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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25. 2017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

생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생존자, 데렌스 데 프레 저

생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미국인 테렌스 데 프레의 저서 <생존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는 내게 하나의 물음이었다. 굳이 왜 한가한 주말 오후에 수용소의 삶을 읽어야 하는가. 늦잠을 자 시간이 더욱 촉박한 토요일 오후 두 시, 이왕 카페에 앉아있다면 재밌는 소설이 제격일 텐데. 가방 안에 벌써 김중혁 작가의 신작도 있다. 그렇게 무심하게 읽어 내려간 <생존자>엔 많은 밑줄이 처졌다.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없다. 그저 수용소 안에서도 여전히 흥미로운 인간들의 군상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복하고 만다. 그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소련의 수용소에 갇힌 한 남자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음이란 영원한 망각이다. 따라서 인간의 근본, 다시 말해 인간 정신의 불멸에 대한 확신은 음 앞에서 위태롭게 된다. 그래서 최대의 공포는 한 사람도 안 남고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우려였다.

똥과 시체가 널려있는 수용소 안에서 죽음은 눈 앞에 엄습하는 실존이다. 이성적 사고를 말살하고 상상을 넘어서는 더러움, 인간다움을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인간성의 몰락. 하지만 책에서 내가 만난 수용자들은 공포는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여기 이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세상과 작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망각에 대한 공포는 죽음 그 너머의 것이다. 그래서 생존자들은 자그마한 빛이라도 보일라치면 자신의 인생을 기록했고, 글을 쓸 줄 아는 작가가 보이면 그의 기록 행위를 위해 희생했다. 수용자 자신에 관한 죽음의 기록이 다른 이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했다. 그렇다면 내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그들의 삶을 기억한다면 스스로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존자>를 읽어 내려가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내가 만약이라는 헛된 가정이다. 나라면 수용소 안의 인간성의 말살 현장을 앞에 두고 자살하지 않았을까. 좀 더 오만하게 난 묻는다면 "왜 그들은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자신들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과연 어떤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삶의 존엄을 기록하기 전까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존자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책에 적혀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아래 두 영화를 통해 상상해본다.


영화 Gravity, 2013

지구로부터 600km, 소리도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허블 우주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하던 스톤 박사는 폭파된 인공위성의 잔해와 부딪히면서 그곳에 홀로 남겨진다. 영화 <그래비티>에서 홀로 우주를 표류하게 된 여인은 죽음을 갈망한다. 고요한 우주라는 캔버스에서 하얀 점으로 남는 것을 당연하듯 받아들인다. 그녀는 사고로 아이를 잃었고, 세상 앞에 혼자였기에 미련이 없다. 그런 그녀를 다시 삶의 영역으로 잡아 끈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삶의 의심할 수 없는 증거는 그녀가 우주 속에서 홀로 표류할 때 비로써 선현히 나타난다. 그녀는 다시 살고 싶다며 몸부림친다. 몸의 근육, 눈빛의 생기, 의지의 꿈틀거림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영화 초반 자신을 구하려다 멀어져 가는 남자(조지 클루니)는 점에서 완전한 '없음'으로 희석되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명처럼 머리를 두둥실 떠다닌다. 당시 극장 안에서 영화를 보며 <그래비티>가 들려주는 검은 우주의 목소리가 어떤 방식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난 그저 스크린을 보며 목소리를 상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감정의 실마리는 <생존자>를 읽으며 비로소 풀리고 있었다. 내 존재를 의식하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세상은 여전히 살아갈만한 것이다. 내 목소리가 여전히 유효한 세상. 수용소에서 생존한 이들은 기록과 유언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증언했다. 그들에겐 삶의 이유가 그것이기에.

그래비티 Gravity, 2013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에 의하면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건 인간 본연의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 스톤 박사가 우주에 가기 전 삶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결기는 모든 것이 부재할 때야 비로소 나타난다. <생존자>에서 나치 지배 아래 죽음에 놓인 유대인들의 이야기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서도 제국 전체를 뒤져도 구하기 힘든 책들을 보유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세계의 예술이 그 어둠 안에 모여든다. 자신의 먹을 것을 희생해라도 기록물을 읽고 또 읽는다. 생존과는 무관한 글자와 이야기지만 전국 단우의 폐지수집운동에서 그것들을 구출했다. 결국 생존자들은 야만의 세상에서 문명이 사라지지는 않을지 두려워한 것이다. 자신의 기록을 넘어 세상이 구축한 지적 체계의 붕괴를 우려한 것이다. 그렇다면 단 1퍼센트도 생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안 것이다. 자그마한 빛 앞에 모여들어 한자라도 더 읽기 위해 몸을 수그리고 있을 생존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참혹할 만큼 더러운 옷과 냄새 그리고 배고픔의 흔적들을 이겨내고 탁한 눈으로 글씨에 의미를 더해가는 모습들.

테렌스 데 프레는 죽음을 코앞에 둔 생존자가 굳이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보편적 힐난 앞에서 활자로 답을 한다. 왜 살아야 하는가의 가장 큰 추동력은 활자적 생존인 것이다. 기록하는 사람과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사람. 내게 생존자와 그래비티는 우주의 미아가 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들렸다. 우주의 미아가 될 것을 거부하고 건강한 다리로 흙을 밟고 일어선 스톤 박사의 뒷모습은 끝내줬다.


The Act of Killing, 2013

지난 주말 <액트 오브 킬링>을 볼 수 있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 군부가 민간인 200만을 학살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이 다큐의 특이한 점은 가해자가 주인공이고, 가해자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황당함은 분노를 넘어선 실소를 자아낸다. 자신들의 행동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의 살인을 재연하고, 멋들어지게 포즈도 취해본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들은 얕은 눈으로 숨죽인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가해자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악행을 떠들고 다녀도 그에 대항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이 해 보이는 재연 행위에 돈 몇 푼 받고 등장해 상처를 다시 헤집는다.

세계의 학살은 사후 재판을 통해 그 가해자들의 숙청이 이루어졌다. 독일도 소련도 그 밖의 어느 국가도 완전하지 않지만 그렇다. 적어도 악이 무엇인지는 밝혀진 셈이다. 그것으로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으나 반성이 뒤따라 옴에 마음을 놓는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악의 전이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들은 올바르다고 판단되는 역사를 잡아내지 못했다. 아직도 뒤처진 죄의식의 발현을 묵묵히 지켜보는 중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을 소거하듯 영웅주의에 도취한 학살자들이 살인에 당위를 부여했다.

영화 액트 오브 킬링

테렌스 데 프레에 의하면 생존자의 가치는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존재를 가진다 했다. 하지만 이에는 몇 가지 조건들이 달린다. 기록을 남기고, 스스로 배워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하여 과거를 다시금 새로운 국면으로 제시할 것. 그것이 억울한 죽음에 대한 생존의 예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공포에 질린 인간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기록하고 역사가 남긴 유물을 읽어내는 행위를 놓지 못한 것은 사후에 평가받게 될 역사의 흐름을 의식한 것이다. 읽지 않고 기록하지 않는 사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현대의 증명이 이 다큐멘터리에 있다. <액트 오브 킬링>은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가 던진 물음에 대한 <그래비티>가 소박한 대답을 다시금 전복시키는 괴멸이다. 가까스로 답한 의뭉스러운 고민들을 다시금 내가 사는 지금의 이 현실로 끌어내리는 영화다. 어쩐지 이 학살자들의 목소리는 내 귓가를 떠나질 않는다. 아침 9시부터 시작되는 나의 일상이 지금 이대로 흘러가 죽음에 다다르게 될 때까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비교적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의문들이 영화 속에 끓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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