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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31. 2023

이 도시에서 섹시한 것

 출장지에서 일정을 끝내고 잠시 쉬기 위해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를 찾았다. 회의가 예상대로 풀리지 않아서 낭패였다. 참담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허탈해졌다. 그간 준비해 온 게 물거품이 되어 화도 났지만, 그냥 허무했다.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제안을 거절당하고 나니 뭘 그렇게 아등바등 노력했는지 스스로 한심했다. 버릇처럼 카카오맵으로 스타벅스를 찾았지만 영 보이질 않아서 내가 싫어하는 인스타그램에나 나올 법한 예쁘장한 카페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낮고 온 군데가 다 화이트톤으로 이뤄진 곳이었다. 사장님 앞치마부터 좌석 구석구석이 다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오염된 도시에서 깨끗한 곳은 해방과 같다. 놓여나는 기분이 들어 셔츠 단추를 하나 풀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카페는 대체로 깨끗하다. 특히 작은 카페는 인스타그램 홍보가 필수적이라 그런지 더 필사적으로 청결을 신경 쓰는 눈치다. 우연히 들른 이 카페도 내 방보다 깨끗하니 말 다 했지. 내 생각에 뭐든 깨끗해야 무릇 섹시하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기 작품 <설국>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여름 산들을 둘러보아 온 자신의 눈 때문인가 하고 의심했을 정도였다.” 작가가 가진 깨끗함을 향한 집착은 가히 변태스럽지만, 일견 일리가 있는 문장이다. 온 도시에 먼지와 매연이 만연하고, 고성과 악다구니로 난리부르스를 추는데 그 와중에 깨끗하면 눈이 가고 마음이 열린다. 작은 카페는 적정한 온도에 공기청정기까지 틀어져 있고 화장실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해서 누워서 잘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깨끗하면 잠시나마 삶의 누추한 면모를 잊고 쉴 수 있다. 헤밍웨이 단편 소설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서도 이런 깨끗함에 관한 서술이 나온다. 소설 화자인 카페 주인은 지난주에 자살을 시도했다고 소문이 파다한 노인이 밤늦게까지 자신의 카페에서 떠나질 않는 걸 보고는 이런 말을 한다.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공포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건 그가 너무도 잘 아는 허무였다. 모든 것이 허무였고 인간 또한 허무였다. 바로 그 때문에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또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헤밍웨이는 카페 주인 입을 빌려 허무에 대항하는 무기로 빛과 깨끗함 그리고 질서 정연함이 있는 공간을 제시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생의 두려움과 공포를 비껴가는 곳이 바로 깨끗하고 불빛까지 환한 카페라고 했다.


 인공적으로 느껴질 만큼 매끈한 가구 사이에 앉아서 유튜브를 켰다. 다리를 꼬고 발을 까닥까닥하면서 몸을 늘어뜨렸다. 깨끗하지 못한 자가 즐비한 저녁 뉴스였다. 커피를 시켰더니 아이스로 나왔다. 난 분명히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그랬는데. 사장님은 요즘 다 아이스를 마셔서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하면 무조건 차게 준다고 했다. 찬 커피를 마시고는 쉴 수 없지. 찬 커피가 기본으로 굳어진 도시는 비극이라고 생각하며 뜨거운 커피로 다시 받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받고서야 이게 행복이지 싶었다. 아 행복 별거 없다. 소소하게 만족하면서 살자. 그러면 별거는 뭐지? 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난 이토록 힘들게 사는 걸까. 몇 년 전 노량진 학원가에서 어떤 수험생이 옆자리 학생에게 매일 백다방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오는 사치를 지적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해 달라고 쪽지를 남긴 사건이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걸 굳이 지적하려고 했던 학생을 생각해 보니 짠했다. 그에게는 그거야말로 '별거'였다. 매일 1,500원짜리 백다방 커피도 별스러운 사치니 제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내 소박함이 누군가에게는 사치이고, 행복한 삶도 누군가와 견주는 순간 초라해지기 이를 데 없어진다. 갑자기 열심히 살아야겠다 싶었다. 난 별거 아니지만 스타벅스 커피 정도는 매일 먹어야 할 만큼 사치가 필요하니까.


 ᅠ날이 어두워지던 참이었지만 카페를 나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부터 내리 세 시간을 운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난 이상하게 한 시간만 넘게 운전하면 졸렸다. 그러면 졸음쉼터에 가서 시체처럼 뻗은 사람과 잠에 들어야 한다. 며칠 전에도 출장을 다녀오다 졸음쉼터에 들어가서 잠깐 잠에 들었는데 불길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한참 달게 자다가 깼는데 어디선가 멀찍이서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창문을 살짝 열었더니 굉음 소리가 더 커졌다. 잔뜩 겁이 난 나는 차에서 내려서 상황 파악을 하려고 애썼다. 폭발음이 점점 더 커지면서 이 근방에 이르렀다. 난 겁에 질려서 앞뒤로 둘러보는데 차에 탄 사람들이 모두 잠에 들어 있었다. 난 내 차 바로 뒤에 세운 흰색 아반떼로 다가가서 창문을 두드렸지만, 운전자는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길게 세워진 모든 운전자가 마찬가지였다. 나 빼고는 다 깊은 잠에 빠져서 폭발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난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아반떼 앞 좌석을 열고 흰 셔츠를 입은 아저씨를 흔들어 깨워봤지만, 그는 더 크게 코를 골며 내 손을 뿌리쳤다. 클랙슨을 눌러서 다른 운전자라도 깨우려고 했지만, 폭발 소리도 듣지 못하는 이들이 그깟 빵빵거리는 소리에 깰 리 없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 같았다. 졸음운전을 피하고자 여기 온 게 아니라 그냥 이대로 죽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 라디오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북한에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무차별적으로 발사하고 있으니 대피하라는 소식이었다. 나는 급히 내 차에 올라타고 속도를 올렸다. 차를 몬 지 십 초도 되지 않아서 백미러를 보니 졸음 쉼터에서 잠든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로 죽어 나가는 게 다 보였다. 도로 위 차들은 쌩쌩 달려서 미사일을 피해 달아나는데, 졸음쉼터 사람들은 너무 졸려서 그냥 다 죽어야 했다. 난 겁에 질려 잠에서 깼다. 다시 운전하는데 착잡했다. 프로이트가 꿈이라는 건 억압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라고 했다던데, 직장을 때려치우고 몇 시간씩 차를 몰며 다니는 내 삶을 나는 부정하고 싶었던 걸까. 그냥 모조리 다 사라지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면 영원히 잠들 수 있을 텐데. 요즘 무리했더니 너무 피곤했나 싶었다. '다 폭발해 사라지면 그다음은 뭔데. 다른 사람들은 무슨 죈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디오에서 방정맞게 코너를 진행하는 DJ가 밉살스럽게 나를 비웃어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카페 창으로 요란한 네온사인이 비췄다. 그 아래로 드문드문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초저녁부터 잔뜩 자셨네. 근처 대형 오피스텔 건물은 벌집처럼 빼곡한데 층마다 한 군데도 빼놓지 않고 불이 다 들어와 있었다. 저 5평 남짓한 공간에서 다들 유튜브 보다가 자겠지. 세탁기 위에 가스레인지, 신발장 옆에 옷장이 있겠지. 뻔하다 뻔해. 내 친구 지우도 공무원을 하면서 오피스텔에 산다. 주말부부를 하면서 오피스텔에서는 잠만 잔다고 했다. 녀석은 고시 공부할 땐 고시원에서 살기도 했다. 녀석은 날 만날 때마다 고시원이 관속 같다고 했다. 벽이 쿵쿵 울리면 누군가 관을 두드리면서 제 생사를 확인하는 기분에 섬뜩하다고 했다. ‘그럼 나도 생존 신고차 벽을 쿵쿵 치며 응수하는 거지.’ ‘그러면 옆방에서 가만히 있어?’ ‘아니, 더 세게 치지. 무슨 모스부호 주고받는 것 같다니까. 마음대로 두드려도 무슨 얘길 하는지 다 알아들어. 신기하지. 아, 오늘 빨래 넌 거 빨리 걷어 가라고요. 알겠어요. 두 시간만 이따가 걷을게요.’ ‘진짜? 존나 신기하네.’ 난 지우의 너스레를 듣고 실컷 웃었는데 녀석의 눈이 슬퍼 보여서 계속 웃을 순 없었다.


 4년간 노량진 고시원에서 버텼던 지우는 이런 말도 했다. 매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아침부터 줄을 서서 선생 말을 목 빠지라 듣고 있노라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고. 발을 디딜 틈 없이 빼곡한 강의실에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기도 버겁다고. 녀석은 곱창을 격렬하게 씹으며 아이작 아시모프 소설 속 사이보그가 된 것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고시원 쪽방은 머리 하나 들어가기 어려운 창문뿐이라 공상이 깃들 리 없었다. 그래서 지우는 매일 밤 블로그에 아무 글이나 싸질렀다. 녀석은 실제로 글을 배설한다고 즐겨 말했다. 정치 얘기, 여자 얘기, 사회 얘기, 공무원 얘기, 고향 얘기, 옛날 친구 얘기, 부동산 얘기, 주식 얘기, 언젠가는 일시불로 살 차 얘기. 녀석은 얘깃거리가 정말 많았다. 어떻게 입 마려운 걸 참고 사냐 물었더니, 자기 전에 블로그에 싸지르는 시간으로 하루하루 버틴다고 대답했다. 온종일 입을 다물다가 입을 떼는 게 고작 식당 아주머니에게 많이 달라는 말뿐이니, 밤늦게 블로그에 속풀이를 하는 식이었다. 한국사 공부하다가 글을 쓰면 대하사극 같은 글이 나온다나. 하긴 매일 일류 강사의 말만 듣고 사니 어디 배출도 곳도 필요하겠지. 지우는 그렇게 매일 매시간 기계처럼 줄줄 외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 난 녀석이 올린 글을 주말에 몰아 읽으면서 킥킥거렸다. 신랄하고 맹렬하며 독창적인 불평이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저런 떠버리가 글은 안 쓰고 공무원이나 하려고 한다는 데 있었다. 죄다 공무원 하면 스탠딩 코미디 각본이나 명랑 소설은 누가 쓰나.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하나. 난 녀석에게 4년간 때마다 곱창을 대접했는데, 그건 녀석이 구사하는 너스레 구독료였다.


ᅠ 녀석은 언젠가 도시에서 유머가 사라지면 도시는 본연의 낭만을 빼앗기고 공장처럼 기계 소리만 날 거라는 요지의 글을 써서 날 놀라게 했다. 내가 읽기에는 꽤 섬뜩한 산문이었는데, 말미에는 유머가 가진 힘을 맹신하는 말을 적었다. ‘네가 이런 생각도 한다고?’ 나는 놀리듯이 말했지만, 글이 산뜻하고 기뻐 몇몇 문장을 곱씹었다. "그래서 유머가 없는 도시란 게 네게 뭘 의미하는데?” 난 곱창을 씹으면서 무심한 듯 물었다. "알코올과 카페인에 서서히 감염되면서 무차별적인 성욕과 식욕을 누르면서 사는 좀비가 되는 거지.” ”누가 그렇다는 건데?” 녀석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다 그렇지. 지금, 이 곱창집에 앉아 있는 인간들 봐라. 다 힘들고 애처롭고 피로해서 유머 한 자락 날리지 못하잖아. 배에 소주랑 기름진 곱창을 잔뜩 넣고 내일 출근해야 하는 비극의 서사를 잊으려고 난리잖아. 저렇게 배가 나오고 얼굴에는 곰팡이라도 핀 것처럼 우중충한데 그래도 먹고살려고 억지로 웃잖아.” 나는 얘가 왜 이렇게 심각해졌나 걱정이 앞서 고개만 끄덕였다. 지우도 좀 오버했다 싶었는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아마 나도 저렇게 되겠지.” 순간 지우와 나눈 대화야말로 항상 읽는 책과는 다른 의미에서 날 꾀어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우와 얘기하다 보면 잡담처럼 가볍고 날렵한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난 속된 도시를 좋아하는데, 그 속됨에 속하기는 싫은 거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여기서 수업을 듣고 합격 수기나 읽고 있으면 그럴 가망은 없다고 봐야지. 너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왜 노량진에서 이러고 있는 건데?” “병신아, 그러니까 삶이 아이러니 아니냐. 글 쓰는 새끼가 그것도 몰라서 무슨 에세이를 쓴다고.” 난 아이러니를 저렇게 쓰는 게 맞는지 헷갈렸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냥 요즘 공부가 좀 힘드나 했다.


 지우에게는 유머야말로 섹시한 것이었다. 내가 잘 만들어진 몸에 집착하는 것처럼 녀석 역시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남고 싶어 했다. 그게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 유머야말로 로봇이 침범 불가능한 인간의 고유 영역이고, 유머를 통해서 기계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지우는 이제 한 소도시 공무원이 되어 컵밥 대신 구내식당 밥을 먹는다. 고시원을 졸업하고 좀 더 넓고 쾌적한 오피스텔로 갔다. 이젠 노량진을 잊고 살지만, 노량진에 살 때보다는 재미는 없어졌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유머 감각도 감퇴시키는 걸까. 관료 사회에서는 시시함이 기본 소양인가. 지우는 이제 글도 안 쓰고, 당시 쓴 글도 모두 지워버렸다. 심지어 그 시절이 부끄럽다고 했다. 하지만 난 녀석의 글을 잊지 않는다. 난 그때 그 시절 지우만 좋아한다. 할 말이 많았던 곱창집의 아이작 아시모프야말로 내 친구였다. 지루하고 사무적인 김 주무관님은 내 친구 안 같다. 장승배기 근처 녀석의 고시원과 매일 입던 남색 아디다스 츄리닝이 아른거린다. 요즘 녀석은 그토록 원했던 생각이란 걸 하고 살까. 서점에서 신간 소설을 사서 읽고 술자리에선 족집게 강사 말에 심취했던 그 시절을 떠벌일까. 톡을 한번 해봐야겠다. ‘어이, 김 주무관님 어디셔?’


ᅠ 지이잉. 금방 답이 왔다. 지우는 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워했다. ‘결혼하는 거냐. 아니면 누구 돌아가셨냐. 넌 어딘데.’ 연이어 따져 묻더니 안심하고는 자기는 회식 자리라고 했다. 섭섭하게 지우는 내가 어디서 살고 무슨 글을 쓰는지도 전혀 몰랐다. 물론 나도 녀석을 몰랐다. 몰라도 괜찮았다. 인스타그램 속보다는 목소리가 조금 처진 느낌이었다. 재기와 익살은 그래도 죽지 않았네. 난 녀석에게 요즘도 글 같은 거 쓰냐고 물었다. 어떤 책을 읽고 읽는지 물었다. 녀석은 특유의 말투로 말했다. "이제 글 쓸 시간은 없지. 책은 가끔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봐. 진짜 재미없는 책도 읽어. 계속 뭔가 시험이 있어서 많이 읽지는 못하고. 넌 언제 책 나오냐?” 조금 실망했지만 잘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다음에 언제 한번 보자고 얘기했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나서 덧붙였다. '계속 운동은 하는 거지. 우리 나이에 헬스장은 그냥 교회이자 학교에다가 병원이야. 알지?' '지랄하네. 나중에 곱창이나 먹자.'


 지우는 한창 경찰공무원을 준비했었다. 당시 우리가 함께 다닌 헬스장은 노량진에서 가장 크고 시설이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 고시원에 살았던 지우는 헬스장 가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녀석은 체력을 기른다고 천국의 계단에 오르고 팔 굽혀 펴기를 했는데 체력이 형편없었다. 그냥 운동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하루 한 번 헬스장을 빼먹지 않았다. ‘너 운동 싫어하잖아. 근데 헬스장은 매일 오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스쿼트를 하던 지우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여긴 환하고 깨끗하잖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매일 비좁은 방과 독서실을 오가던 지우에게 헬스장은 그 어디보다 넓고 청결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넷플릭스다 왓챠다 뭐다 해서 극장에 가는 사람 수가 크게 준 모양이다. 난 큰 텔레비전도 없고 작은 노트북 화면이 싫어서 매주 한 번 이상 영화관에 간다. 극장에 갈 때마다 관객이 줄어든 걸 체감하고 있다. 코로나가 극심할 때는 정도가 심해서 극장 한 관에 여자친구와 단 둘이 있을 때도 잦았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사람 없는 영화관은 쓸쓸했다. 어떨 때는 혼자서 보다가 별 심상한 장면에서 혼자 웃기도 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혼자라도 크게 소리를 내봤지만, 누구 하나 쳐다보지 않는 게 서글펐다. 자고로 극장이란 웃기는 장면에서는 함께 웃고 슬픈 장면에서는 이곳저곳 티슈로 눈물이라도 훔쳐줘야 더 실감 나게 다가오는 법이다. 썰렁한 극장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이와 비슷한 의미로 ‘홈트’를 들 수 있다. 집에서 하는 헬스라니 얼마나 근사한가. 나도 당근마켓에서 하프랙 사 온 적이 있다. 누군가의 빨래 건조대로 전락한 걸 큰맘 먹고 구출해 왔다. 중고였지만 헬스기구 특성상 튼튼하고 싸서 합리적인 소비였다. 난 당장 헬스장을 그만두고 홈트를 시작했다. 마음만 먹으면 스쿼트, 데드리프트, 벤치 3대 운동을 다 할 수 있으니 이참에 헬스장에 가는 시간과 돈이 굳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내 집에 설치한 홈트 기구는 빨래건조대마저 되지 못했다. 오히려 헬스장의 필요성만 절감했다. 그건 사람 없는 극장처럼 고요한 기분 때문이었다. 집에서 홀딱 벗고 운동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없고 내가 의식할 누군가가 없으니 운동할 맛이 떨어졌다. 헬스장에 사람이 북적거리면 시종 눈치 보면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고 옆에서 깔짝거리면 성가시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막상 내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에서 혼자 운동하려니 이름 모르는 누군가와 맺은 느슨한 유대감이 그리웠다.


 영화관의 최대 이점은 첨단 시설이지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권은 부자유다. 앞 좌석에 다리를 올려놓을 수도 없고, 뭘 먹으려면 소리가 날까 두려워 침으로 녹여내야 하지만 그게 바로 순도 백프로로 영화를 접하는 비결이다. OTT로 영화를 보다 보면 스페이스를 치고 화장실에 가고, 물 한 번 마셨다가 생각난 김에 담배도 한 대 피운다. 그럼 흐름이 툭 끊기도 창작자가 만들어낸 리듬도 흩어지고 만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보는 영화는 본 것도 아니다. 쇼트와 쇼트 사이가 빚어내는 연결고리가 느슨해지면 영화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편한 환경에서 이놈 저놈 냄새가 나는 걸 참고 끊김 없이 영화를 볼 때 한 편의 작품이 온전히 다가온다. 그런 하나의 리듬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영화관이다. 헬스장 역시 같은 의미에서 다른 데 신경 쓸 거 없이 온전히 헬스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 소중하다. 집이 가진 편안함은 집중력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번거로움을 무릅쓰는 자에게서 쇳덩이를 들어 올리겠다는 의지력도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같은 무게도 헬스장에서 더 잘 들 수 있는 것이다. 헬스를 위해 다른 모든 불편을 감수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영화관은 위축될지언정 쉽게 사라질 리 없고, 헬스장 역시 땀 흘리는 자의 피땀 어린 등록비로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별 인연 없어 보이는 시네필과 헬창은 그렇게 같은 위기와 고민 지점에서 만난다.


    아무리 해도 지우의 체력과 운동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지우 같은 애가 경찰이 되면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지우는 경찰 대신 지방 공무원에 합격했다. 건축 관련 업무라고 했는데 아무 흥미도 없다고 했다. ‘그냥 야근 없고 퇴근 제때 하는 걸로 만족해. 월급은 쥐꼬리여도 마음은 편해.’ 몇 년을 책 속에서 산 지우와 달리 나는 이제야 책을 읽으며 공부하며 산다. 독서는 이제 공부보다는 즐거운 습관에 가깝지만, 공부라고 생각하면 교양인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카페 갈 때 나는 책을 손에 들고 음료를 시킨다. 나는 책 읽는 사람이요 티를 내는 게 좋다. 글을 쓰면서도 나만의 색이 있다는 티를 내려고 분주히 읽고 생각한다. 근데 열심히 글감을 생각하다 보면 지우의 블로그가 떠오른다. 지우가 썼던 문장과 지우가 곱창집에서 떠벌렸던 얘기가 자꾸 내 글 속으로 침투한다. 지우가 헬스장에서 지나가면서 했던 말도 내가 한 말로 둔갑시켜서 글에 녹였다. 특히 늦은 저녁 침대에 기대서 뭐라도 적을 때 지우 말투로 글을 쓰는 나를 발견한다. 지우는 내게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으로 남았다.


 늦은 밤, 아무리 피곤해도 노트북을 펴고 문장을 이어 나가다 보면 기분이 나아진다. 스탠드 빛을 받으면 누추한 세간도 어여삐 뵌다. 내가 아는 일류 작가들도 퇴근 후에 이런 키친테이블 노블로 생계를 꾸렸다. 일찍이 잠자리에 든 가족 몰래 차를 끓이고 식탁에 앉아 뭔가를 적으며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그들처럼 나도 유머러스한 글을 쓰고 싶다. 지우처럼 웃기게 쓰고 싶다. 글을 쓴다는 게 예전처럼 신나는 모험이 아니라 그저 내 일이고, 이 일로 칭찬을 받을 수 있기에 기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더더욱 지우처럼 지루해지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 쓴 유머는 섹시하다는 지우의 말을 잊지 않는다.


 ᅠ한창때 쓰던 일기를 더는 쓰지 않는다. 한때 정말 열심히 쓰던 시기도 있었지만, 어이없이 쫑났다. 몇 해 전에 십 년 넘게 쓰던 일기장을 지하철 짐칸에 두고 내렸다. 역무원에게 간청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걸 누가 가져간단 말인가. 그 지질한 투정을 누가 보관해 준단 말인가. 난 거의 난동에 가깝게 지하철 직원들에게 따져 물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아냐고. 울먹이면서 억지도 부려봤다. 곁을 떠나보내는 푸닥거리였다. 처음에는 일기장이 사라진 게 팔 하나가 부러진 통증처럼 날 따라다녔다. 걸을 때마다 덜컹거렸다. 불쾌하고 초조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도 모르게 욕지기를 뱉었다. '시발. 시발. 아 제기랄.' 근데 며칠이 지나고 나니까 홀가분 해졌다. 쾌하고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매일 강박적으로 쓰던 글에서 멀어지니 아무거나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아무거나 쓰면서 산다.


 ᅠ매일 일기처럼 글을 쓴다는 이슬아 작가의 산문을 좋아한다. 예상외로 큰 감명을 받았다. 내용을 차치하고 일일 단위로 써낸다는 그 양에 경악했다. 그 정도 분량을 매일 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난 질보단 양을 믿는 쪽이라 우선 원고지 15매가 훌쩍 넘어가면 감복한다. 이슬아 작가가 운동을 꽤 열심히 한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 양을 쓰는 걸 보면 체력도 대단한 모양이다. 믿을만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도망칠 구석 없이 몰아붙이는 전사처럼 보였다. 그가 펴낸 두툼한 단행본을 만져보며 경애하는 마음을 품었다. 나의 과거, 기억,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이 정도로 쏟아내려면 얼마나 시간을 멈춰 세우고 문장을 떠올려야 할까. 그는 근면한 노동자처럼 썼다. 게으름을 멀리하는 운동인이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누군가의 글을 반복해서 읽으면 그 생각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그건 맹목적인 구석이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를 추종하게 된다. 내겐 지우가 그랬고, 최근에는 이슬아 작가도 내 뇌로 침투했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품질은 잘 모르겠고 양이라도 가득 채워서 승부를 봐야겠다. 체력은 자신 있으니까.


 ᅠ누군가 카페 문을 닫지 않고 나갔다. 쌀쌀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바깥공기가 서늘해지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쓸쓸해졌다.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길 듯한 저녁 분위기였다. 카페 안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한참 구경하다 보니 글이 쓰고 싶어졌다. 헐렁이는 옷차림과 분홍빛 재잘거림에 마음이 동했다. 겉보기에는 뻔해 보이지만 사실 꽤 남다른 그런 사람의 이야기. 시니컬한 유머가 심긴 섹시한 글. 우선 집에나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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