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 2.0
ᅠ 오늘은 출장을 다녀와서 일찍 퇴근했다. 몸이 피곤해서 헬스장도 거르고 침대에 누웠다. 옷도 벗지 않고 씻지도 않은 채 뻗어버렸다. 고작 몇 시간 열차를 탄 것뿐인데 뭐가 이리 피곤한지. 나이가 들면 행동반경이 줄어든다고 하던데 이제 당일로 다녀오는 여정도 예전과 달리 힘에 부친다. 헬스를 다녀오지 않았으니 저녁은 가볍게 먹기로 했다. 헬스장을 거르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왠지 모르게 내 몸에 부채감이 생겨난다.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든 것처럼 내일 메꿔야 하니까. 좀 더 지체하면 연체 이자도 붙어버리니까.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그냥 가면 되는데 헬스는 체육관에 들어가기까지가 가장 어려운 운동이기도 하다.
뭘 먹어야 하나. 냉동실을 보니 마니커 닭가슴살과 참치통조림 따위만 잔뜩 있었다. 늘 먹던 닭 냄새가 지긋지긋해서 장을 보러 가기로 했다. 섬유질이 가득한 야채를 씹고 싶었다. 요즘 장을 볼 때 고기는 줄이고 대신 두부와 버섯을 바구니에 담는다. 고기로 편중된 식습관을 개선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건 몇 달 전에 냉장고를 열었더니 순 소 닭 돼지뿐이어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냉동고를 열어봐도 대패삼겹살이 가득했다. 여기가 정육점이야. 내가 도축업자야. 도대체 한 달에 몇 마리나 죽이면서 사는 걸까. 모든 살생을 거부하며 세균마저 죽이는 게 두려워서 목욕도 하지 않았던 자이나교도가 날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식물의 뿌리까지 뽑는 것도 학대라고 생각해서 뿌리채소도 먹지 않는다던 그들은 날 위해서 기도해 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스스로가 되게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보고 나왔을 때도 저녁에 삼겹살을 구워 먹은 사람 아닌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육포를 씹으면서 읽던 작자란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야 조금이라도 고기를 덜 먹어야겠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왜인지 생각해 보니 익히 들리는 바가 있어서였다.
ᅠ 최근에 채식주의자를 지향하는 분과 채식주의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그는 동물을 좀 덜 먹어보려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에게 주워들은 게 좀 있다. 채식주의와 비건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부터 물었다. 동물권은 인권과 비슷한 철학적인 개념이고, 나 같이 육식을 즐기는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건 동물 복지라는 걸 이해했다. 목에 칼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고기를 끊겠다고는 얘기하지 못하는 내가 조금이나마 죄의식을 떨치고 싶다면 우선 동물이 생을 잘 보내야 한다. 사람 살기도 어려운데 동물 복지에 신경 쓴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도 얼마나 많은지. 라면 상자 크기도 되지 않는 케이지에 갇힌 닭과 오물을 그대로 방치한 우리에 사는 돼지, 잔인한 소 도축 과정은 보도로 봐서 모두 알고 있지만 그걸 신경 쓰면서 고기를 사 먹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도 이해했다. 윤리적인 소비는 곧 동물 복지의 첫걸음이라는 불편한 진실도 애써 수긍했다. 조금 더 돈을 투자해서 좋은 환경에서 자란 고기와 달걀을 먹는 것도 동물 복지의 일환이다. 결국 상상의 문제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 동물들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내키지 않음에도 한 번 더 떠올려 보는 거다.
ᅠ 채식주의는 내 생각에 동물권 논의에 속한다. 궁극적으로 동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목적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동물을 위하는 마음만으로 이뤄진 윤리가 아니다. 동물을 많이 도축하면 지구 온난화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온실가스와 이산화탄소 배출의 상당량이 고기를 가공하고 조리할 때 생기니까.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는 지금도 큰 비용을 지출하지만, 저녁 식사 메뉴만 잘 고려해도 지구를 꽤 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지인과 이런 건설적인 얘기를 나눴는데 난 그날 닭가슴살 샐러드로 저녁을 먹었다. 닭가슴살이 주식인 내게 채식주의는 동물 복지와 다르게 불편한 말로 들리는 게 사실이었다. 평생 닭가슴살을 예찬했는데 그게 어느 생명체의 가슴에서 도려낸 살이라는 걸 인지한 적은 없다. 그걸 누군가의 가슴으로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었을 텐데 난 떡하니 가슴살이라고 말해놓고도 그걸 고단백질 영양소라는 기호 제품으로 인식했다.
소설 <채식주의자>로 한국 최초의 맨부터 인터내셔널 수상자가 된 한강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그는 냄새도 아니고 맛도 아닌 보는 일이 힘겹다고 했다. 그건 분명히 고기를 먹을 때 눈을 감고 상상을 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입장을 떠올린 것이다. 저 말에는 고통을 생각할 줄 아는 작가의 감수성이 엿보이지만, 내겐 삶의 섬세함을 잊지 않으려는 태도로 보였다. 갑자기 주마등처럼 그간 별 생각도 없이 닭가슴살을 먹는다고, 돼지고기는 지방이 적은 후지살을 먹는 게 좋다고 외쳐댔던 나의 민망한 글들이 떠올랐다. 예민함과는 하등 거리가 먼 나로서는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관해 계속 묻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고난도의 감수성까지 마스터한 선배 작가들이 즐비하다.
ᅠ오늘 뉴스에서는 황새 무리가 화성 습지에 모여있는 영상이 보도됐다. 황새는 환경에 민감해서 무리 지어 다니지 않기에 이색적인 모습이라고 했다. 황새는 적당한 곳을 찾아서 자주 이동하고, 혼자서 우아하게 걸어 다니며 노는 독신자다. 왠지 나랑 사는 게 비슷해서 반가웠다. 식탐도 별로 없어서 물고기 한 마리 정도만 먹고도 그칠 정도로 입이 짧다고 한다. 이건 나랑 확 달랐다. 그런데 지난겨울 황새 스무 마리가 함께 모여 겨울을 나는 모습이 포착됐다. 정부 집합 금지 조치가 길어져서 황새가 뉴스에 실렸나 했더니 황새 무리는 이상 기후로 인한 이상 현상이라고 한다. 이번 겨울철 기록적인 폭설과 흔치 않은 한파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이상 징후로 봐야 한다는 게 기상 전문가의 해설이었다. 하긴, 올겨울이 좀 춥긴 했지. 2월까지 눈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매서웠으니까. 뉴스 영상으로 보니 경기도 외곽 습지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에 나올법한 잿빛 디스토피아처럼 보였다.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잘 나가지도 못하는데 다 얼어버리라고 무책임한 저주를 퍼부었는데, 막상 옹기종기 붙어서 겁에 질린 황새 무리를 보니 그런 철없는 생각이 싹 가셨다. 황새가 더 따듯한 곳으로 떠나기로 마음먹고 우리를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불안했다. 느닷없이 센트럴 파크의 오리들이 추운 겨울에 다 어디로 가는지 택시 기사에게 따져 묻던 '홀든 콜필드'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될 수는 없어도 황새를 위해 이런 글은 쓸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두루미랑 황새는 어떻게 구분하지.
ᅠ 내가 앞서 굳이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분을 만났다고 적은 건 그분의 표현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난 그의 당당한 태도에 큰 인상을 받았다. 아직은 엉성한 채식주의자여도 괜찮다는, 조금 더 노력해서 완전해지겠다는 의지가 멋있었다. 채식주의자를 입에 올리는 순간 고기를 한 입만 입에 대도 부끄러워지고, 언제 어디서 식단으로 지적당할지 몰라서 불안해하는 상황은 부적절하다. 오히려 부족함을 드러내고 동기부여를 중요시하며 자신의 채식주의를 접목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이토록 바쁘고 고된 일상에서 완벽한 뭔가가 된다는 건 얼마나 숨 막히는 일인가.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거나 유난을 떨기보다는 SNS에 사진과 글로 올리면서 본인 생각을 드러내는 세련된 지성이 요즘 우리 시대가 추구하는 채식주의가 아닌가 생각했다. 야채를 먹으면서 웰빙을 추구함과 더불어 추운 습지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는 불쌍한 황새 무리를 위한다는 다정함에 더 눈길이 갔다.
ᅠ 이렇게 채식주의라는 용어에 부담감이 줄어든 이유로는 아무래도 셀럽의 영향이 커 보인다. 예를 들면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보고 나탈리 포트먼이 고기를 끊은 건 유명한 일화다. 국내에도 이효리를 비롯한 여러 스타가 채식주의자라는 인식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제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도 쉽게 #채식주의 #비건과 같은 문구를 쉽게 볼 수 있다. 해시태그로 붙여진 #표시가 세상을 더 낫게 하는 데 일조하는 별과 같은 마음처럼 느껴진다.
ᅠ 몇 년 전만 해도 육식에 대한 논의보다는 개고기 식용 반대에만 모든 쟁점이 맞춰져 있었다. 채식을 지향하는 능동적인 용어가 아니라, 먹지 말라고 악을 쓰면 기어코 더 보란 듯이 먹어대는 다툼에 가까웠다. 나를 규정하는 게 아닌, 상대를 비난하며 세상을 바꿔내려는 말이 잘 들릴 리 없었다. 비난받으면 되갚아 주려는 게 인지상정이다. 더군다나 동물에 반려라는 칭호가 붙여지면서 동물을 먹는 것에도 묘한 불편함이 생겨나면서 반대급부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강아지와 고양이에게 주는 사랑만큼 오직 식용으로만 길러지는 동물 복지를 걱정하는 시선도 느껴진다. 매끈한 생산공정에 숨겨진 축산업의 폐단을 모른 척하고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위선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ᅠ최근에는 한 달에 열흘이라도 고기를 안 먹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물론 근육은 닭가슴살과 돼지고기, 소고기, 달걀, 틸라피아가 주된 섭취원이지만 두부나 버섯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걸 놓치지 않는다. 아예 안 먹고살긴 어려우니 양이라도 줄여보려는 심산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식물 단백질 섭취가 몸에 이로움을 잘 알고 있다. 알려졌다시피 붉은 육류를 다량 섭취하면 심장 질환 발병과 조기 사망 위험이 증가하니까. 어디 그뿐인가 붉은 육류 섭취는 암으로 인한 사망률도 확 올려놓는다. 비싼 암보험료를 내기보다는 그냥 고기를 줄이는 게 더 이득이다. 그래도 주말에 친구들과 화로 앞에 모여 고기를 구워 먹는 기쁨을 놓치고 살긴 어렵다. 고기를 끊은 지 한 주가 채 지나지 않아 육즙이 흐르는 항정살과 부드러운 스팸이 다시 냉장고를 채웠다. 한 번 어기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덜 먹으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구내식당에 나오는 제육볶음을 넘치게 담았고, 연일 치킨과 족발을 배달해 먹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 아버지의 금연 결심처럼 수사만 화려해졌다.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초콜릿을 끊지 못해서 재기에 실패했듯이 나 역시 고기 때문에 뱃살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올해만큼은 초콜릿 복근을 되찾겠다는 굳은 결의가 무너져버렸다.
ᅠ 난 강박적으로 고기를 찾는 사람이다. 고기반찬이 없으면 금세 배가 고파진다는 착각 속에 살았다. 풀때기만 먹어선 포만감이 잘 오지 않는다는 편견도 있다. 밀가루를 자주 먹는 식습관을 바꾸기 위해서 대체 식품으로 고기 단백질을 섭취했으니 몸에 좋다고 믿어버렸다. 운동할 때 야채만 먹어서는 힘이 잘 나지 않는다는 속설도 믿고 살았다. 이러니 나는 집에만 오면 고대 로마 상류층이 맛있는 음식을 계속 먹으려고 속을 게워 냈던 '보미토리움'에 온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입으로 음식을 뱉어내지도 않았는데 늘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비슷한 강박으로 난 정서가 불안하고 알 수 없는 결핍감이 들면 고기를 찾았다. 마치 전설적인 재즈 트럼페터 쳇 베이커가 평생 마약을 끊지 못한 이유와 비슷하다. 쳇 베이커는 마약을 한 이유에 관해 무대공포증을 꼽았다. 연주가 조금만 어긋나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 것 같은 기자와 동료 음악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약물 복용을 변명했다. 하지만 쳇 베이커의 전기를 다 읽고 나면 사실은 쳇 베이커는 마약을 하기 위해서 공연을 한쪽에 가까웠다. 나도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허 때문에 고기를 찾는 게 아니라, 실은 그냥 고기가 맛있어서 여러 이유를 갖다 붙였을 뿐이었다. 헬스 한다는 핑계로 고기에 집착했다. 가타부타 말이 많았지만, 요즘처럼 풍요롭게 다양한 식품을 섭취하는 세상에서 식물 단백질의 질을 따진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잘 알면서도 그냥 난 고기가 좋아서 먹어온 것이다. 최근에는 비건 보디빌더가 제 식단을 공유하며 채식주의에 관한 편견을 깨고 있다. 그들의 우람한 팔뚝을 보고는 염치가 없어서 고기 없이는 운동을 못하겠다는 말을 꺼낼 순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NBA를 비롯한 일부 엘리트 운동선수가 채식을 통해 운동 능력을 높였다는 연구가 계속 나오고 있다.
ᅠ 확실히 채식은 번거롭고 어려우며 무엇보다 비싸다. 채식은 어쩔 수 없이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하게 되어있고, 식물에서 단백질을 섭취하려면 최근 들어 더 비싸진 야채와 과일을 다량 섭취해야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쁘기로 유명한 한국 직장인이 채식한다는 건 상당한 시간과 돈을 감수하는 일이다. 어느 정도의 소명 의식 없이는 지속 불가능하다. 닭가슴살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으면서 힘겹게 운동하는 헬스인에게 식물 단백질로 환경을 생각하라고 충고하는 건 속 편한 소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채식에 관한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난 적어도 채식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조롱하거나, 풀때기로는 힘이 안 난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꺾이지 않는 태도가 중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