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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15. 2017

개츠비를 둘러싼 번역 논쟁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F. 스콧 피츠제럴드

난 <위대한 개츠비>를 '하루키'를 통해 알았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을 보면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라거나, "어느 곳을 펼쳐도 실망을 준 적이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중 2때 였는데 사실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인상적이지 못했던 <위대한 개츠비>를 직장을 다니면서 한 번, 이번 모임을 통해 또 한 번 더 읽었다. 지난 두 번은 김석희, 김욱동 번역가의 작품으로 읽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의 팬심으로 읽는 것도 있다. 


몇 해 전 한국 문학계에 때 아닌 번역 전쟁이 발발했다. 이 논란의 중심에는 스타 소설가 김영하가 있다. 시작은 김영하가 문학동네를 통해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본을 출판하며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홍보문구(책의 띠지)에는 김영하의 사진과 스타 소설가 김영하의 번역이라는 홍보문구가 굵게 새겨져 있다. 이것이 새로운 이유는 한국 출판계에서 번역을 통한 홍보는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김영하 작가의 팬들이 그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를 기존 번역본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그 후속판으로 김연수 작가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을 번역한 ‘대성당’이 출판되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게 없었는데, 김영하 작가가 쓴 역자의 서문에 민감한 내용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증폭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작품을 번역한 이유가 인상적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존의 번역이 위대한 문학 <위대한 개츠비>가 가진 원문 본연의 재미를 살리지 못한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김영하 작가는 다른 번역가에 대한 언급을 하진 않았지만, '기존 번역본'이라는 말로써 기존 가장 잘 팔린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가인 김욱동 교수, 김석희 번역가가 논쟁의 중심부로 올라왔다. 그들의 반격으로 사태는 점입가경, 전쟁은 대규모로 확대되었다.


난 지루한 문학에 대한 불만을 마치 번역가의 어려운 단어 선택의 문제로 치부하는 이 사태가 맘에 들지 않는다. 번역가들이 좀 배운 꼰대라서 문장이 어려운 것이라니. 그들은 전문성을 가진 번역가다. 일부러 어렵고 난해하게 작품을 번역하지 않는다. 대가들의 문장을 끈덕지게 읽지 못하는 '난독의 시대'에 쉽지 않은 문장이 주는 거부감을 번역의 문제로 돌리는 건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는 짓이다. 


개츠비는 저작권 연한이 지나 판권에 대한 구매비용이 없다 보니 내로라하는 굴지의 출판사들이 개츠비를 헐 값에 팔기 시작했다. 이로서 기존의 가장 잘 팔리는 '민음사' 개츠비가 신진세력 '김영하' 개츠비에 밀리는 사태가 발생했고, 민음사 개츠비를 번역했던 '김욱동'과 제3의 세력 열림원의 '김석희'가 이 전쟁에 참여하며 소설가와 전문번역가의 싸움으로 비화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출판사는 '정본’, ‘최고의 번역가’, ‘정통’을 내세우는 마케팅 대결을 펼치는 촌극을 자아냈다. 하지만 한 작품을 두고 번역이 이렇게 주목받는 사태가 처음이라 더더욱 흥미를 끄는 게 사실이다.


살면서 수많은 세계문학전집을 읽었지만, 한 번도 번역이 어찌어찌되어 읽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번역할 수 있는 실력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냥 문학은 어려운 거라고 생각했다. 그 고된 고비를 넘겨서 마지막 장에 다다를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졸음으로 쏟아지는 것을 이겨내고, 오랜 시간 투자해서 읽는 게 문학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번역가의 스타일에 따라 작품을 읽는 재미가 달라질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아주 미묘한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사람의 의역이 절대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은 버전이 아닌 좀 다른 나만의 개츠비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의 선택은 개인의 취향으로 맡겨질 뿐, 옳은 번역은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 누가 번역하든 번역가의 인장이 가진 영향력을 그대로 인정하는 성숙함을 필요하다. 각각의 번역에도 서로 다른 장점이 있는 법이니까.


내 개인적으로 읽어 본 번역본은 기존의 민음사와 열림원 버전이었고, 이번에 김영하 버전을 다시 읽었다. 하나의 소설로서 더 재밌는 개츠비는 김영하의 것이었다. 문장이 잘 읽히고, 반말로 하는 대화들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비속어와 구어체의 적절한 혼용과 적절한 순간에 대화의 구획을 나누는 솜씨가 역시 작가답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로서 개츠비는 전문번역가가 피츠제럴드의 문장을 지켜내기 위해 했던 노력이 무력화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영하의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피츠제럴드의 것에 침투하여 작품을 읽는 내내 김영하의 시니컬함을 떠올리게 되었다. 내용의 질과 무관하게 작가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사실 아무 근거 없이 그런 기분이었다, 그 예를 한 번 들어보면, 기존 번역판의 데이지가 실로 여신급의 대우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김영하가 해석한 데이지를 다소 냉소적으로 비판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분위기를 풍긴다. 나 자신이 김영하라는 작가의 소설과 수필에 익숙하다 보니 느낄 수 있는 하나의 뉘앙스인데, 그건 다른 번역가의 글을 읽을 땐 의식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데이지를 삐딱하게 보는구나 하는 의심들이 기존의 데이지가 가진 마스크에 뭍더 화장이 떠 보인달까. 그래서 내게 문학동네의 개츠비는 김영하 자신이 해석한 개츠비의 면면으로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난 그간 읽었던 개츠비와 달리 입에 착 달라붙는 개츠비를 만날 수 있었다. 

몇년 전  '한강' 작가가 영국 '맨 부커'사의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 난 한강 작가의 수상에 진심으로 감격했다. 그녀의 집필을 향한 의지, 문학을 향한 태도 등을 늘 존경해왔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그녀의 수상 장면에는 뜬금없이 번역가가 함께 상을 받고 있었다. 왜일까. 한강의 고된 작업은 그녀 혼자만이 누려야 마땅한데 말이다. 한국 출판계와 다르게 해외에서는 그만큼 언어의 옮겨내는 번역이라는 작업을 2차 창작물로써 인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채식주의자>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는 상당한 의역을 통해 낯선 한국이라는 나라의 문학을 영국에 소개했다.(맨 부커 상은 대중성을 상당히 의식하는 상이다. 주최 측이 출판사이니 판매량이 중요한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녀는 말한다. "번역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인 감수성이에요.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더 중점을 두죠. 그것이 독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거든요." "번역은 시를 쓰는 것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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