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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02. 2023

 블루 트레인 블루 노트

Ver. 2.0

   요즘 지하철에 타면 뉴스 대신 눈을 감고 재즈를 듣는다. 존 콜트레인의 연주에 집중하면 세상이 온통 재즈로 물든다. 슬며시 눈을 뜨고 휘청이는 사람들을 보면 꼭 재즈 선율에 스텝을 밟는 것처럼 보인다. 곡 제목도 블루트레인이다. 내가 탄 1호선 지하철도 온통 블루다. 덜컹거리고 휘청이는 직장인들의 몸짓은 재즈 즉흥 연주처럼 박자를 임의대로 만들어간다. 실로 재즈다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재즈가 흑인들의 노동요였던 걸 생각해 보면 아예 뜬금없는 상상도 아니다. 재즈는 그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미국 흑인의 원시적인 무용 리듬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앞뒤 재지 않고 흔들리는 승객들의 스텝은 고된 노동을 시작하는 재즈 댄스로 손색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재즈는 삶을 조금이나마 낙관하려는 슬픈 운무처럼 보인다. 뭐 갈 때 가더라도 재즈 한 곡 정도는 괜찮잖아. 빽빽한 하루에 이 정도 틈 하나 벌리지 못하면 어떻게 숨을 쉬고 사나 싶다. 난 우리 사무실 오 과장이 습관처럼 담배를 찾는 것처럼 틈만 나면 재즈곡을 켠다. 에어팟으로 몰래 재즈를 피우면서 붐비는 일터의 지루함을 잊어낸다. 흔들흔들 비틀비틀 끄덕끄덕. 구둣발로 만들어가는 절묘한 리듬을 따라가면서 오늘 밤에는 실로 재즈다운 순간이 찾아오진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품어본다.


 신도림역, 문이 열리고 한바탕 춤을 추고 난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2호선으로 갈아탈 채비를 한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람과 부대끼는 밀폐 공간은 여름방학 때 놀이동산을 방불케 한다. 2호선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다들 이 지옥을 벗어나려고 일을 하는지 몰라도, 내 경우에는 어떻게든 지옥마저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재즈를 상상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독서가 있다. 종일 어디론가 실려 다닐 수밖에 없는 도시 직장인에게 대중교통에 달려오는 자투리 시간은 뭘 읽기에 적합하다. 책 속에는 상상에나 나올법한, 상상만 해도 즐거운, 상상과 달리 비참한, 상상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심심한 그런 이야기가 있다. 맞은편에 흰색 후드 티셔츠를 입은 학생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와중에 책을 읽고 있었다. 난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몸을ᅠ살짝ᅠ앞으로 구부리고 티 나지 않게 슬쩍 표지를 봤다. 제목은 익숙한데 작가 이름이 영 낯설었다. 그는 흔들리는 와중에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책에 집중했다. 비틀거리는 남자가 몸으로 책을 툭 치고 지나갔지만, 학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인셉션'에라도 들어간 사람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영화 인셉션에서는 '꿈속의 꿈'에서 빠져나올 때 온갖 고생을 다 하는 주인공을 놀리듯이 '에디트 피아프'의 라비앙로즈가 흘러나온다. 이 혼돈의 지하철에서 어떻게든 이야기 속에 빠지려고 애를 쓰는 학생처럼 장밋빛 인생을 예찬하는 노래가 현실 바깥으로 흐른다. 지하철은 잿빛이지만 어떻게든 장밋빛이라고 믿어버려야 이 아침을 버텨낼 수 있다.


ᅠ 나는 이상하게 책 읽는 사람을 보면 호감이 간다. 책을 읽지 않으려는 세상에서 그 재미있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제쳐두고 독서하는 그들과 느슨한 유대감을 느낀다. 나 역시 그 유대감의 발로로 팔꿈치로 옆 사람을 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책을 꺼내 폈다. 어제 등 운동을 과하게 해서인지 등 허리께가 뻐근했다. 나와 등 운동 루틴을 함께 소화한 옆 사무실 원도는 연신 엄살을 부렸는데, 내가 시범을 보여준다면서 의욕적으로 케이블을 당기다가 삐끗했다. '선배 너무 빡빡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 오늘 졸라 힘들었는데.' 맞는 말이었지만 무게를 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나로서는 그 말이 너무 나약하게 들려서 모범을 보인답시고 오버한 것이다. "내가 평생 독서에 재미를 못 붙였는데 그냥 독서하는 내 모습이 폼나 보여서 죽어라 읽었거든? 그랬더니 어느새 취미가 돼 있더라고. 헬스도 똑같아. 그냥 생각 없이 열심히 들다 보면 헬스가 팔자가 된다니까." 선배답게 멋진 말을 하려던 거였는데, 실은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이었다. 이렇게 잔소리하고 나면 뱉은 말이 있어서인지 적당히 할 수가 없다. 내가 내 말에 먹혀버리는 꼴이다. 원도 말이 일리가 있다. 삶은 운동 말고도 힘든 게 천지니, 운동까지 무리해서 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가 적당하다는 어감처럼 좋다.


ᅠ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한 손으로는 책을 펴고 독서를 시작했다. 몇 자 읽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시름시름 앓는 소리가 나왔다. 등이 뻐근해지면서 노곤한 하품을 비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적당히'가 어렵나 보다. 픽션보다는 나른한 재즈에 어울리는 날이었다. 존 콜트레인보다는 빌리 홀리데이의 기품 있는 목소리가 그리운 아침이었다. 이어폰 볼륨을 높이고 독서도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독서도 적당히. 뭐든지 적당히.'


 집이 좁다 보니 서재가 없다. 세상에 서재라니. 내 나이대에 서재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어렸을 때는 내 나이쯤 되면 서재가 있는 집에 살 줄 알았다. 내 나이를 사는 내게 집은 그저 숙식 공간이다. 책은 보통 식탁 겸용 책상이나 잠들기 전 침대에서 읽지만, 오직 독서만을 위한 공간은 없다. 어쩔 수 없이 책을 보관하는 공간은 마련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이 쌓이면 공간을 다 차지해서 독서할 공간을 빼앗긴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운동은 어디서든 할 수 있지만 집이 좁아지면 덤벨 둘 곳도 부담스러워진다. 특히 서울 시내에서 자취하는 사람이라면 내 말을 다 이해할 것이다. 한 평 늘어나는데 거금이 왔다 갔다 하니 운동 기구에 내어줄 공간은 애초에 꿈도 꿀 수 없다. 그래서 내게 헬스장은 참 중요한 공간이다. 문틀 철봉도 달 수 없는 집에 산다면 지근거리에 있는 헬스장이 삶의 보폭을 넓혀준다. 그래서 지하철은 그렇게 내게 전적으로 독서의 공간이고, 카페는 서재이며 헬스장은 누가 뭐래도 나를 위한 야외 테라스다.


 이제 몇 정거장 남지 않았다. 독서에 열중하면 할수록 어제 김 부장이 열을 내며 내게 뱉은 말이 생각났다. 그 면상을 또 봐야만 하다니. 그 거친 성미가 빚어낸 모욕이 뇌리를 맴돌았다. 책을 펴고 있었지만, 단어 사이마다 움푹 파인 웅덩이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독서의 공간은 무슨... 책 한 장 넘기지 못하고 고개를 젖힌 채 다시 재즈에 집중했다. 빌리 홀리데이에서 빌 에번스로 건너갔다가 쳇 베이커를 거쳐 데이브 브루벡으로 갈아타고 회사에 도착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기진맥진해서 집에 들어오니 베개와 침대 시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제 엎지르고 미처 닦지 못한 우유가 남아메리카 대륙 모양 얼룩을 남겼다. 우선 물티슈로 바닥부터 닦고 옷가지를 수납함에 넣었다.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켜고 밀린 설거지부터 끝냈다. 캐스터의 실감 나는 중계 덕분에 강민호가 친 뜬 공이 외야로 날아가는 광경을 떠올릴 수 있었다. '자 타구가 우측 담장을 때립니다. 강민호 선수가 1루를 지나 2루까지 여유 있게 진루합니다.' 공은 유려한 구도로 펜스에 처박혔다. 야구는 인생과 비슷한 착점이 있다. 뜬 공을 받으려는 외야수의 위태로운 자맥질엔 삶의 버둥거림이 보인다. 얼떨결에 뿜어져 나오는 거친 숨결과 손을 턱에 괴고 수 싸움을 하는 진중함이 공존한다. 내야에 타구를 날리고 전력 질주한 후 아웃되는 구자욱 선수의 젖혀진 이마처럼 허탈한 순간을 이겨내면 어느 순간 '어어 이건 뭐지' 하다가 어이없이 끝이 나버린다. 오죽하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이 야구 외야석에서 2루타를 치는 소리를 듣고 나서라고 했을까. 인생의 3회 말을 사는 나로서는 참고 견뎌서 경기 후반부를 대비하고 있다. 점수를 좀 내주더라도 실점을 최소화하고, 불펜을 동원해서라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순간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인생은 야구처럼 잘해봐야 3할 타자고, 아무리 잘 던져도 무실점으로 막는 건 요원하다. 적당한 수준에서 꾸준한 자가 결국에는 중용받는다는 점도 유사하다.


 ᅠ캐스터는 요즘 연패를 거듭하는 삼성 구단을 성토했다. 홈런 타자 출신 해설자도 질세라 거들었다. '1번부터 9번까지 잘 치는 타자가 하나 없어요. 프로 맞습니까. 그리고 투수는 발전이 없어요. 언제까지 리빌딩 타령하렵니까. 리빌딩이 아니라 그냥 야구 안 하겠다는 거 아닌가요. 제가 야구할 땐 지면 밤늦게까지 남아서 특타 연습이라도 했어요. 야구를 장난으로 하면 안 됩니다. 프로 아닙니까.' 어째 우리 부장님 잔소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섬뜩했다. 지난 세대는 언제나 요즘 애들이 못마땅하다. 난 어려서부터 유독 야구를 좋아했다. 9살 때부터 내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문 스포츠면 읽기였다. 내가 가장 애틋하게 간직한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인데, 친구 주호랑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나란히 앉아서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라디오 야구 중계를 들었다. 숨죽이고 듣다 보면 그 비좁은 그레이스 봉고차가 잠실야구장으로 변했다. 난 두산을 좋아했는데 심정수가 9회에 3점 홈런을 날려서 경기를 끝내는 순간, 우리 둘은 어쩔 줄 모르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기사 아저씨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들갑을 떨다가 부셔 먹던 신라면 한 봉지를 바닥에 다 흘렸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게 눈물이 핑 돌고 서글퍼진다. 그깟 야구에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처럼 째지는 기분이었다. 우리 둘 다 심정수가 친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가는 광경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수비를 하는 외야수의 볼품없는 움직임과는 별개로 공은 그 나름대로 유려함이 있어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마 그때 난 평생 야구를 보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운동 신경이 둔한 아이였지만, 아마 그때부터 스포츠를 사랑했던 것 같다. 내가 근력 운동에 집착하는 것도ᅠ야구 선수들을 보며 자란 영향이 크다. 굵은 팔뚝과 허리보다 두꺼운 허벅지를 가진 김동주와 심정수는 내 로망이었다. 지금은 일하고 밤에는 글 쓰느라 자기 전에 바닥을 닦을 때도 요통에 시달리지만, 방에 틀어 놓은 라디오 중계는 언제나 내 스포츠맨십을 자극한다.


 ᅠ저녁 9시, 다시 글을 쓸 시간이다. 잠들기 전에 출판사로 보내야 할 원고를 손봤다. 노트북으로 '롱아일랜드재즈 밴드'의 라는 곡을 틀었다. 포근한 해변을 연상케 하는 사랑 노래다. '그래 사랑이란 물어봐 주는 거지.' 춤을 추시겠냐고 묻는 건 함께하고 싶다는 동의어가 분명하다. 그건 비단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경우는 아닐 것이다. 가령 이 곡을 들으면서 떠올렸던 영화 중에 <쉘 위 댄스>가 있다. 매일 격무에 시달리던 중년의 남자는 그날도 밤늦게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 문에 몸을 기대어 잠시 졸던 남자는 창문으로 역 근처 건물에서 한 댄서가 춤을 추는 모습을 목격한다. 허름한 건물에서 세상 모든 의미심장함을 모조리 흡수한 얼굴로 춤을 추는 댄서들이 그의 눈에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서류 가방을 가슴에 움켜쥐고 댄서의 춤을 응시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는 자기 삶이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고 느낀다. 불현듯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그런 의구심이 들 때가 있지 않나. 이튿날 그는 무작정 댄스 강습소를 찾아간다. 그렇다고 그가 춤바람이 들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무실 꼰대들에게 한 방 먹이는 장면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에게 필요한 건 고작 퇴근 후에 조금이나마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었을 뿐이니까. 그에게도 야구장 외야석처럼 한적한 사색의 공간이 필요했다.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동료, 좋은 아들이기도 한 그가 한 사람의 취향으로 바로 서는 순간이다. 


 ᅠ헬스를 시작하면서 춤과 멀어졌다. 어릴 적엔 나이트클럽에도 종종 가고 그랬는데, 지금은 큰 근육이 붙으면서 몸이 둔해졌다. 처음 책을 출간했을 때 한 출판 기념회에서 진행자가 사전에 약속도 없이 음악을 틀고 춤을 춰달라고 했는데 도통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날도 하체 운동을 하고 갔는데, 막상 춤을 추라고 하니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스쿼트 동작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난 엉거주춤하다가 스쿼트 동작을 취하고 그 자리를 모면했다. 다들 빵 터졌지만, 나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서른 이후부터 내가 논 곳이라고는 헬스클럽이나 기껏해야 독서클럽이니 이 모양이다. 가끔 유튜브에서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셀럽을 보면 한껏 부러워진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이 가진 리드미컬한 몸짓에 심취한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우아한 춤은 2013년에 김연아가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고 펼쳐 보인 갈라쇼였다. 당시 김연아 선수는 남성 정장을 입고 베레모까지 쓴 채 마이클 부블레가 느끼한 목소리로 부른 재즈곡 'All Of Me'에 맞춰서 춤을 췄는데, 난 재즈 곡을 가지고 노는 그 날렵한 몸짓을 넋 놓고 바라봤다. 내가 살면서 결코 다다르지 못할 부드러운 곡선의 세계였다. 난 근력 운동에 치중하면서 스트레칭과 같은 유연성 운동을 등한시했다. 점점 몸이 굳어가는 걸 막기 어려웠다. 그래도 오직 글 속에서만큼은 유연한 문장을 구사하려고 노력한다. 김연아처럼 유려하고 날렵한 문장을 쓸 수 있다면 춤을 잃고 사는 한을 어느 정도는 풀 수 있을 것 같다.


ᅠ 자정 무렵 오늘 하루 재즈와 독서, 야구와 춤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글로 적어봤다. 옷을 다 벗고 베갯잇에 머리를 뉜 채 퇴고를 했다. 입으로 중얼중얼 내가 쓴 글을 읽으면서 내 일상이 지루해 보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고쳐 썼다. 나지막한 천장을 바라보면서 연인의 뜨거운 몸을 잊고, 그냥 버티듯이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짐짓 불안해졌지만, 글이 생각보다 잘 나와서 한결 편안해졌다. 잠이 잘 오지 않아 빌 에번스의 곡을 켰다. 조카의 아름다운 춤을 보면서 곡을 썼던 빌 에번스의 심정을 떠올렸다. 어느 재즈바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기분에 심취하면서 이 비좁은 방이 블루 노트 재즈 클럽이라고 상상했다. 방에 우퍼가 달린 것처럼 천장이 윙윙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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