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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25. 2017

영화는 질문이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정성일 역


대학시절 난 김기덕의 인터뷰집을 읽은 적이 있었다.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이란 제목을 단 책이었다. 이 책은 내겐 조금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시뻘겋고 두꺼워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드는 책이지만, 저자인 정성일 평론가의 끈덕진 인터뷰와 심도 있는 글로 빼곡해 정통 평론을 맛볼 수 있다. 내가 생전 처음으로 "아 이게 영화비평의 재미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이 시점부터 블로그를 운영하고 글을 쓰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론 인연이 있는 셈이다. <야생 혹은 속죄양>은 당시 <빈집>, <사마리아>로 충무로의 주변인으로 불리던 김기덕이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던 차에 출간됐다. 그 당시 난 언론과의 인터뷰조차 거의 하지 않는 김기덕을 향한 궁금증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의 수상 모습을 TV로만 보던 차에 이 책을 알게 되었고, 도서관에서 냉큼 빌려와 카페로 갔다.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저자 정성일, 김기덕

위악적 설정과 메시지만 유독 돌출되는 김기덕표 영화의 열렬한 팬은 아니다. 그저 예술가로서 자신의 인장이 굵은 이 사람의 영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았을 뿐이다. 내 생각에 그의 영화 속엔 오로지 정교하게 스케치한 한 폭의 그림이 있다. 역자 정성일 영화 평론가를 비롯해, 기자, 배우, 제작자, 평론가, 작가, 시인 등이 김기덕을 향한 질문과 생각을 쏟아내지만, 사실 일축되고 만다. 왜냐면 김기덕 자신이 그것을 설명할 용의가 없기도 하고, 한 폭의 그림이 서술로 설명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김기덕은 영화가 끝내 그려내는 하나의 그림을 위해 이야기의 구조를 어그러뜨린다. 아니 이야기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래서 타인의 의견이란 결국 영화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다양한 해석과 추측이 상존하는 그의 영화는 말할수록 더 흥미롭다.

내가 정작 불편한 것은 세상에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태도다. 여러 명이 있는 자리에서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줄 알고, 김기덕에 대한 의견을 묻는 사람들이 꼭 있다. 김기덕의 영화가 자신은 불편한데 내 생각은 어떠한지 묻는다.  그에게 대답은 자명한데 네 생각은 그저 동의를 구하기 위한 절차인 것이다. 그가 내게 기대하는 대답은 '아 걔 영화 쓰레기 안 봐' 정도일 것이다. 난 그에게 이런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대답한다. 내게 김기덕은 한국 영화에서 고유한 인장이다. 그런 사람이 생존해서 살아가는 영화의 생태계가 건강하다고 믿는다. 한국 영화계를 충무로라는 틀이 아닌 야생동물 보호구역으로 확장하는 사람이 김기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은 영화적 저널리즘의 상태에서 분석한 몇 안 되는 소중한 책이다. 

김기덕의 영화들

김기덕 하면 떠오르는 상징이 있다. 창녀와 포주(나쁜 남자, 파란 대문), 근친상간(뫼비우스), 무자비한 살인(야생동물 보호구역, 악어, 해안선), 납치(일대일), 원조교제(사마리아)가 대표적이다. 절대적 악을 심판하는 데는 그 잔인함이 극도로 치닫지만, 정작 죄 앞에 선 연악한 인간들의 평범한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악의 처벌에 바치는 제물로 지워진다. 그 불편한 뒷맛에 김기덕의 영화는 한 번 보지만, 다시 보기 힘든 불편함으로 드러난다. 물론 예외인 경우도 있다. <빈 집>, <봄, 여름, 가을 , 겨울 그리고 봄>, <비몽>과 같은 영화들이 가진 예술적 활력이 그렇다. 하지만 문제는 최근 작품들이다. 뼈대만 드러난 그의 영화가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이 떠오르지 않는 영화에 적절한 답이 떠오를 리 없다. 최근 영화 <그물>에서는 조악한 연기 연출과 대사의 지적인 수준에서 실망감을 가졌다. 단선적인 메시지와 위악적 상황 연출이 극장 안 의자를 극도로 불편하게 했다. 

최근 '김기덕 필름'을 통해 김기덕 감독이 후배들의 작품에 제작과 각본, 각색, 기획, 미술에 가리지 않고 참여하는 것을 보면 즐거운 마음이 든다. <신의 선물>, <배우는 배우다>, <붉은 가족>, <풍산개>, <배우는 배우다>, <아름답다> 등이 김기덕 필름이 남긴 작품들이다. 비주류라고 봐도 무방한 작품이 대다수지만, 깜짝 히트작도 몇 개 남겼다. 내가 이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김기덕의 영화들이 가진 파괴적인 내러티브가 후배 연출자들의 특성과 버무려지며 다른 샛길을 찾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완성도를 떠나 김기덕의 독특한 영화 세계에서 파생된 더 깊은 뿌리처럼 느껴져 김기덕이라는 세계를 더 풍성하게 보이게 끔 한다. 

김기덕의 영화들

<야생 혹은 속죄양>의 인터뷰는 김기덕 필름이 지향하고 있는 영화적 세계에 대한 대답이다. 이 책을 읽은 이후 김기덕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지켜봐왔다. 비평과 언론은 지속적인 해석으로 그를 뒷받침했다. 전문기자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책, 평론가가 마음껏 자신의 질문과 의견을 내보일 수 있는 자리. 김기덕이라는 맥락을 이해하고, 그에 파생된 콘텐츠를 지켜볼 수 있는 뿌리를 파내서 베어 먹어 본 느낌이다. 이 책이 출간된 2000년대 초반은 비평 문화에 대한 존중과 텍스트로서 만들어지는 담론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이 저널리즘에 팽배한 시절의 일이다. 영화잡지들이 수차례 폐간되는 현재로써는 다시 맛보기 힘든 기획임에 분명하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시간, 그 영화의 비밀, 이동진 저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을 읽은 지 정확히 십 년쯤 지난 현재 한국 영화계는 천만 관객 영화가 넘쳐 난다. 연간 누적 관객 1억 명 돌파를 밥 먹듯 해내는 충무로는 발전을 거듭해 온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저널리즘은 발전했을까. 이제 평론가의 비평을 보며 영화적 해석을 확장시키는 경험은 없다. 오로지 즉물적 재미와 점수, 별점이 기능하는 세상이다. 영화를 글로 읽는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치열하게 적고, 영화인을 인터뷰하고 여전히 관객들과 대화하는 사람이 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부메랑 인터뷰>라는 2권의 인터뷰집을 출간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최근의 비평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우문현답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영화와 다르게 문학은 여전히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고유한 아우라를 획득했다. 누구나 읽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유도 알지 못한 체 문학이 삶에 도움이 된다고 자부한다. 책이라는 매체는 문장의 연상작용을 연이어 해내야 하는 피곤한 일이다. 상황, 인물, 예측을 동시에 해야 하는 다분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문학은 또한 가장 원형의 이야기를 말한다. 세상이 남긴 이 인간 갈등의 원형에는 생각과 담론이 필수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문학을 섭취함으로써 그 갈등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곧 삶에 대한 의식을 지속적으로 잘게 다듬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세상은 문학을 읽길 권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못하다. 영화는 이야기를 스쳐 지나간다. 프레임의 세계는 이미지와 서사의 편안한 흐름이다. 편안한 의자에 앉아 연출이 의도한 화면으로 몰입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관객이 체감하는 좋은 영화란 과정이 재밌는 영화를 말한다. 그 이후는 맛있는 저녁 약속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좋은 영화에 대한 내 정의는 좀 다르다. 관람 후 다름 이야깃거리를 생각하게 되는 영화다. 평론의 영역에서 말하자면 분석할 거리가 투성인 영화가 좋다. 저녁밥을 먹다가도 문득 생각나 상대에게 자신의 느낌을 토로하게 만들고, 영화 저널리즘에선 관객에 화답하듯 다수의 리뷰를 싣는다.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영화에 적당한 질문을 하고 답함으로써 관객과 담론을 공유하는 행태가 이상적이다. 현재로서 영화에 깊이를 강요할 순 없지만, 새로운 비평적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고 내가 믿는 이유다.

박찬욱, 최동훈, 이명세 감독, 출처 : 이동진  부메랑 인터뷰

역설적으로 각종 블로그와 SNS의 일반인 평자가 그 역할을 하면서부터 전문 비평이 홀대받기 시작했다. 지루함으로 대표되는 저널리즘 리뷰들은 완전히 묻혔다. 누구나 다 서사로 영화를 이야기한다. 그런 와중에 이동진은 남과 다른 방식으로 관객에게 접근했다. 굳이 글로 쓰지 않아도 영화비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영화 상영 후 관객과 대화하는 각종 시네마톡을 비롯해, TV, 라디오 패널을 통해 말하는 영화비평으로 활동한다. 글이 아닌 말이다 보니 전문용어를 제거하고, 짧은 시간을 이용해 요점만 간단하게 정리하는 설명뿐이지만 소중하다. 그의 가장 큰 힘은 관객이 쉽게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각해야 될 것을 정리하게 도와주고, 더 깊은 지점까지 영화를 이해하는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는 그가 현재 관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의 실현이다.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 <그 영화의 시간>은 박찬욱, 봉준호, 이명세 등 한국영화의 대표적 감독들에 대한 장문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물론 평론집이 아니다.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처럼 비평문학을 다루지 않는다.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의 대사들과 연계된 질문을 선정하고, 그에 대한 감독의 변을 들어보는 것이다. 책의 표지만 봐서는 영화감독들의 의견만 들어보는 감독 중심의 글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동진의 질문이다. 저자가 측정해 놓은 전개와 범위대로 질문을 이끌고, 그 방향에 따라 영화를 분석하는 행위가 핵심인 작업이다. 즉, 여러 개의 웅덩이를 파서 결국 영화의 핵심에 이르겠다는 것이 전략이 된다. 감독은 절대적으로 이런 의도를 가지고 연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동진은 대답에 보태 또 다른 질문을 붙여 사실상 다른 해석도 가능함을 주저 없이 발언한다. 한 예술을 대할 때 질문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해석은 방사형으로 흝어진다. 꼭 연출자가 의도한 것이 관객에게 스며드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또 다른 해석과 개인적 사유를 동반한다. 이동진 평론가는 그 수많은 질문을 통해 얻은 흝어진 생각들을 통해 영화 세계를 더욱 확장시킨다. 작가의 일방통행식 주입에서 벗어나 질문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이동진이 생각하는 영화의 본질처럼 느껴진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영화비평에 대한 그리움이 다각도의 인터뷰를 읽어 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날 습격했다. 난 습득하는 영화에만 익숙해져 정작 능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태도를 완전히 잊고 살았던 것 같다. <홀리 모터스>에서 레오 까락스가 잠에서 깨어나 방문을 열었을 때 가득 찬 극장 안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는 이것이 예술을 접하는 본인의 태도임을 말한다. 영화란 내 삶 어느 시간에나 존재하는 사유의 대상이다. 관객은 실존하고 영화관을 통해 영화와 한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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