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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30. 2023

호환과 마마보다 무서운 것

    아침에 샤워하며 어젯자 뉴스를 듣는데 귀를 사로잡는 보도가 들려왔다. 회사 내부 정보로 투기한 이들이 도마 위에 올랐는데, 그중 한 신입사원을 붙잡고 한 인터뷰가 가관이었다. 입사한 지 6개월 된 그는 거액의 빚을 내서 신도시 예정지에 투기했다. 땅 값이 올라 앞으로 벌 수 있는 돈이 평생 월급보다 많을 거라고 장담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회사에서 잘려도 무관하다고 했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어차피 평생직장도 아닌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떤 비난도 상관없어 보였다. 도덕적 손가락질은 잠시뿐이지만 부동산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명예나 품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지만 통장 잔고는 확실한 물증이니까. 심신 안정과 여유로운 노후까지 고려하면 그깟 한시적인 비난쯤은 감수하겠다는 투였다. 누군가는 한몫 챙긴 저이의 삶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도리질을 치며 내 머리가 부러움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자세를 고쳐 잡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다시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그가 한 호방한 말들이 종일 귓가를 맴돌았다.


 ᅠ얼마 전에 읽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에세이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인터뷰한 신입사원의 속내가 이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저 노예처럼 사는 게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긋지긋한 출퇴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내가 돈 많은 부자가 되길 애초에 꿈도 꾸지 않은ᅠ 경우라면, 그는 어떤 방식이든지 수저 색을 바꿀만한 돈이 필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와 나는 다르니 완전히 이해할 순 없다. 나는 불로소득과는 무관한 삶을 택했지만, 그는 한몫 챙겨서 일확천금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었을까. 노동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모멸감과 열패감을 피하고픈 욕구가 검은돈의 유혹으로 이어졌을까. 생각해 보면 그와 나는 부모님 세대가 땅 투기로 운명이 갈리는 건 목도한 세대 아닌가. 자라면서 그놈의 강남 타령을 안 들어본 사람이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진짜 나쁜 건 왜 우리 부모는 왜 저 강남에 땅 한 뙈기 사지 않았을까 원망하게 만든 우리 사회 구조에 있다. 부정한 투기를 저지른 신입사원은 어쩌면 그 구조의 희생양일지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제독 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성과를 중시하는 시대의 불안을 섬세하게 적은 이 책은 한때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사회를 억지 긍정의 신호를 스스로 주입하는 착취 구조로 분석했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집단주의 문화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우린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단 가치를 우선시하는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개개인은 반발감은 최대한 누르고 찍소리 없이 조직의 지시에 순응했다. 밝고 낙천적인 태도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식으로 웃겨 넘겼다. 이런 분석은 한창 사회에 불만이 많던 내 반골 기질을 자극했다. 난 순순히 지난 세대가 만든 시스템 안에 갇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난 누구보다 열심히 출퇴근을 반복하며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요즘 보면 긍정주의를 탑재한 예스맨의 시대도 이제 저물어 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좋다고 나서면 혹사당한다. 별로 주지도 않으면서 희생을 강요한다. 오히려 칼 물고 대드는 이들이 제 몫을 찾아가더라. 이제 성과만을 위해 회사에 희생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직은 내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걸 부모 세대를 보며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주위 친구들은 근거 없는 희망을 혐오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굴다가는 팩트 폭행에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대책 없는 노력을 강요하면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다. 이제는 명분이 있는 과정을 중시한다. 짙어진 개인주의가 서로 간의 거리를 벌렸고, 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맥락과 당위를 마련한 사람은 목소리가 커졌다. 최근 독서를 하는 사람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같은 흐름 안에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매체는 말할 것도 없다. 내 목소리로 자신의 삶에 당위를 부여하는 과정은 이 피로한 사회에서 남다르게 살 수 있는 자양강장제다. 다른 이가 아닌 스스로 이해하기 위한 자기변호다.


 철학자 한병철은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책도 썼는데, 여기서는 피로사회에 이어서 사랑에 닥친 위기를 점검한다. 어떻게든 실적을 내라고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관계가 앙상할 수밖에 없다. 친구를 사귀고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큰 노력을 요한다. 나만 해도 나 자신과 맺은 관계가 다른 어느 관계보다 중요하다. 한병철은 타자를 잘 모르는 요즘 우리 세대를 집단적인 우울증으로 진단한다. 대면 상황을 피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자신만 보려는 것이다. 그건 이기주의나 자기애 따위가 아닌, 디지털 미디어가 대체한 또 다른 국면의 관계성이다. 나는 속도전에 올라탄 정신없는 생활에 점차 지쳐가고 있다. 과거엔 일에 완전히 파묻힌 도시인이 번듯해 보였지만, 이제는 잘 길든 노예로 느껴진다. 잠시 멈춰 세우고 즐길 만큼 즐기자는 목소리에 귀가 더 열린다. 어릴 적에 지겹게 듣던 '내 집 마련의 꿈'이라는 말도 더는 내 가치에서 사라졌다. 시제가 미래에서 현재로 이동했다. 가족과 연인과의 관계는 미래를 담보하지만, 관계가 옅어지니 더는 달력을 넘겨보지 않는다. 막연한 미래보다 오늘 밤을 더 중시한다. 취향을 위해 투자하고, 닥치지도 않은 일로 고민하지 않는다. 불안감의 기저에 미래를 향한 궁핍함이 엄연하지만 더는 고민해도 달라진 건 없음을 알기에 되도록 잊고 산다. 모든 시제를 눈앞까지 끌어당기자 무턱대고 적금을 들기보다는 우선 값진 경험을 사기 시작했다. 그 경험에 타자가 없다는 건 한병철의 말대로 우울한 일일까. 내 생각에 작가의 말처럼 병적인 나르시시즘은 아닌 것 같다.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금전과 시간이 드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잘살아 보려는 하나의 생존 방식에 가깝다. 물론 에로스가 사라지면 슬프겠지만 어쩌겠는가. 우선 살고 봐야지.


 내 주위에도 퇴근하면 카페에서 간식을 먹고 헬스장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이 이제 여럿 보인다. 헬스장에 들어서면 나만 이러고 사는 게 아니라는 동지애가 깔려있다. 그들은 그렇게 우울해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다 적응한 눈치다. 뉴미디어는 레거시 미디어가 강요해 온 삶의 구태의연한 규율을 색색깔로 물들였다. 남에게 피해 안 주는 범위에서 내키는 대로 살면 된다고 뜻을 모았다. 피로사회라는 말에는 조용한 사직으로 응수하고, 안정된 직장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난 지 오래다. 공적연금이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며, 미래의 나를 구제할 수단은 오직 내가 축적한 나라는 자본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다. 오래 다닌 직장에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목숨을 끊은 어른을 보며 자랐다. 자신이 누구보다 부모의 등골을 빼먹은 브레이커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과거에 인맥이라고 불렸던 우정과 사랑도 이제 소비재가 되어버렸다. 투자한 만큼 돌려받지 못하기에 이목을 끌지 못한다. 생존을 누구보다 더 생각하기에 보기보다 냉정하고, 의미 없는 술자리에 끌려다니지 않아서 딱 보기에도 건강하다. 그게 피로사회와 에로스의 종말을 견뎌내는 요즘 방식이다.


 ᅠ부모님이 박봉을 쪼개 적금을 붓고 그걸 아파트 중도금으로 넣어 내 집 마련의 감격을 이루는 걸 옆에서 목격했다. 그런 대하드라마에는 인고와 고난의 세월이 존재한다. 나도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요즘 변화하는 추세를 보며 나로서는 달가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다. 번듯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에서 놓여났다. 운 좋게 시류에 잘 올라타 '혼자'라는 가치를 보장받았다. 거창한 포부 없이도 조용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내 집 마련은커녕, 향후 십 년 후도 잘 모르겠지만 대신 책을 떠받들며 산다. 통장 잔고보다 문화 자본에 투자하고, 무형의 가치를 더 우선시한다. 과거엔 건물주가 부러웠지만, 지금은 신형철 같은 미문가를 더 우러른다. 물질을 중시하는 풍조를 속물로 치부하기보다는, 물질에서 우위를 가질 가능성이 없으니 더 늦기 전에 포기하고 정신의 생산으로 눈을 돌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ᅠ가끔 멋들어진 집에 가면 나도 투자해야 하나 압박을 받기도 한다. 경사진 지붕이 앞쪽 벽을 따라 높은 창문으로 이어지고, 채광이 좋은 큰 복도에 빛을 받아들이는 걸 구경하는 가족들. 해가 호를 그리면 빛이 벽을 씻어내려 모두에게 비춘다. 심지어 거실에 있는 작은 가구도 다 짜 놨다. 창문이 있는 서쪽 벽 앞을 작업실로 만들어서 거대한 탁자를 놓고, 거실 귀퉁이에는 소파와 커피 탁자가 놓인다. 침실에는 우리 둘을 기다리는 커다란 침대가 있고, 벽 쪽엔 붙박이 책꽂이가 내가 책 좀 읽는다는 걸 뽐낸다. 난 천천히 걸으며 성공의 맛을 음미한다. 하지만 이런 집을 소유하는 꿈도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다 깨졌다. 왜 이런 꿈이 없겠는가. 하지만 앞서 꿈을 이룬 자의 속내를 잘 들어보니 아파트 분양권이 복권인 줄 알고 긁었다가 십 년 넘게 대출금을 갚고 있었다. 아파트가 거의 국교에 가까운 나라에서는 오히려 무신론자로 사는 게 히피나 집시처럼 자유롭다는 걸 깨달았다. 고작 서울의 작은 평수 아파트 하나 사려고 청춘을 허비하느니 난 그 시간에 세계문학전집이라도 하나 더 읽으련다.


 ᅠ친구들이 하도 불러대서 술자리에 가면 친구들과 주식, 차, 아파트 분양권, 비트코인 그리고 곧 값이 치솟을 땅 얘기를 한다. 이럴 거면 왜 부른 거냐고 묻기도 전에 주제가 휙휙 변한다. 나는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먹태나 씹고 앉아있다. 나는 잉여의 얘기를 더 좋아하니까. 난 판을 깨며 이번 주에 개봉하는 영화 소식을 전한다. 애들은 잘 들어주는 척하다가 다시 아파트 얘기로 흘러간다. 나는 틈이 나면 녀석들의 연애 얘기로 전환하려고 입맛을 다시지만, 애들은 대놓고 내 말을 일축하고 다시 우량주에 관한 얘기로 돌아선다. 나는 포기한 채 등을 소파에 기댄 채 그냥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10년을 훌쩍 넘긴 샐러리맨을 청산하고 노매드처럼 세상을 떠돌며 소박하게 살 순 없을까. 아파트도 차도 땅도 다 필요 없는데. 최근 넷플릭스에서 미니멀리스트에 대한 콘텐츠를 찾아보고 있다.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의 조언에 따라 틈만 나면 세간을 갖다 버린다. 감당해야 할 노동을 줄이기 위해 소비 규모를 줄이는 데 신경을 쓴다. 매일 책을 읽고 헬스장에 가서 샤워하고 유유낙낙 이런 글이나 쓰려면 상시 최소 사양을 유지해야 한다. 소비 욕구를 줄이는 건 힘들지만, 하고 싶지 않은 걸 안 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ᅠ월급을 받는 사무실, 방세를 내는 자취방, 커피를 주는 스타벅스 외에 내가 유일하게 매월 세를 내면서까지 사용하는 공간은 헬스장뿐이다. 사무실 자리도 좁고 방도 좁고 스타벅스는 우글거려도 헬스장은 항상 내게 한갓진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물론 새해가 되거나 여름휴가 시즌이 오면 헬스장도 득실거리지만 내가 다니는 헬스장은 낡아서 그런지 늘 여유롭다. 내가 이 대도시에서 한적하게 사유할 수 있는 드문 장소다. 나는 프레데릭 바지유라는 작가의 <콩다민가의 화실>이라는 그림을 좋아하는데, 1870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내가 느끼기에 바지유가 작업실을 자랑하려고 그린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쳤던 바지유는 모네, 마네, 르누아르, 시슬레 같은 화가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즐겼다. 그의 작업실은 창문이 높고 벽에는 건강한 여자의 나체화가 걸려 있다. 어쩜 예술가에게 꿈과 같은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창문으로는 파리의 값비싼 주택이 눈에 들어오고, 그의 왕성한 창작욕을 자랑하듯 벽마다 작업하던 그림을 세워놓았다. 난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내가 헬스장을 바라볼 때 느끼는 부유한 감각을 떠올린다. 헬스장은 없이 사는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사치니까. 나이키 운동복을 입고 놀이동산에 간 사람처럼 기구를 타며 유랑하는 행위에서 유한계급의 마음을 이해한다. 헬스장은 나에게 있어 벨에포크 시대의 살롱이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호환과 마마가 아니라 권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책과 영화가 지루해지면 어쩌지. 하루아침에 글이 쓰기 싫어지면 난 뭘 믿고 살지. 삶을 이루는 사상적 기반이 부실하면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요즘 현대미술 책을 종종 읽는데 어렵지만 다행히도 파고들 만한 틈새가 있었다. 취향은 근력처럼 노력할 때 조금씩 옆으로 벌어진다. 근데 어떤 책을 펴봐도 현대미술의 시작은 세잔이라고 하더라. 고흐랑 피카소가 아니고? 세잔은 누구에게나 존경받고 영향을 끼쳤던 사람으로 소개된다. 조용한 생활과 사색을 즐겼던 폴 세잔은 생빅투아르산 위에 올라가 경치를 한없이 구경했다. 그는 정물을 볼 때도 그 향기까지 볼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세잔은 꼼짝하지 않은 채 눈이 머리에서 튀어나올 때까지 그저 바라만 봤다. 그는 말했다. "풍경은 내 속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세잔은 조용한 공간에서 편한 옷을 입고 모든 걸 멈춰 세운 채 어느 데도 시달리지 않는 상태로 살았다. 땅 한 뙈기 없이도 잘 살았단다. 그래 오늘부터 내 모토는 세잔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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