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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3. 2023

삼시 세끼 다 행복하다

Ver. 2.0

 난 어려서부터 식욕이 극심해 입 짧은 친구를 부러워했다. 고기반찬을 돌같이 보는 절제력과 제때 끊어낼 줄 아는 깔끔함을 우러렀다. 같이 일했던 직장 후배 녀석이 딱 그랬다. 몇 숟가락 먹지도 않았는데 바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난 아직 먹고 있는데 너무한 거 아냐.' 원망 어린 눈으로 후배를 쳐다보면 녀석은 살짝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선배 죄송해요. 제가 입이 짧아서.' 난 파르르 떨리는 눈을 껌뻑거리며 녀석에게 가보라고 손짓했다. 비인간적인 놈. 내 배는 아직도 성이 나서 김치찌개에 남은 밥을 비벼 먹으려는 참인데 녀석은 커피를 사 오겠다며 유유히 걸어 나갔다. 나는 왜 배부르기 전에 입을 닦지 못할까. 그러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 캐릭터 중에 입 짧은 자가 많았다. 무언가에 생각하느라 뜨끈한 파스타를 외면한다든지, 대화에 여념이 없어 방금 나온 쌀국수는 안중에도 없이 심각하게 떠드는 경우다. 가령 영화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미카엘(대니얼 크레이그)은 좌파 성향 기자로 늘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데 곤두서 있다. 늘 신문사 앞 카페에서 뭔가를 적는 미카엘은 담배만 연신 피우며 생각에 잠겨있다. 그에게 접시에 놓인 샌드위치는 장식에 불과하다. 자리에서 계속 담배를 피우겠다는 의사 표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다 문득 미카엘은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보도를 보고 급히 자리를 뜬다. 3분이면 다 먹을 수 있는 조막만 한 샌드위치는 그렇게 버려진다. '배가 좀 불러야 두뇌 회전도 되는 거지 이 양반아.' 그는 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택시에 올라탄다. 일엔 전문적이고 식도락엔 무심한 공복의 신사 미카엘은 도시의 차가운 남자답게 볼살이 홀쭉하다.


 이런 장면도 좋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도망자>(The Fugitive, 1993)에서 리처드 킴블(해리슨 포드)은 경찰의 눈을 피해 도주하던 중 나무에 베어 상처를 입는다. 그는 자기 복부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한 시골병원에 잠입한다. 전문의답게 아무 병실에나 들어가서 스스로 몸을 꿰매고 진통제를 투여한다. 그러다 문득 병실 한구석에 놓인 샌드위치를 발견하고 집어 든다. 오랜 도피 생활에 지쳤으니 금세 먹어 치울 듯 보였지만 킴블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먹고는 그냥 나가버린다. 가까스로 경비 눈을 피해 다시 산속으로 사라진 남자. 아니 샌드위치를 남겨두고 산으로 기어들어 갈 생각이 들까.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 전개 아닌가. 난 혀를 차며 그의 절제력에 탄복했다. 나라면 옆에 따라둔 우유까지 다 마셨을 텐데. 어쩌면 병문안을 왔다가 두고 간 델몬트 오렌지 주스라도 찾아 마셨을지 모른다. 결국 나와는 달리 리처드 킴블 박사에게 샌드위치는 남은 도주 생활을 위한 탄수화물 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난 워낙 먹는 걸 즐기다 보니 불행하기가 어렵다. 하루 세 번 끼니마다 신이 난다. 나 자신을 비관주의자라 생각하면서도 구내식당에만 들어서만 입꼬리가 비죽 올라간다. 우울하고 예민해지고 싶어도 빈번한 폭식에 낙관이 절로 깃든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을 볼 때 무언가에 열중하느라 끼니를 거르는 캐릭터가 등장하면 괜스레 호감이 간다. 나는 상상할 수 없는 허기진 그들이 사랑스럽다.


 입 짧은 이를 흠모하는 마음 이면에는 만성적인 다이어트가 있다. 어려서 여자애를 훔쳐봐 온 이래 항상 체중조절에 시달리다 보니 식욕을 검약하게 통제할 줄 아는 게 그렇게 멋져 보였다. 저녁에 운동을 빼먹지 않는 것도 헬스장에서 낑낑거리다가 나와서 밥숟갈을 들면 죄책감이 덜해서 그렇다. 운동을 격하게 한 날에는 열량과 단백질 함유량을 의식하지 않고 튀김만두를 두 개씩 입속에 밀어 넣으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난 언제쯤, 이 지겨운 승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고등학교 땐 라면 네 개를 혼자 끓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특별히 시간을 내서 운동하지 않아도 늘 몸이 뜨거웠다. 그러다 보니 항시 허기가 져서 더 열심히 먹었다. 아침에 미역국에 밥 말아먹고, 점심엔 급식으로 무한 리필 동그랑땡을 계속 집어먹고, 쉬는 시간이 되면 매점에서 햄버거와 라면을 사서 먹었다. 저녁엔 떡볶이를 먹고 들어가도 어머니가 챙겨주신 찌개가 그렇게 맛있었다. 난 스트레스 없이 뭐든 먹어 치우던 그때를 그리워한다. 좋아하는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고, 몸에 나쁘다는 것만 골라 먹어도 그럭저럭 굴러가던 시간이었다.


 맘 놓고 먹는 행복과 점점 더 멀어지는 게 내게는 어른이다. 정확하게는 나이 듦의 슬픔이다. 나는 먹을 때마다 열량을 의식하고, 단백질량을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애를 쓴다. 입 짧은 도시 남자를 흉내 내기 위해서 커피는 오직 쓴 커피만 마시지만, 카페를 나설 때마다 내 몸을 공중에 띄울 정도로 달콤한 티라미수 케이크가 눈에 밟힌다. 간헐적 단식이다 뭐다 해서 공복 시간을 늘려보려고 애는 쓰지만 쓰린 속을 달래지 못해서 기어이 사무실 탁자에 놓인 쿠크다스를 까먹고 산다. 수많은 다이어트를 시도해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은 체중 감량에 성공하려면 어딘가에 집중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화 <밀레니엄>의 미카엘은 취재에 집중했고, <도망자>의 킴블 박사는 누명을 벗는 데 집중했다. 절친한 친구도 군대 영장을 받고 리니지 레벨업에 집중하면서 징용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어쩌면 난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배가 고픈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에도 독서에도 글쓰기에도 운동에도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니 허기가 한시도 날 가만히 두질 않는다.


 내가 아는 또 다른 입 짧은 캐릭터 중에 베테랑 경찰도 있다. 영화 <도희야>의 주인공인 영남(배두나)은 레즈비언인데 조직이 그걸 문제시하면서 지방에 좌천된다. 자세한 얘기는 나오지 않지만, 아무래도 영남은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비극적으로 헤어진 모양이다. 영남은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소주에 의지하는데 특이하게도 생수병에 술을 담아 마신다. 작은 마을의 파출소장이라는 영남의 신분과 시골이라는 폐쇄적인 감시 구조를 우려한 고육지책이다. 신기한 건 영남은 소주는 잘 마시면서 수저는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밥이야 먹겠지만 영남의 빼빼 마른 몸을 보면 쓰러지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다. 영남은 작은 아파트 주방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단추 두 개만 푼 채 차가운 소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정적만이 흐르는 시골 밤을 리드미컬한 목 넘김 소리로 깨어낸다. 통 식욕이 없는 영남이 아픔을 잊는 방식이다. 술은 혹독한 밤을 지탱하는 진통제이자 수면제다. 어디 그뿐인가. 술은 아픈 상처를 소독하니 후시딘이고, 안주가 없어도 술술 들어가니 다이어트 식단이 따로 없다.


 나도 한때 무식하게 술을 마셔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쓴 소주를 영남처럼 벌컥벌컥 들이켰다. 누가 볼 새라 방에서 마시고, 친구를 만나면 또 진탕 퍼부었다. 몸이 더 이상의 알코올은 위험하다고 몸이 신호를 보낼 때까지 퍼부어댔다. 당시 나 역시도 마음고생이라는 최고의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 마음은 아팠지만, 몸무게가 쭉쭉 빠지니 이별에도 좋은 점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알코올은 나를 닦아주고 소독하고 데워줬다. 당연하게도 얼굴은 흙색으로 변해갔고 백옥 같던 피부는 푸석푸석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모든 게 괜찮아질 무렵 다시 가스레인지에 라면 물을 올리는 나를 발견했다. 붉은 신라면이 보글보글 끓자 몸에 피가 돌고 침이 고이면서 눈도 맑아졌다. 난 생각했다. 아, 이제 다시 삼시 세끼가 시작되는구나. 하루 세 번 행복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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