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 2.0
ᅠ몇 해 전 한 친구는 내게 자기 친구 얘기를 해줬다. 우린 오랜만에 만나서 근황을 주고받은 후에 별로 할 말을 찾지 못했는데 각자의 아는 사람은 좋은 윤활제였다. 우리 둘 다 아는 사람이면 말을 조심하게 되고 MSG를 치기 어려운데, 나는 알고 너는 모르는 사람 얘기는 자유롭게 떠들어 댈 수 있다. 친구도 나도 서로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지금은 연락도 통 없이 산다. 그렇지만 그날은 아는 사람 얘기로 우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오늘 글은 그 아는 사람에 관해 들었던 얘기 중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만 편집하여 적은 것이다.
그는 지방에서 혼자 상경한 서른 중반의 남자로 경기도 외곽 투룸 방에서 살았다. 이름이 아마 민기였던가 했다. 기억이 가물한 거 보니 아주 흔한 이름이었다. 최근 이사를 하다가 친구가 막 파주로 전입신고를 한 민기 씨 얘기를 해준 게 떠올랐다. 민기 씨는 들어보니 목돈이 없어 서울 시내에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장에서 너무 먼 파주에 방을 잡았다. 아침저녁으로 버스에서 하루 세 시간씩 잡아먹혔다. 파주 운정마을에서 을지로 역까지 자유로를 타는 부자유한 여정에 지쳐갔다.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됐다. 항시 차가 막혀대는 통에 지칠 대로 지쳤다. 버스를 가득 매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민기 씨는 이런 처지가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받았다. 풀린 눈으로 버스에서 골골거리다가, 빌딩 숲에 다다르면 한숨을 내쉬며 우르르 빠져나가는 좀비들. 다들 그렇게 사는 것 같긴 한데 그렇게만 살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마치 고인 물속을 부유하는 미생물이 된 기분이었다. 유폐된 채 모든 고민을 유예시키는데 익숙해져서, 지금 하는 일이 부유한 삶을 위한 건지 아니면 간신히 퇴근해서 편의점에서 산 유부초밥을 먹기 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오 년쯤 지나 유부남이 되면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평생 노동하는 기계가 될까 두려웠다. 그렇지만 오늘 하루 수습하기도 버거웠던 민기 씨의 모든 관심은 주말이 언제 올 것인가에 닿아 있었다. 두려움을 직면하기에는 할 게 너무 많은 풋내기에 불과했다.
ᅠ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면 늦은 시간이었다. 늦더라도 헬스장에 가서 윗몸일으키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몸을 일으킬 힘도 없었다. 하긴 북에서 송출하는 대남방송이 다 들리는 곳에서는 마음이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군대만 가면 다 귀찮아지듯 예비군복만 입혀 놓으면 한껏 삐딱해지듯 평양방송의 호전적인 성우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힘이 쭉 빠지게 마련이다. 북한 성우는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 대통령을 욕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거짓이라고 꾸짖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고, 자꾸 듣다 보니 주술처럼 느껴져서 섬뜩했다. 정해진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을 원망하는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이를 제외하면 동네는 대체로 고요했다. 아니 소리보다는 시선이 고요했다. 눈이 탁 트여서 좋았지만, 점차 눈 둘 곳이 사라지면서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생각했다. 민기 씨를 유독 예뻐했던 외할머니는 평생 자식을 돌보며 살았지만, 삶의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자신을 떠맡기 싫어하는 자식 놈들 눈치나 보도가 생을 마감했다. 이 일로 민기는 단단히 화가 났지만 아버지가 빚을 내면서까지 요양원비를 내는 걸 보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노년은 고작 짐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빈손으로 간다고 정말 빈손이 되면 자손들의 봉양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의 마지막은 민기 씨에게 삶의 엄정함을 각인시켰다.
파주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민기 씨는 이왕 외롭더라도 소란 속에서 자약하기를 바랐다. 너무 외로워서 그토록 떠나길 바랐던 고향이 그리웠다. 주 내내 일하고 나면 주말에는 무조건 집에서 쉬어야 했다. 홈트라도 하겠다고 유튜브를 켰지만 땅끄부부의 동작은 따라 하기가 너무 방정맞았다. 잘 차려진 헬스장에서 각 잡고 운동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헬스장도 없는 동네였다. 삼십 분만 나가면 유명한 보디빌더가 하는 첨단 헬스장이 있었지만 너무 비쌌다. 이건 사람 사는 꼴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살다 보면 더 나은 삶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녹초가 되어 주말 대부분은 잠을 몰아 잤다. 일이 너무 힘들었다. 몸이 축나는 게 느껴졌다. 산에서 도라지라도 캐 먹어야 할 판이었다. 서울 간다니 보약 해준다고 호들갑을 떨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럴 돈 있으면 그냥 돈으로 달라고 했다가 등짝을 맞았다. 지금 같아서는 기운이 난다고 하면 초롱초롱하게 눈을 뜬 사슴에라도 올라타서 뿔이라도 잘라먹을 태세였다. 안 그래도 가끔 동네에 사슴이 나타났다. 눈이 붉고 털이 흰 알비노도 보였다. 무리와 떨어져서 돌아다니다가 멀찍이서 풀을 뜯으며 물끄러미 민기 씨를 쳐다봤다. 눈을 마주친 김에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민기 씨는 사슴을 볼 때마다 작게 중얼거렸다. '너도 심심하지. 너도 외톨이구나. 난 조금만 기다리면 서울 간다. 난 목돈만 모이면 여길 뜰 거니까 그때까지 잘 지내보자.'
ᅠ끼니는 보통 오피스텔 1층에 연 이마트 편의점에서 때웠다. 편의점은 그에게 조화로운 세계였다. 가깝고 신선하고 다채로웠다. 도시락만 해도 열 가지는 되었다. 민기 씨는 돈을 아끼려고 대체로 닭가슴살과 햇반 하나만 사서 먹었다. 배가 고프면 도시락 하나를 추가했다. 허허벌판에 지은 오피스텔 건물은 집주인이 노후를 위해 가진 돈을 다 털어서 지은 건물이었다. 주인 할아범은 틈만 나면 편의점에 들이닥쳐서 잔소리를 했다. 인사하는 그를 본체만체하고 편의점 직원에게 소리를 질렀다. 건물 밖 청소를 안 한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난다고 난리였다. 그럴 때마다 편의점 알바는 연신 고개를 숙이고 시키는 대로 했다. 대신 따지고 싶을 만큼 할아범의 말투는 무례했지만, 그가 일터에서 당하는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도 생각했다. 그 역시 사무실에서라면 아르바이트생처럼 별말 없이 꾸지람을 견뎠을 것이다. 민기 씨는 그의 우람한 팔뚝으로 노인을 끌어내는 상상을 하다가 전자레인지가 핑하고 울리자 정신을 차렸다. 까닥 잘못해서 월세라도 올려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ᅠ건물 단열재를 제대로 안 넣었는지 밤만 되면 한기가 흘렀다. 너무 추워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민기 씨는 햇살이 강한 방이 싫어서 북향을 골랐지만 파주의 겨울은 자비가 없는 무뢰한이었다. 민기 씨는 십만 원 주고 산 토퍼에 누워서 누에고치처럼 몸을 구기고 유튜브를 봤다. 어차피 동네에 아는 사람도 없었다.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이 지겨우면 프라이팬에 도시락을 다 쏟아 넣고 볶아먹었다. 요리는 사치였다. 장 보고 조리하고 설거지하느라 주말을 날릴 순 없었다. 라면이 지겨우면 김치를 더 넣어서 찌개를 만들었다. 커피는 회사에서 몰래 가져온 카누와 모카골드로 때웠다. 주말이라고 약속을 잡을만한 친구도 없었다. 영화라도 보려면 또 지긋지긋한 버스를 타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싸도 합정이나 상수 근처에 집을 구할 걸 후회도 했지만, 그렇다면 매달 뜯기는 돈이 또 얼마인가 계산기를 두드려보고는 안도했다. 그가 동네에서 갈만한 곳은 개천가와 작은 카페뿐이었다. 어려서부터 그토록 두려워했던 몰취향 한 일상이 계속됐다. 이렇게 단조롭게 살다가는 재미없는 인간이 될게 분명했다. 그래도 지금은 별 수 없었다. 예상대로 돈은 잘 모였다. 이 상태로 고생 좀 하면 내년쯤에는 서울에 단칸방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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ᅠ추우니 자주 배가 고팠다. 그때마다 편의점에 갔더니 노하우가 생겼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제품을 싸게 사 올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은 늘 핸드폰만 보고 있어서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지만, 그가ᅠ도시락을 고를 땐 말도 없이 다가와서는 유통기한 임박해서 할인하는 제품을 가리켰다. '감사해요. 늘 신세를 지내요.' 학생은 고개 한 번 끄덕이지 않고 뭘 하는지 액정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학생은 그가 주말에 만나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아무 말도 나눌 수 없었다. ‘나도 사무실에서는 아무 말 안ᅠ하니까.' 학생은 항상 아식스 운동화에 청바지 그리고 초록색 유니폼 차림이었다. 거의 매일 일하는 걸로 봐서 프리터족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했다. 상상을 버릇처럼 반복하니 아르바이트생이 퇴근하면 뭘ᅠ할지, 집에서는 뭘 무슨 얘기를 할지가 궁금해졌다. ‘너도 나처럼 요즘이 일종의 모라토리움 시기일까.' 민기는 현실을 어쩌지 못해서 밤거리를 배회하는 학생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게를 나섰다. 최근에 본 뉴스가 온통 청년실업률과 구직 한파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ᅠ 일터를 제외하고 대화다운 대화는 오직 SNS에서만 나눴다.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은 물론이고 만남을 주선하는 랜덤 채팅도 가라지 않고 깔았다. 그렇다고 온라인에서 놀 마음은 없었다. 기회가 되면 SNS를 통해 동년배의 친구와 만나 얘기하고 싶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도 분명히 자신처럼 심심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빨간 버스에 탄 수많은 직장인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들 방구석에 처박혀서 월요일 출근만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그들을 불러내고 싶었다. 학교 다닐 때는 동아리 회장도 하고, 학생부 활동도 끊기지 않고 할 만큼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자신이 있었다. 이성을 만나고 싶은 욕심도 컸다. 왠지 연애만 하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았다. 장래 희망이 사라진 지금이라면 사랑이 돌파구가 아닐까. 과거엔 그도 클럽에 가서 놀만큼 밤문화를 즐겼지만, 지금은 이 시골 땅에 어울리는 목가적인 취미가 필요했다. 온라인의 장점은 뚜렷했다. 빠르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선호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애플리케이션에 입력하면 적합한 상대들을 이어줬다. 타지로 와서 말수도 적고 숫기도 사라진 민기 씨는 온라인에서 만큼은 혀가 호날두였다. 그간 못했던 말이 터져 나오면서 혀로 드리블을 쳤다. 아이디를 '앙리 다비드 소로'라고 만들었다. 프로필 사진은 한창 운동할 때 찍었던 바디프로필을 넣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던 소로는 한 대화방에서 '립반윙클의 신부'를 만났다. 립반윙클의 신부가 대화방에 들어오자마자 마음이 갔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를 딴 대화명이 마음에 들었다. 대화를 해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신부는 심심함을 따분하게 여기지 않는 다정한 기운을 내뿜는 사람이었다. 얼마 안 가 서로 터놓고 일상을 공유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앱이 같은 지역에 사는 이성을 잇는 앱이라서 더 설레었다. 한편으로는 이 시골 바닥에서 어디 가지도 않고 방구석 신세라면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알만한 상황이면서 상대의 알만함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상을 하면 지금 쉴 새 없이 액정을 두드리는 립반윙클의 신부와 만나기가 꺼려졌다. 소로는 자신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어느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순식간에 번호를 교환하고 장문의 카톡으로 서로를 만나고 싶은 의사를 표했다. 소로는 모처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면서 점차 현실의 피폐함과 멀어졌다. 혼자 보내는 주말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만남의 날이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옷을 차려입을 필요도 없고, 돈도 들지 않는 온라인상의 대화가 즐거웠다. 그렇지만 이대로 만나지 않고 흐지부지할 수는 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가끔 사진을 찍어 보냈고, 같은 유튜브 영상을 보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니까. 이모티콘 몇 개만 돌려써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친해졌으니까.
ᅠ 며칠 전 두 사람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 얘기를 하다가 불과 두 블록 거리에 산다는 걸 알아버렸다. 개천 맞은편이 립반윙클의 신부 집이었다. 옆 동네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다. 늘 환히 열려있던 커튼을 치고 맞은편 건물을 살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만나자는 말로 이어졌고, 고대하던 약속이 잡혔다. 마음이 복잡했다. 직접 보면 내 모습이 다 드러날 텐데, 그러면 다시 못 볼 각오도 해야 했다. 직접 보면 판가름을 내야 하니까. 관계를 규정해야 하니까. 요즘에는 세 번만 만나도 사귈지 말지 판단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 요즘 통념이라고 하더라. 관계를 유예한 채 서로를 향한 상상만으로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차에 약속한 날이 와버렸다. 오후 두 시 약속인데 초조함에 두 시간이나 일찍 나섰다. 그간 결혼식 아니면 입을 일이 없던 셔츠도 꺼내 입었다. 수년간 한 운동 덕에 여전히 흉부는 단단했고, 배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직 쓸만한 몸뚱이였다. 우선 커피를 마시고 갈 식당과 저녁에 근처 소소라는 갤러리에서 작품도 보기로 했다. 국내 신진 작가의 전시였는데 바로 옆에 있는 카페가 근사했다. 그는 립반윙클의 신부와 그간 나눈 대화 내용을 쓱쓱 올려보면서 복기했다. 그간 얼마나 깊고 방대한 대화를 나눴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둘은 시도 때도 없이 속사정을 털어놨다. 교양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긁어다가 붙였다. 둘 다 이 시골 동네에서의 삶이 유일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로는 립반윙클의 신부를 알 것 같았다. 립반윙클의 신부도 소로를 아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카톡으로는 라면을 끓이고 청소하는 일상까지 특별하게 전시했다. 직접 얼굴을 보면서도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초라한 세간과 켜켜이 쌓아둔 편의점 식품들은 사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기 자취방에 립반윙클의 신부가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져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가 시킨 드립커피의 산미가 김칫국처럼 시큼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소개팅 자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카페 안은 다행히 한산했다. 어떠한 형식 안으로 들어가면 그에 걸맞은 말과 행동을 해야만 한다. 민기는 소개팅에서 할 법한 말을 연습했다. 남들이 의례 하는 것처럼 소개팅용 대화를 할 것이다. 민기 씨는 연애를 한지 한참이었다. 그는 항상 만지고 부둥켜안을 수 있는 관계를 바라 왔건만, 적어도 오늘은 그날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담감에 목이 탔다. 차가운 커피를 한 잔 더 마셨다. 어제 술을 마시고 자서 그런지 몸에 미열이 있었다. 창밖 햇살이 따듯해서 저도 모르게 팔을 턱에 괴고 선잠에 들었다. 꿈속에서 아는 사람과 심하게 다퉜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는 지나치게 정확하고 딱 부러지는 말투로 공격했다. 아는 사람이었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내내 폭언을 참고 견디던 민기 씨는 샅샅이 꿰뚫는 말로 반격했다. 상대의 호통 소리에 잠에서 깨니 순간적으로 지금 여기가 어딘지 헷갈렸다. 옆 테이블에 민기 씨와 비슷하게 머리를 깎고 옷도 셔츠 차림으로 비슷하게 입은 남자가 비스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55분. 창밖을 살피는데 어딘가로 향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보였다. '어딜 가는 거지. 잘 차려입었네.' 편의점 녹색 유니폼만 보다가 처음으로 외출복을 목격했다. 아식스 운동화 대신 끈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고동색 벨벳 코트가 제법 잘 어울렸다. 학생은 길을 걸으면서도 휴대전화기를 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편의점 밖이나 안이나 저 작은 액정을 보고 사는구나 싶었다. 부지런히 놀리는 엄지손가락이 현란했다. 누구에게 카톡을 하는 걸까. 이제 약속 시간에 다다랐음에도 립반윙클의 신부는 별말이 없었다. 학생은 버스정류장 근처에 잠시 서서 개천 너머를 바라봤다. 한쪽 발을 정류장 기둥에 대고 서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돌아서서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뭘 두고 왔나.' 그때 립반윙클의 신부가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나올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톡을 했다. 민기 씨는 왠지 모르게 실망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나왔다. '그래,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라.' 소로는 너그럽게 다음에 보면 된다고 답했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정말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했다. 소로는 괜찮다고 다독였다. 슬슬 배가 고픈 참이어서 카페에서 모처럼 샌드위치를 시켜 먹었다. 집에 사다 놓은 도시락 생각이 났다. 립반윙클의 신부에게 주려고 사 온 작은 화분을 챙겨서 카페 밖으로 나섰다. 레옹이 된 것 같았다. 마틸다처럼 작고 왜소한 편의점 학생은 사라지고 없었다.
ᅠ내가 친구에게 들은 민기 씨 얘기는 여기까지다. 그때 친구는 왜 민기 씨 얘기를 꺼냈을까.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민기가 나랑 비슷해서라고 했던 것 같다. 뭐가 비슷하냐고 물으니,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고 글을 쓰며 심지어 헬창이라고 했다. 그때 한 번 들은 민기 씨 얘기는 내게 낯선 동네가 얼마나 쓸쓸한지 알려줌과 동시에, 대도시엔 없는 나른하고 한적진 기운을 상상하게 했다. 친구는 도시보다 오히려 시골에서 온라인 만남이 성행한다는 걸 알려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닌가. 시골에서는 헬스장에 다니기가 어렵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집을 구할 때는 직장과의 거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강조했던 것 같기도 하고. 친구는 저녁을 먹기 전에 민기를 만나 차라도 한잔 같이하자고 제안했다. 그가 모처럼 주말에 서울로 나왔다고 문자를 보내왔다고 했다. 영화를 보러 시네큐브에 왔다가 자기를 보고 간다고 했단다. ‘그래 오라고 해. 나도 민기 씨 얘기 들으니 한 번 보고 싶네.’ 불과 5분 거리였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짓말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만나서 피곤해지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과 만나는 게 내심 불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됐든 나는 그를 피해서 얼른 4호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 역에 내려서 아파트까지 걸어가면서 소로와 립반윙클의 신부를 떠올렸다. 소로는 다시 립반윙클의 신부와 만났을까. 민기 씨는 적당한 헬스장을 찾아서 다니고 있을까. 그건 전적으로 내가 정할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