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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01. 2017

보편적 악의 승리담

영화 나이트 크롤러, Nightcrawler

최근 제이크 질렌할이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연기한 1인 2역의 배역을 보면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렸다. 80년생, 38살의 제이크 질렌할은 올해 개봉할 영화까지 39편의 영화에 출연했다.(개봉 예정작에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도 있다.)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늘 다작하는 그의 근면함은 그를 신뢰할만한 배우로 만들었다. 제이크 질렌할을 보며 한국 배우 중에 '조승우'와 연기 스타일 측면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을 늘 하는데, 조승우가 질렌할의 반만큼 한 영화에 등장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제이크 질렌할이 본격적으로 영화 출연하기 시작한 근 15년간은 내가 영화관과 사랑에 빠지게 된 기간과 거의 겹친다. 제이크 질렌할은 이 기간 동안 <엔드 오브 와치>, <프리즈너스>, <소스 코드>, <조디악>, <브라더스>, <브로크백 마운틴>, <투머로우>, <에베레스트>, <데몰리션>, <나이트 크롤러>, <녹터널 애니멀스>와 같은 작품들로 나와 영화관에서 만났다. 이 정도면 내가 제이크 질렌할에게 주는 애정의 근거는 충분해 보인다. 개인적으론 그가 한국이나 미국에서나 그 가치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면 대중영화를 하는 배우로서 아직은 풋내기에 불과한 이미지가 그를 에워싸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대단한 연기를 펼친 케이시 애플렉이 수상하고, 작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오랜 후보 신세의 설움을 잊고 <레버넌트>로 수상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음 이제 제이크 질렌할에게도 차례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이트 크롤러Nightcrawler, 2014

최근 제이크 질렌할의 출연작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나이트 크롤러>다. 이 작품은 '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 후보에만 올랐다. 당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에드 레드메인'이었고, '제이크 질렌할'은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못 올랐다. 개인적으론 제이크 질렌할이 가장 유력한 후보이며, <폭스 캐처>의 스티브 커렐 정도가 후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예측은 무참히 빗나갔다. 제이크가 출연한 대부분의 작품들을 본 내 느낌은 그의 연기가 혹은 그의 역할이 연출자를 돋보이게 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단점이라곤 할 수 없다. 누구나 꼭 로버트 드니로처럼 광기를 뿜을 필요는 없으니까. <나이트 크롤러>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제가 좋아하는 연기상을 보여준 작품처럼 보인다. 마치 제이크 질렌할이 멱살을 잡고 끄는 것처럼 연기는 줄곧 그를 향한 근접샷을 멈추지 않는다. 광기 어린 눈빛 하며 핏줄이 드러나는 피부와 퀭한 얼굴까지, 사고 현장의 취재를 마치 마치 인생의 사명인 마냥 카메라를 들고뛰는 폼이 딱 미친놈이었다. 마치 밤거리를 헤매며 마약을 찾는 뒷골목의 '쳇 베이커'처럼 뭔가 굶주린 듯한 표정이었다. 개인적으로 <나이트 크롤러>가 15년 오스카의 작품상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남우주연상 후보엔 올랐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뭐 시상식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팬심이란 게 어쩔 수 없다.

나이트 크롤러Nightcrawler, 2014
어떻게든 돈을 벌어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은 청년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즘은 직장에 충성한다고 해서 위 세대처럼 미래가 보장되지 않죠. 저는 필사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좋은 성과를 낸다고 생각합니다.” 낮은 취업률과 20대 청년들에 대한 저임금 착취, 경제고도 사회에 인문학은 죽은 지 오래다. 개천의 용은 신화 속 동물이 되어버렸다. 오로지 실용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성장해 온 청년의 믿음은 확고하다. 인근 기차역의 철사와 구리선을 훔쳐서라도 돈을 벌어 내 기득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곧 성공이고, 성공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사회란 역사가 제출한 보고서에 굵은 글씨로 강조된다. 자기 개발서가 서점을 장악하고, 자극적인 뉴스가 쉴 새 없이 흘러넘치는 이 도시에 안일한 녀석들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 청년의 이름은 루이스 블룸, 곧 성공할 남자다.

우연히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한 루이스는 사고 현장을 즉석에서 촬영해 방송국에 팔아넘기는 '나이트 크롤러'들을 알게 된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자세가 되어있는 루이스는 곧바로 저가의 카메라를 구입해 사고 현장을 찾아 나선다. 루이스는 직감적으로 이 직업이 노다지라는 것을 알고 빠져든다. 더 큰 사고 현장, 더 빠른 속도, 더 잔인한 장면으로 점철된 화면은 그에게 돈을 가져다준다. 그는 사업을 확대해 직원을 고용하고, 차량을 스포츠카로 바꿔 확장을 노린다. 재밌는 점은 루이스는 본인을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재료(촬영)를 구하는 카메라맨이 아닌, 직접 연출을 해서 뉴스감을 생산하는 감독(연출)이 되고픈 것이다. 이제 그는 있는 그대로를 찍지 않는다. 더 큰돈을 위해 사고 현장을 연출하고, 카메라의 시점에 의미를 부여하다. 사고 현장의 희생자를 더 그럴듯한 위치로 옮기고, 직접 뺑소니범을 추적해 드라마를 인위적으로 연출한다. 언론윤리, 보도 정신, 기본적인 원칙이 모두 무너지고 TV 뉴스를 위한 쇼가 시작되고 있다.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 2012

이 과정에 만나게 되는 지역 방송사의 보도국장 니나(르네 루소)가 루이스의 동반자가 된다. 경쟁사에 늘 밀리며 늙은 퇴물 취급을 받고 있는 니나는 루이스의 비 도덕적 촬영물을 알고도 용인한다. 오로지 시청률로 평가받는 언론계에서 시청률 이외의 명분이랑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니나는 손석희가 되고픈 맘은 없다. 다만 이 업계에서 지속적인 생존을 원한다. 사람을 죽여도,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도 시청률을 위한 소스만 제공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는 아둔한 시청자를 향한 공격으로 되돌아온다. 비 윤리적인 방식의 언론 보도를 하나의 오락용으로 치부하는 대중에게 더 나은 윤리라는 것이 통용 가능한 것일까. 시청률을 보장하는 것은 선혈이 낭자한 사건 현장과 자극적인 문구로 도배된 헤드라인뿐이다.

아이돌이 판을 치는 연예계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정작 스크린에서 엉덩이를 흔들면 채널이 고정되는 현실에서 언론 윤리라는 것이 발붙일 자리는 없다. 현대 방송 시스템의 가치 상실이 과연 언론인의 윤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청자의 몫은 어디까지 일까. 영화는 루이스가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질문거리들을 만들며 단순치 않는 질문들을 이끌어낸다. 일률적으로 편집된 TV 방영용 삶은 철저한 각본 속에 새로운 시대의 자기개발서를 적어낸다. 그러다 보면 김난도 같은 사기꾼이 전 국민의 멘토가 되기도 한다. 그 구역질 나는 꼰대들의 가치들이 왕왕 인생을 꼬이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의 후반부는 노골적으로 액션 스릴러로서 장르에 충실한 연출이 두드러진다. 루이스의 특종에 대한 집착, 광기를 이용한 카메라의 응시는 마치 공포 영화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한다는 마인드의 한 청년이 사회적 성공을 위해 인간 윤리를 모두 배신할 때 그에 따른 통제 역할을 하거나 제동을 걸어 부대끼는 장면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 캐릭터의 위악을 곧바로 장르적 쾌감으로 소비한 후 그에 대한 수습은 하지 않는다. 이는 곧 사회드라마로서 위치를 윤색시키고, 캐릭터는 현실감을 잊는다. 특히 상호 결탁을 맺은 니나의 역할은 언론을 대표하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비윤리적 행태에 피드백이 없다는 점은 자극에 도취된 영화의 이면이다. 아쉽게도 루이스는 보편적 악이 아닌 한 장르 영화의 악당이 가진 승리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제로 다크 서티Zero Dark Thirty, 2012

이 영화를 보며 제시카 체스타인이 열연한 <제로 다크 서티>의 '오사마 빈 라덴 포획 작전'이 생각났다. 이 영화에서 빈 라덴을 잡기 위해 여주인공은 모든 수단을 불사한다. 그 과정에서 이라크에서 행해지는 민간인 납치, 고문, 살인, 협박의 사건들이 불가결하게 등장한다. 영화는 이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개입 않고, 오로지 리얼리즘에 기대어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범죄를 차악 정도로 치부한다. 직업윤리, 언론 통제, 국가 간 협약을 비웃고 오로지 하나의 타깃을 위해 모든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다. 차악은 절대악을 심판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총은 민간인을 향해 주저 없이 발사되고, 영화적 쾌감을 위해 기능한다. 카메라의 윤리가 영화에 그대로 민낯을 노출하는 장면들은 영화를 왜곡시킨다. <나이크 크롤러>에서 인물들을 제약하지 않는 카메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악해질 수 있는 경우를 보여준다.

화려한 카체이스 액션신과 사건 현장을 조작하는 <나이트 크롤러>의 클라이맥스엔 서스펜스가 시종일관 넘쳐 지루함 없이 관람할 수 있다. 논쟁이 가득한 영화는 할리우드이 여전히 관객과 소통하려고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빙이고, 영화가 사회 현안에 어떤 방식으로 상호 보완적 위치를 점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법적으로 문제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방송에 내보내는 언론의 천박성. 우회적 비판 없이 모든 것을 편할 대로 수용하는 대중. 그 중간 지대에 태어난 인터넷 시대의 괴물 루이스는 관람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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