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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01. 2017

자본과 시체에 관한 농담

강남 1970 (Gangnam Blues, 2014)

어떠한 사전 정보도 없이 <강남 1970>을 봤다. 우연히 손이 갔고, IPTV를 결재를 통해 끝까지 봤다. 웃긴 건 그가 과거의 작품들로 내게 준 감정적 파장의 흔적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하울링> 이후로 완전히 관심이 끊긴 유하 감독의 필모에서 이 작품 역시 쉽게 지워져 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강남 1970>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강남을 향한 유하 감독의 정서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보여줬던 1970년대 말죽거리 도시개발 광풍의 전조들이 공간만 다른 체 영화에 묻어있다. 좁은 땅에서 벌어먹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두 남자의 사연을 통해 1970년대 경제부흥기 강남 택지개발사업의 흔적들이 드러난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말죽거리 근처 이제 막 개발되기 시작한 서초구의 한 마을의 이야기였다면, <강남 1970>은 최초로 강남의 도시계획과 함께 돈이 쏟아질 무렵의 투기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반포, 잠원, 개포로 이어지는 과수원 밭의 상전벽해 신화 속에 두 남자가 있다. 사실 땅은 맥거핀에 불과하다. 유하 감독이 관심이 있었던 지점은 기존 버디무비들이 가진 장점들의 총합이다. <비열한 거리>와 <하울링>에서 미치 다다르지 못했던 남성적인 세계에 대한 로망이 있다. 마치 감독이 어린 시절부터 섭취한 갱스터 영화들이 가진 공기를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남 1970 (Gangnam Blues, 2014)

하지만 기존 두 남자의 우정을 다룬 버디무비의 한계를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고전 <레인맨>부터 시작해서 <히치하이커>, <내일을 향해 싸라>, <델마와 루이스>,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 최근엔 <신세계>까지 수 없이 되풀이 한 시나리오 작법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녹아든다. 성실한 감독이자 고유의 인장을 가진 시인이었던 유하 감독의 이야기라기엔 너무도 게으르다. 다양한 용례들을 피해 새로운 걸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은 건 알지만, 그가의 초기작들이 보여준 참신한 시선의 부재가 어색했다.  유하 감독이 <비열한 거리>에서 조폭이 직업인으로서 살아갈 때의 리얼함을 담았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여성이 가진 결혼제도의 모순점을 잡아냈으며, <하울링>이 형사 버디무비의 틈을 피해 남성 위주의 조직에서 여성이 가진 고충들을 그려냈던 것을 기억한다. 이 영화에서는 강남 개발 외에 짚어낼 수 있는 캐릭터적 특성이 없다.

비열한 거리A Dirty Carnival, 2006

좀 더 투덜대자면 남성 간의 우정과 이상, 정체를 알 수 없는 동경에 대한 정서는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그들이 웃통 벗고 돈만을 외친다고 어째 신화적으로 보이던가. 어렵게 살던 형제가 난 중에 헤어지고, 다시 만나 조폭이 되어 의기투합한다. 조직 간 안력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형제는 다시 죽음의 위기에 몰리고, 결국엔 정치적 희생양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장렬한 비극은 보너스, 이민호의 기럭지는 메인 테마다. 대충 그런 얘기다. 이야기에 대한 어떠한 창의적인 접근도 없이 수도 없는 사람을 죽인다. 좀 협박한다고 칼질하고, 물에 수장시킨다. 영화의 액션신도 비열한 거리, 말죽거리 잔혹사의 리얼함과 비교해보면 단순히 신체 절단과 피칠갑의 자극에만 몰두해있다. 장엄한 음악에 슈트 빨 자랑하는 두 주인공의 허세는 피로감이 엄습한다. 1970년대 한국의 실제 역사와 엮어 놓고 위악스런 남자들 간 이전투구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도대체 강남은 왜 등장한 건데라는 의문만 든다. 영화는 시작부터 강남의 시가지를 한눈에 비추는 쇼트를 통해 거대한 서사의 틀을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깡패들 간 야인시대 놀이에서 과연 서울의 현재를 논할 수 있을까 싶다.

말죽거리 잔혹사Spirit Of Jeet Keun Do, 2004

성(男性性 , masculinity)이란 성격특성으로서 남성다움을 의미한다. 성역할을 구성하는 요소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 특성을 가리킨다. 과거 남성성의 주요 특성은 목표지향적 특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남성은 경쟁과 활동성이 필요한 사회적 역할에 적합한 반면, 여성은 타인을 돌보고, 배려하는 역할에 적합하다는 것이 강조되어 왔다. 이러한 성 고정관념은 범문화적이었지만, 거의 폐기된 정서다. 영화가 1970년대를 다룬다고 해서 남성성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 페미니즘 운동과 성 차별에 항거하는 세계적 추세를 따르지는 못하더라도, 뒤떨어진다는 인식을 용납하기 어렵다. 더 중요한 점은 반복 등장하는 살인 장면의 구체적 묘사가 영화에 어떠한 긍정적 영향도 얻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비열한 거리>와 <말죽거리 잔혹사>가 폭력과 살인의 여파가 인간에게 주는 상처를 심도 있게 다룬 드라마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차이가 있다. <강남 1970>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로 남은 강남은 대지 한복판에서 칼부림을 하며 단체로 싸우는 장면이 있다. 인간과 생명에 대한 어떠한 존중도 없는 천박한 장면으로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죽음을 껌처럼 씹어 대는 장르 영화들을 보다 보면 작년에 읽은 <인체 재활용>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이 책의 저자 '메리 로치'가 <강남 1970>을 봤다면, 아마 꽤 시니컬하게 죽음과 시체에 대핸 논할 것이다. 나는 아직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나이의 문제는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보니 바쁘게 일과를 마친 후 발 닦고 자기 바쁘다. 죽음은 이불속에 들어가 잠에 빠져들고 난 이후의 몽상 같은 느낌이다. 내 의식이 통제할 수 없는 '없음'의 영역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잠을 하나로 묶어 이해해버리면 죽음 이후를 생각해 볼 기회가 없다. 그래서 몇몇 지인의 추천에 메리 로치(Mary Roach)의 <인체재활용 : 당신이 몰랐던 사체 실험 리포트>(원제 : STIFF _ The Curious Lives of Human Cadavers)을 읽었다. 이 책은 유명한 스터디셀러였던 <스티프>의 개정판이고, 내용상으로 큰 변화는 없다고 한다.

<인체재활용>은 다른 죽음에 관한 책과 명백한 차이가 있다. 죽음 이후 시체의 처리에 관한 르포 형식의 논픽션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 내 의식이 닿지 않는 껍데기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될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가 죽고 내 남은 시체의 머리가 어디에 어떻게 이용될 것인지 예측해 볼 수 있다. 어느 한 의과대학의 부검 실습용 머리가 되어 여학생들 사이에 셀카용 장식물이 될지도 모르고, 잿물에 산화되어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엄연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부지런한 기자가 자신이 가진 취재력을 바탕으로 발품 팔아 시체의 처리에 관해 상세히 기술했다. 책의 내용은 유머러스하고, 죽음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찾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 책은 우연히 <강남 1970>을 보고 다시 읽게 됐는데 장르와 남성성이라는 이름 하에 쉽게 죽이고 쉽게 파묻는 것의 경박함을 느꼈다.

한국은 땅이 좁아 매장이 어렵다. 강남 1970에서는 산이 많아 쉽다고 하지만, 산은 환경파괴 때문에 매장을 지양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다 보니 산소와 납골당도 점차 없어지는 추세다. 강남에 산소와 묘비를 세울 땅을 가진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강남 1970>을 보고 스스로 자위할 수 있을 것이다. 조폭과 깡패들은 순에 묻고는 희희낙락하니까. 과거엔 조상을 모신다고 산소를 갔는데, 이제는 그 땅을 재산으로 처분하고 마음으로 공양을 빈다. 산소가 사라지니 화장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었지만, 이제는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받는다. 태울 때 나는 연기며, 화장 후 유골을 강에다 뿌려 대니 환경 단체가 죽은 자의 처분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Crazy Marriage, 2001

이렇게 시체의 처리는 곧 땅과 환경문제로 이어진다. 인간은 흙에서 탄생한 생명체다. 흙에서 난 음식을 먹고, 그 음식들은 인간이 남긴 오물을 거름 삼아 커왔다. 그렇다면 죽는 것도 다시 자연으로 환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메리 로치'의 주장이다. 시체를 수분 환원하고, 생태학적인 장례식을 통해 자연으로의 복귀를 축하하는 과정이 인간이 죽음을 대한 마지막 의식이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인간 존엄에 늘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겐 다소 도발적인 주장이라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죽음 이후의 삶에 고백한 저자의 다짐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나는 내 시신을 기증한다는 기증서 양식을 작성할 것이다. 나는 나를 해부할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약력을 첨부할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못 쓰게 된 내 껍질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야, 이 사람 좀 봐. 이 남자는 평생 영화를 보고 블로그를 썼대.” "할 일도 더럽게 없었나 봐" 그리고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내 시체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죽기 전에 스마일을 할 것이다. 땅에 대한 영화를 보다가 다시 땅에 묻힌 시체를 걱정하는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영원으로 회귀하는 듯 졸림을 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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