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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19. 2017

단편소설의 모든 것

대성당 Cathedral(1983), 레이먼드 카버 저

17살의 소년은 땀을 뻘뻘 흘리며 동생을 데리고 도넛 가게로 들어선다. 낚시를 한 모양인지 얼굴은 검게 타보였고, 동생이 귀찮기만 한 듯 거칠게 문 안으로 밀어 넣는다. 소년은 옆구리 살이 반팔 셔츠를 삐져나올 정도로 뚱보였다. 하지만 얼굴은 귀엽게 생겼고, 가방에는 소설책 한 권이 있다. 이 소년의 이름은 '레이먼드 클레비 카버'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문학을 좋아하고, 오후엔 글쓰기 강좌를 다니며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재즈 레코드를 사서 모으고, 맥주와 담배를 시시때때로 즐기며 지금 나이가 가질 수 있는 힘을 과시하며 걷고 있다. 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소년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마르고, 곱슬머리에 늘씬한 몸매를 가진 15살의 '메리앤'은 도넛 가게를 들어오는 키가 큰 뚱보를 유심히 지켜본다. 동네에서 매력적인 외모로 여러 남자들과 사귀어왔던 매리언은 응당 자신을 쳐다봐야 할 소년이 자신을 외면하고 탐스러운 도넛에만 시선을 두자 자존심이 상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았던 이 소년과 2년 후 결혼한다. 결혼 첫 해 '크리스틴'이 태어났고, 그 다음 해 둘째 '밴스'가 연이어 카버 부부에게 찾아온다. 이 행복해 보이는 부부에게 어둠이 드리워진 건 바로 '돈'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 캐롤 스클레니카 역

'레이먼드 카버'가 평생을 거쳐 단편과 시를 쓴 이유는 단순하다.(영미문학에서는 단편을 장편 문학보다 괄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단편소설은 <뉴요커>, <에스콰이어>와 같은 매거진에 기고하는 정도였다.) 빠르게 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작가 이외에도 글쓰기 강좌의 선생을 비롯한 투잡을 뛰며 늘 과중한 생계에 시달려왔다. 카버는 몇몇 인터뷰를 통해 17살의 이른 결혼이 자신의 삶을 변질시켰다고 밝힌 바 있다. 카버는 어느 기자가 '행복한가?'라고 질문하자 '언제부터?'라고 되묻는다.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시간도 장소도 부족했던 카버의 결혼 생활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최근 출간된 그의 평전 <레이먼드 카버-어느 작가의 생>(2009)에서 그 시절의 고단함을 엿볼 수 있다. 시끄러운 집을 벗어나고 싶을 때는 허름한 자신의 폭스바겐 차량 안에서 무릎 위에 공책을 대고 생각을 옮기다 새벽에야 집에 들어갔다. 그래서일까 카버는 이 시절부터 늘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차 한 대와 좁은 월셋집, 마당에 널려 있는 술병과 한 발만 잘못 디뎌도 파산이라는 나락으로 빠져들 것 같은 공포. 술은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탐욕이었다. 그는 결국 이혼한 후에야 술을 입에서 뗄 수 있었다.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 김연수 옮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내가 <대성당>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다. 갑작스러운 아들의 교통사고와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부부에게 걸려온 낯선 남자의 전화. 그리고 그 남자와 만나 따듯한 커피와 롤빵을 먹으며 위로를 받는 이 단순한 이야기다. 난 소설이라는 것이 이야기라는 세계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만큼 결정적일 수 있다는 데 회의적이다. 문학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소설을 통해 일상에서 소소한 도움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개소리는 도대체 누가 한 것일까. 레이먼드 카버가 단편소설로 단순히 생계만 꾸린 것처럼, 내게 카버의 이야기는 화장실 변기 앞에서 잠시나마 몸의 긴장을 풀 수 있고, 12시 내 침대 이불 안에서 더 안온한 잠자리를 위해 존재하는 별 것 아닌 것일 뿐이다. 카버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끔 저녁에 침대에 누워서 제인 그레이의 책을 읽는 것을 인상적으로 기억한다.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좁은 집구석에서 가정생활을 벗어나 아주 사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이 카버에겐 독서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미지였다. 세계적인 작가가 된 후에도 카버는 그 흔한 장식품이나 그린 한 장 없는 하얀 벽의 방 안에서 며칠씩 방문 금지 푯말을 걸고 글쓰기에만 몰두했다. 오로지 돈을 벌고, 이야기에 빠져들기 위해서. 그에겐 이야기와 생계 이외에 그 어떤 동경도 없는 삶을 살았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위로 역시 덧붙임이 없는 따듯한 빵과 대화의 안온함이 전부 다다. 아들의 죽음과 낯선 타인의 전화가 병치되고, 두 사람은 슬픔과 분노에 이어 절망을 느낀다. 죽음은 지나가고 사람들 서로의 오해를 풀고 뜨거운 찻잔에 노여움을 녹이는 것이다.

빵집 주인은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컵을 찾아 전기 커피메이커에서 커피를 따랐다. “아마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빵집 주인이 말했다. “내가 만든 따듯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들은 롤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앤은 갑자기 허기를 느꼈는데, 그 롤빵은 따듯하고 달콤했다.

아들의 죽음으로 처참하게 버려진 부부는 우선 몸의 허기부터 채운다. 그리고 나보다 더 나을 것 없는 인생을 사는 빵집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을 극복한다. 다다를 수 없는 신 앞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운명의 가혹함에 분노를 앞세우기보다는 지금 눈앞에 놓은 뜨끈한 빵에 손을 댄다.


어떤 일을 열심히 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한때 중요하다고 목을 매던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을 듯 덤비던 치기도 어느 순간부터 가치를 잃어버린다. 삶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고,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게 된다. 사태를 바로잡고 이 상황을 되돌리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그저 이 상황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재혼한 테스 갤러거과의 행복한 한 때

카버는 창작과정을 통해 혹독한 생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 소설이라는 세계는 오늘 출근길에 스쳐 지나가는 세계처럼 현실감이 엄습한다. 아마도 그가 17살 도넛 가게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름다운 소녀의 미소를 모른 척 지나쳤다면 좀 더 나은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생활고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단편을 읽을 수 있었을까. 카버가 마침내 경제적인 안정을 찾았을 때 첫 번째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카버는 실제 세계에서 직접 듣거나 목격한 어떤 요소를 적는다. 자신의 인생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카버는 자신의 이야기에 자전적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자의식을 이야기에 녹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자신과 같은 상상력을 가진 작가라면 그것이 세상에 직접적인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칸막이 객실>을 통해 본 바깥 풍경

아들에게 줄 선물을 손목시계를 사고, 프랑스로 가는 기차를 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칸막이 객실>은 다소 섬뜩하다. 그는 아들과 오랜만에 만날 계획이다. 어릴 적 전 부인과 이혼한 이후로 한 번도 보지 않고 살았던 아들이다. 재밌는 점은 그가 우연히 시계를 도난당하고, 어느 순간 문득 자신은 결코 아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믿어버린다는 점이다. 시계의 분실이 마치 기회라도 된 듯 그는 자각한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역을 그냥 스쳐 지나친다. 좌석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들을 상상한다. 못내 잊으려는 듯 기차 안에서 눈을 감는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수 있을까. 과거를 벗어나 오로지 자신의 행복만을 위한 삶. 칸막이 객실은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급히 출발한다.

이 작품은 카버가 자신이 가족을 영위하기 위해 10대 시절부터 쏟아낸 노력에 관한 우화처럼 읽힌다. 다시 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다는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그는 즐거운 취미로 하던 창작을 생계로 돌린 후부터 행복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식들이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여유 있게 삶을 관망해보지 못했다. 급급하게 이야기를 써낼 뿐이었다. 늘 돈과 술 앞에 무력했으며, 칸막이 객실의 사내처럼 즉흥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했다. 17살의 결혼, 이혼, 테스 갤러거와의 만남 그리고 대성당의 출간. 이혼은 그를 다른 방향의 인생으로 안내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업실

카버는 예술(소설)을 오락의 한 형태로 말한다. 그래서 카버는 소설의 숭고함을 말하는 질문들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작품을 추켜올리려 하면 거부감부터 보였다. 그에게 문학과 예술은 그저 릴케의 시, 버르토크의 음악처럼 그저 고양된 형태의 오락일 뿐이다. 문학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 예술은 사치이고 그것은 저 자신이나 제 삶을 바꾸지 않는다는 걸 그는 단편이라는 문학의 정수로 보여준 셈이다. 카버의 인생과 작품들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물론 그의 말처럼 여가로서 단편소설들은 손색이 없다. 하지만 더 그럴싸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야기를 통과하면서 나조차 인식하지 못한 변화에 대한 기대다. 당장 내일 아침 출근길이 밝아질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이야기 속 동네를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돌아본 마을 풍경의 안온함 속에서 난 무언가를 가져갈 거라고 믿어버린다. 때로는 술과 대마초에 의존해 살아갔던 이 불안정한 남자의 삶을 통해 문학과 인간을 생각한다. 그곳에선 여전히 무언가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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