내용과 뒤섞였다. 단어 사이마다 파인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한 장 넘기지 못하고 고개를 젖힌 채 재즈에 집중했다. 빌 에번스에서 쳇 베이커를 거쳐 데이브 브루벡으로 갈아타고 집에 도착했다.


 집에 들어오니 베개와 침대 시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제 엎지르고 미처 닦지 못한 우유가 남아메리카 대륙 모양으로 얼룩이 져 있었다. 정돈하지 않는 삶이란 이토록 적나라하고 더러운 것이다. 이런 꼴로 살면 내가 속속들이 관리하는 일상도, 한때 생기 넘치고 단단했던 근력도, 쉬지 않고 읽어댔던 걸작 소설도 다 보잘것없는 트리비아에 불과하다. 우선 물티슈로 바닥부터 닦고 옷가지를 수납함에 처넣기 시작했다.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틀고 밀린 설거지부터 끝냈다. 중계 캐스터의 실감 나는 목소리로 삼성 강민호가 친공이 외야로 날아가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다. '자 타구가 우측 담장을 때립니다. 강민호 선수가 1루를 지나 2루까지 여유 있게 올라섭니다.' 공은 유려한 구도로 펜스에 처박혔다. 야구는 인생과 비슷한 착점이 있다. 뜬 공을 받으려는 외야수의 위태로운 자맥질엔 삶의 버둥거림이 보인다. 얼떨결에 뿜어져 나오는 거친 숨결과 손을 턱에 괴고 수 싸움을 하는 진지함이 공존한다. 내야안타를 날리고 전력 질주한 후 아웃되는 양준혁처럼, 정력적인 스포츠인은 마치 모든 의미가 순간에 있다는 듯 온 힘을 다하지만, 어느 순간 '어어 이건 뭐지' 하다가 어이없이 경기는 끝이 난다. 오죽하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이 야구 외야석에서 2루타를 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라고 했을까. 어쩐지 야구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휴머니즘이 있다.


 캐스터는 요즘 연패를 거듭하는 삼성 구단을 성토했다. 홈런 타자 출신 해설자도 질세라 거들었다. '1번부터 9번까지 잘 치는 타자가 하나 없어요. 프로 맞습니까. 그리고 투수는 발전이 없어요. 언제까지 리빌딩 타령 할랍니까. 리빌딩이 아니라 그냥 야구 안 하겠다는 거 아닌가요. 제가 야구할 땐 지면 밤늦게까지 남아서 특타 연습이라도 했어요. 야구를 장난으로 하면 안 됩니다. 프로 아닙니까.' 어째 우리 부장님 잔소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섬뜩했다. 지난 세대는 언제나 요즘 애들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난 어려서부터 유독 야구를 좋아했다. 9살 때부터 내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문 스포츠면 읽기였다. 내가 가장 애틋하게 간직한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 일인데, 친구 주호랑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나란히 앉아서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라디오 야구 중계를 들었던 일이다. 삼성과 두산 경기였는데, 양준혁이 9회에 3점 홈런을 날려서 경기를 끝내는 순간, 우리 둘은 어쩔 줄 모르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기사 아저씨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들갑을 떨다가 부셔 먹던 신라면 한 봉지를 바닥에 다 흘렀다.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고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다. 당시에도 우리는 야구장에 있지도 않았고, 텔레비전으로 타구를 본 것도 아니었지만 양준혁이 친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가는 광경을 완벽하게 상상했다. 수비를 하는 외야수의 볼품없는 움직임과는 별개로 공은 그 나름의 유려함이 있어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마 그때 난 평생 야구를 보고 사리라 생각했다. 난 운동 신경이 둔한 아이였지만, 이때부터 스포츠를 사랑했다. 내가 근력 운동에 집착하는 것도 야구 선수들의 강인한 육체에 관한, 정확하게 말하면 두꺼운 허벅지와 팔뚝에 대한 로망을 가져서다. 지금은 일하느라 밤에는 글 쓰느라 자기 전에는 바닥을 닦느라 요통에 시달리지만, 라디오로 듣는 야구 중계는 언제나 내 스포츠맨십을 자극한다. 더러워진 물티슈를 잔뜩 뭉쳐서 쓰레기통에 임창용 선수의 뱀 직구로 꽂아버렸다.


ᅠ저녁 9시, 다시 글을 쓸 시간이 왔다. 잠들기 전에 출판사로 보내야 할 원고를 볼 생각이다. 노트북으로 '롱아일랜드재즈 밴드'의 곡인 <Shall We Dance?>를 틀었다. 포근한 해변을 연상케 하는 사랑 노래다. '그래 사랑이란 물어봐 주는 거지.' 춤을 추시겠냐고 묻는 건 함께하고 싶다는 동의어가 분명하다. 그건 비단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경우는 아닐 것이다. 가령 이 곡을 들으면서 떠올렸던 영화 중에 <쉘 위 댄스>가 있다. 매일 격무에 시달리던 중년 남자는 그날도 밤늦게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 문에 몸을 기대어 잠시 졸던 남자는 창문으로 역 근처 건물에서 한 댄서가 춤을 추는 모습을 목격한다. 허름한 건물에서 세상 모든 의미심장함을 모조리 흡수한 얼굴로 춤을 추는 댄서들이 그의 눈에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서류 가방을 가슴에 움켜쥐고 댄서의 춤을 응시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자기 삶이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고 느낀다. 불현듯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의구심이 들 때가 있지 않나. 이튿날 그는 무작정 댄스 강습소를 찾아간다. 그렇다고 그가 춤바람이 들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무실 꼰대들에게 한 방 먹이는 장면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건 고작 퇴근 후에 조금이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었을 뿐이니까. 그에게도 야구장 외야처럼 한적한 사색의 공간이 필요했다.


ᅠ헬스를 시작하면서 춤과 멀어졌다. 어릴 적엔 나이트클럽도 종종 가고 그랬는데, 지금은 큰 근육이 붙으면서 몸이 둔해졌다. 처음 책을 출간했을 때 한 출판 기념회에서 진행자가 사전에 약속도 없이 음악을 틀고 춤을 춰달라고 했는데 도통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날도 헬스하고 갔는데, 춤을 추려니 스쿼트 동작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스쿼트 동작으로 그 자리를 모면했다. 다들 빵 터졌지만 나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고작 스쿼트 동작이라니. 서른 이후부터 내가 논 곳이라고는 헬스클럽이나 기껏해야 독서클럽이니 이 모양이다. 가끔 유튜브에서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셀럽을 보면 한껏 부러워한다. 헬스를 안 했다고 해서 춤을 잘 춘 건 아니었지만 두꺼운 몸은 선이 예쁠 수가 없다. 큰 덩어리를 붙이고 뒤뚱거리는 꼴은 견뎌내기 어렵다. 황철순 선수처럼 기가 막히게 추면 또 모를까. 내가 기억하는 가장 근사한 춤은 김연아가 하차투랸의 왈츠곡에 맞춰 연기를 선보일 때다. 리듬을 타고 노는 그 날렵한 몸짓을 넋 놓고 바라봤다. 내가 다다르지 못할 부드러운 곡선의 세계였다. 난 근력 운동에 치중하면서 스트레칭과 같은 유연성 운동은 등한시했다. 힘겹게 다리 정도는 찢지만, 준비운동 정도로 치부하니 점점 몸이 굳어가는 걸 막기 어려웠다. 마음은 김연아인데 몸은 뻣뻣하기만 하다. 그래서 야구만큼 춤 영상을 보는 게 좋다. 발을 구르고 턱을 옆으로 흔들면서 리듬감을 찾아가는 그들에게서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를 본다. 야구장에 날아가는 우아한 곡선과 춤 선이 만들어내는 예술의 움직임은 상통하는 바가 있다.


ᅠ잠들 무렵 아무 글도 쓰지 못해서 베갯잇에 머리를 뉘면서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등이 쿡쿡 쑤시는 게 아무래도 단단히 뭉친 모양이었다. 나지막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연인의 뜨거운 몸을 잊고, 그냥 버티듯이 하루를 흘려보내는 게 아쉬웠다. 삶에 브금이 안 깔려서 이렇게 퍽퍽한가 싶어 퇴근길에 듣던 빌 에번스의 곡을 다시 켰다. 뉴욕의 어느 재즈바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기분에 심취하면서 이곳이 비좁은 내 방이 아니라 블루 노트 재즈 클럽이라고 상상했다. 연주에 몰두한 트럼페터를 바라보며 바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였다. 바깥바람의 뭉근한 기운에 몸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는 빌 에번스의 삐쩍 마른 몸을 감상했다. 백열전구 다마에 시선이 흐릿해지며 거물거물 춤을 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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