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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12. 2017

2월, 故이은주를 그리며

소설집 <호출>, 저자 김영하, 문학동네

소설집 호출

김영하의 좀 된 소설집 <호출>을 읽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산책을 하다가 김영하의 속된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김중혁의 작품 대신 골라 나왔다. 얇고 빠르게 읽히는 책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정말 빠르게 읽힌다. 쉽게 말하면 가독성이 좋고,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마치 한국 독립영화를 보듯 한국 소도시의 익숙한 먼지들을 흡입하는 기분이다. 무겁게 읽어내면 한없이 무거운 소재지만, 김영하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문체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무심하다. 또한 작품을 읽은 후 머릿속에 남겨진 잔상과 같은 이미지들은 마치 홍상수의 영화들 속 사람들처럼 지리멸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인 <거울에 대한 명상>이다.

나르시시즘이 만연한 이 사회에 모두 잘난 새끼들 뿐이다. 이 소설 속의 남자도 꽤 잘난 듯 인생을 사는 나르시스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만족하며 머리를 만지고, 턱을 쓱 치켜올려 위악적인 미소를 짓는 남자. 소설 속에서 그는 이름도 직업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지가 잘난 줄 알고 사는 '거울 속' 남자다. 평범한 집안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 그에게 시집 온 순종적인 아내는 어쩌면 그가 의식하는 사회적 위상을 감안한 선택이었다. 그에겐 오래된 정부를 통해 욕정을 풀 수도 있고, 공권력을 등에 엎고 성공의 길을 하나씩 밟아나가고 있다. 그는 거울 밖에 있을 때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만, 거울 안에서는 철저하게 속된 상상을 배격한다.

이 남자가 결국엔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어느 폐차 트렁크 안에서 가장 끔찍한 진실을 마주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 못돼 먹은 김영하의 심보가 맘에 든다. 특히 갇혀있는 트렁크 안에서 죽기 전에 기어코 섹스를 하겠다며 바지를 벋었던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는 다시 바지를 챙겨 입는 대목이 재밌다.

“이미지는 중요한 거야. 실체보다 이미지가 더 실제적이라는 말 못 들어봤어?" "그거야 살아있을 때 얘기죠, 형. 자신이 죽는데 이미지든 실체든 무슨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예요?" "내겐 중요해 설렁 죽었더라도. 내가 죽어도 내 아내는 살아야 될 거 아냐? 난 이런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줄 수 없어."

나르시시즘을 껍데기로 묘사한 이 대목도 인상적이다.

“불쌍한 건 불쌍한 거예요. 껍데기와 산다는 건. 그리고 그 자신의 껍데기의 복제품이 되어 간다는 것. 형의 거울로서 존재한다는 것. 나르시시즘의 충실한 반영물이 사라졌을 때, 인간들은 가장 흥분하죠. 회사가 도산했을 때, 사장들은 왜 자살하는 줄 아세요? 그 회사는 그 자아의 확장물이기 때문이에요. 그 회사가 곧 자신의 이름이고 얼굴이고 가장 아름다운 마스크인데 그게 깨진 거죠. 그때 그 사람들은 가장 큰 아픔을 맛보죠.” 남자는 말한다. “역시 넌 신파야”

남자는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를 자신의 삶의 복제물로 여긴다. 그리고 아내는 남자의 애인 가희를 거울이라 여긴다. 그리고 가희는 남자를 자신의 거울로 인식한다. 이 물고 물리던 관계의 파국은 가희의 입에서 나온다.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작은 공간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종국에 남자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미지 속 속살이 썩어가는 것도 모르고 끝없이 거울만을 바라본 남자. 그는 목숨이 떨어지기 전에 깨진 거울의 굴절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만을 의식하고 살던 성공한 남자의 최후 치고는 너무나 잔인했다. 현대의 나르시스트의 삶 속 그 어디엔 거울에 비치지 않는 좀스러운 벌레가 있다는 건 세상을 향한 위악이다. 치장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도시의 잘난 놈에겐 딱 그 정도의 처벌이 적당하다고 본 것일까. 김영하는 차분한 문체로 일말의 빈정거림 없이 책의 마지막 장을 마무리한다.


이은주 기억

난 2월만 되면 이은주를 떠올린다. 17년 2월 22일은 故이은주의 12주기다. 눈발이 날리던 겨울에 떠난 그녀에 대한 기억들은 대부분 영화 속의 표정이 대부분이다. <거울에 대한 명상>은 이은주의 작품 중 내가 유독 좋아하는 영화 <주홍글씨>의 원작이 된 작품으로, 당시 한석규 주연의 작품으로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이은주는 엇갈린 사랑, 질투, 증오, 냉소, 염세와 같은 묘사하기 어려운 어둠을 품은 연기를 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녀를 떠올린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 소설 속 가희는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시절 찍은 역할이라 그런지 더 마음이 아프다. 오로지 남자의 욕망에 의해서만 기능하는 도구화된 여자, 그런 가희에 철저하게 빠져들었던 이은주의 고독한 표정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김영하의 관념적인 허무주의를 포식한 이 짧은 단편은 내게 이은주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소설의 분위기를 그대로 체화한 듯한 이은주의 표정이 지워지지 않는다. 도회적이고 새침한 그녀의 표정은 당시만 해도 세련된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이 소설을 읽고 영화를 챙겨 봤을 때 드는 느낌은 엄습하는 노여움이었다. 당시만 해도 퀴어가 낯선 용어였던 시절이라 이 영화는 강도 높은 노출과 동성애의 설정만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런 것들이 그녀를 혹시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10년이 넘어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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