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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19. 2017

신이 버린 인간들

눈먼 자들의 도시, Blindness, 주제 사라마구 저

내 10대 시절은 완전한 콤플렉스의 집합체와 같다. 늘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것이 10대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난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손사래를 칠 것이다. 늘 자존감이 넘치는 잘난 녀석처럼 연기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내 열등감을 보호하기 위한 껍질에 불과하다. 가령 누군가를 의식하는 나를 알아보고 부끄러워졌던 오늘 아침의 일이 그렇다. 처음 지하철에 올라 탄 후 내게 전혀 관심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의식한다. 우선 곧은 자세로 책을 펴 들고 읽는다. 그 짧은 출근 시간에도 현대의 지성인 흉내를 낸다. 죽어라 나오는 하품을 참고, 아침이라 피곤해서 감기는 눈을 붙잡고 있다. 아침부터 써야 할 보고서가 생각나 책의 글귀부터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끈덕지게 책장을 붙잡는다. 세 장은 읽었나, 끝내 고개를 떨구고서야 도리질을 친다. 내가 유달리 의식하던 옆자리 그녀는 사라진 지 오래다. 평소처럼 어제 유럽축구 영상이라도 볼 걸 했다. 콤플렉스와 열등감은 내가 바라는 이상형의 사람이 되라고 날 촉구한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난 늘 불안감에 시달린다.

캐나다의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책은 대학 사회학 전문서로서 널리 애용된다. 그는 학자로서 학문적 성취도 뛰어났지만, 연애 에세이스트로 다수의 히트작을 가지고 있다. 우선 연애 심리 이론을 다룬 <상호작용 의례>(대면 행동에 관한 에세이)에는 인터넷 수많은 블로그에서 왜 사람들이 연애에 대해 얘기하는지 그 연유를 알아볼 수 있다. 그의 이론을 과장하여 요약하자면 자신의 연애담을 포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빛이 나게 하고자 과장을 보탠다. 매 순간 한 사람을 앞에 두고 펼쳐지는 한 편의 연극처럼 자신을 포장한다. 플라톤은 일찍이 “인간 삶의 무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셰익스피어 역시 “이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배우일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다소 진부한 인용이긴 하지만, 어빙 고프먼의 저서들은 대면과 포장술을 설명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어빙 고프먼은 또 다른 저서 <자아 표현과 인상 관리>라는 이론서에서 ‘인간 행동은 보이는 전면과 숨기는 후면을 가진다.’라고 말했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그대로 표현되는 저속한 모습은 기술적으로 가리려고 한다. 이런 욕구의 억제를 통해 자신이 우월하게 보이고 싶은 상황에서는 포장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결국 드라마투르기에서 인물의 입체성을 부여할 때 겉과 속을 대비시키는 방법과 유사하다. “물론 이 세상이 모두 무대인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무대가 아닌 중요한 측면들은 찾기 힘들다.” 이러한 사회적 드라마투르기는 지속적인 자기 감시라는 피곤한 과정을 통해 내 앞자리 그녀 혹은 직장상사의 눈에 들려는 노력과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어떨까. 화장실에서는 뿡뿡거리고, 내 방 책상에서 휴지가 떠날 날이 없다. 나는 그 순간을 남에게 보일 수 없다. 마치 죽은 돼지의 살을 도려내 맛있게 구워 근사한 접시에 담으면 멋들어진 한 끼의 식사가 되듯이. 우리는 잔인하게 도살된 돼지의 시체를 알지 못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사실 책을 먼저 읽어서 다행이지 영화는 형편없는 각색으로 나를 화나게 했다. 하지만 영화에서 몇몇 장면들은 소설의 서브텍스트로서 기능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우선 갑작스럽게 눈먼 사람들을 도시의 감옥에 가두고, 그들이 일상에서 쫓겨나 격리된 괴물로 보이는 것들은 지워지지 않고 각인된다. 소설에서는 그저 관념적으로 눈이 멀어서 상태와 어쩔 수 없이 사회에서 떨어진 물리적 거리감을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우리 안에 가둬진 돼지들처럼 욕구에 충실한 맹인들의 모습은 날카롭게 의식을 파고든다. 그들이 흉해지는 이유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을 수용소에 가둠으로써 남도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 끔찍한 것이다. 그들은 눈이 멀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처음엔 울었지만, 후에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성을 남발한다. 그리고 그 화를 이제 사람들 앞에 펼쳐놓기 시작한다. 이 갇힌 공간에 인간의 모든 욕구가 엎질러지는 기분이다. 이는 인간 존엄이라는 것이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낮은 차원의 것들로 모멸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빙 고프먼이 살아있었다면 자신의 저서들이 말하는 사회 실험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환경이 된 것이다.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 보인다고 똥을 아무 데나 싸고, 안 보인다고 먹을 것을 빼앗고, 안 보인다고 성을 착취하고, 안 보인다고 불륜을 일삼는 인간들을 의미힌다. 철저하게 욕구에 휘둘려 죽음 앞에 무릎 꿇는 존엄들.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 2008

다른 생각도 한편으로 드는 게 사실이다. 내 눈이 멀어보지 않았음에도 눈먼 이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난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으니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돼지가 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단순한 논리는 죽음을 영웅시하는 서구 논리에 모멸된 시각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오히려 살아가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정한 존엄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을 모른 척한 것은 아닐까. 그저 눈으로 보이는 한심한 작태에 분노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순간에도 살아가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인간의 뒷모습을 왜 영화는 모른 척한 걸까. 영화가 은근한 불쾌감만 남기고 사라져 간 이유는 소설의 보이지 않는 화자가 서술해 준 그들의 입장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만 본다. 높이 걸려있는 가위를 지켜보며 저 무기를 빼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 시퍼런 흉기로 한 남자의 목을 찌른다. 피는 솟구치고, 너저분한 욕망을 내보이던 남자는 죽음을 맞는다. 사랑과 연민의 정신도 현실세계의 광란의 소용돌이 앞에는 무력했으며, 사람들은 단지 고통받는 영혼에 불과하다는 믿음은 사라진 지 오래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저자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용접공 등 갖가지 직업들을 전전하다가 1947년 25세의 나이로 <죄악의 땅>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그후 19여년간 공산당에서 활동한 이력이 있다. 그 결과 나라에서 추방된 후 세계 여러나라에서 번역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희곡, 시, 소설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발표한다. <수도원의 비망록>, <히카르투 헤이스가 죽은 해> 등의 작품으로 전성기를 맞았고 결국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타계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대표적인 무신론자이기도 하다.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죽어서 신의 분노를 사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답한다. "신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으면 신도 따라 죽게 되는 것이지요." 주제 사라마구는 과학이 이렇게 발전된 사회에서 어떻게 종교를 믿을 수 있는지 늘 공격적으로 의구심을 제기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카인>에서 구약성경의 일부를 재해석하여 구약성경 속 예수의 논리를 비판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신이 사라져버린 도시를 묘사하듯 그의 작품세계는 늘 묵시록적인 메시지가 가득했다. 염세적인 그가 과연 죽음 이후에 어떤 곳에서 몸을 뉘이고 있을지 내심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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