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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05. 2017

북유럽의 낭만과 고통

영화 포스 마쥬어, Force Majeure, Turist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느긋한 주말 저녁 자지러지게 웃긴 책을 읽고 싶어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을 펼쳤다. 이 책은 유럽여행을 하는 배불뚝이 '빌'아저씨의 에세이다. 저자 빌 브라이슨은 대체적으로 삶의 기조가 투덜이 스머프에 가깝다. 쉴 새 없는 불평으로 시작해서 푸념으로 끝이 난다. 그의 저서들은 발칙한 시리즈로 한국에 출판됐다. 역사에서부터 자연과학, 인문학까지 다양한 범주를 오고 가지만, 빌 브라이슨 특유의 장난기와 조롱 섞인 농담들이 그만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난 <발칙한 유럽산책>의 북유럽 여행 단락을 좋아한다. 그는 그림 같은 노르웨이 함메르페스트에서도 추위와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설명하느라 지면의 대부분을 잡아먹는다. 이런 극단적인 쇄말성은 여행담이 주는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빌 브라이슨의 첫 여행지인 북유럽에 관한 그의 총평을 들어본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이 두 나라는 인생의 즐거움이란 즐거움은 모두 쥐어짜 없애버리자고 작정이라도 한 듯하다. 소득 세율과 부가가치 세율은 세계 최고에 무자비한 음주 관련 법, 밋밋하기 짝이 없는 술집, 맛도 멋도 없는 음식점에 TV는 또 어떤가. 게다가 물가는 어찌나 비싼지 초콜릿 바를 하나 사면 거슬러주는 잔돈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그보다 조금이라도 더 비싼 물건을 사면 통한의 눈물이 절로 나온다. 겨울에는 뼈가 으스러질 듯 춥고, 다른 계절에는 좀 나은가 하면 연중 내내 비만 온다. 스웨덴 사람의 주식은 2가지다. 그중 하나는 청어인데 다른 하나는? 역시 청어다. 지중해변에서 노르웨이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은? 방한 부츠를 신은 사람을 찾는다.

끝내 빌은 염원하던 오로라는 보지도 못하고, 썩은 농담들을 늘어놓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만다. 이 과정들이 어찌나 술술 읽히던지 잠은 달아나고, 다음 여행지를 기다라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행기의 달인, 빌 브라이슨

내가 가진 북유럽에 대한 이미지는 새하얀 알프스 산맥과 대지 위의 정돈된 주택 그리고 스키어들의 천국, 세계 최대의 복지국가의 아낌없는 사랑 등이다. 이는 이른바 스칸디나비아 스릴러라고 불리는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와 '요 뇌스베'의 <오슬로 3부작>를 읽은 영향이 컸다. 이 소설들은 인적 드문 마을의 잔혹한 범죄,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추위, 하얀 눈밭으로 너저분하게 흘러넘치는 핏물, 딱딱하기 그지없는 인간 군상과 인종차별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 등 북유럽의 어둠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내겐 그 모든 사건들 역시 북유럽으로 향하는 내 마음의 환상특급을 더 키워줄 뿐이었다. 그들은 잔혹한 범죄에도 정결한 사회 시스템과 지적인 언론, 엄정한 법의 집행을 맞선다. 자발적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그들의 청교도적 소비 행위 또한 그 이상을 부추길 뿐이다. 내게 여행이란 텍스트 너머의 보통의 존재를 깨닫는 행위다. 빌 브라이슨은 내가 가보지 못한 여행지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들려주는 가이드가 되어준다. 


북유럽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최근에 본 스웨덴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가 생각났다. 전국 3 개관 규모의 개봉으로 날 애타게 했던 이 영화는 홀로 서울극장 한 구석에 앉아 외롭게 본 영화였다. 장대한 알프스 산맥의 스키장과 곤돌라의 기계음이 가득 퍼지며 영화는 시작한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이중으로 날 괴롭히는 뿌연 한강을 버스로 넘어온 내게 알프스 산맥에서 휴가를 보내는 한 가족은 부러움 그 자체였다. 포스 마쥬어 Force Majeure는 한국어로 불가피한 상황을 의미한다. 북유럽 특유의 건조한 유머가 한 남자를 사지에 몰아넣는다. 간단하게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스키 여행을 떠난 토마스(이 가족의 가장)와 가족들은 여유롭게 스키를 타며 첫날을 보낸다. 여행의 비극은 두 번째 날에 벌어진다. 토마스와 가족은 알프스 산맥이 한눈에 보이는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던 도중 눈사태가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한다. 사실은 눈 먼지에 가까운 해프닝이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자연의 역습에 사람들은 혼비백산 몸을 숨긴다. 안타깝게도 우리 아버지이자 남편 토마스는 가족들을 버린 채 혼자 도망친다. 이런 비겁한 새끼. 상황이 수습되고 뻘쭘한 토마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지만, 아내 에바는 토마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려 고통스러워한다.

사회가 남성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포스 마쥬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보호하지 않은 남편은 그러 의미에서 반 사회적인 인간으로 평가절하당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본능만큼 날 구원하는 게 있을까. 그의 생존본능은 재앙이 닥쳤을 때 통계적으로 남자들이 더 많이 살아남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뒷받침 할 뿐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그 통계가 본인의 것이 된다면 그 본능은 이기심으로 둔갑한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여자와 아이들이 가장 많이 희생됐고,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은 건 남자였다고 한다. 그건 남자들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 생존본능과 육체적 힘이 동반된 결과인 것이다. 그걸 비난할 수는 없다.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Force Majeure, Turist, 2014

영화에서 끝내 남자를 용서하지 않는 아내는 그의 도망보다, 도망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 토마스에게 실망한다. 토마스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걸 인정하는 순간 남자로서,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멍청한 말만 되풀이한다. 에바 우린 모두 무사하다고, 여행지에서 이러면 안 돼. 아내는 그가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먼저 도망쳤다고 강조하는데, 그 말을 토마스의 친구들 앞에서 동영상까지 보여주면서 그를 완전히 밟아버린다. 역설적으로 그는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온 남자였다. 핸드폰과 지갑으로 가족을 부양했지만, 결국 그것이 역으로 그를 거친 눈발 안에 가둔다. 

한 부부의 다분히 사소하고 지엽적인 다툼이 북유럽 알프스 산맥의 장엄한 풍경과 묘한 대비를 이루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죽어버린 남성성 앞에서 토마스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본다. 벌거벗은 아내 앞에서 발기 한 번 못하고 수그러든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앞에서 어깨를 펴지 못한다. ‘남자는 히어로’라는 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재생산된 이미지다. 반대로 여자는 항상 섹스 심벌로 대변된다. 스테레오 타입과 기대치가 정해져 있어서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한 가족 안에서의 역할을 흐트러놓고 그들의 자연발생을 관찰한다. 조용하고 나직하게.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Force Majeure, Turist, 2014

포스 마쥬어는 상당히 세련된 블랙코미디로 느껴진다. 영화를 보며 연신 즐거운 미소를 지었던 것도 이 영화가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부부의 균열을 명백하게 전시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동 칫솔 소리와 아이들의 눈빛은 안온한 호텔방을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는 사지로 만든다. 스키장에서 제설차와 리프트 소리로 이 심상치 않음을 청각으로 자극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온통 흰색 벽지로 발라버린 이 세계가 곧 무너져 버릴지 모른다고 손짓하는 것 같다. 영화를 마무리하는 방식을 보라. 공항으로 가는 유일한 버스는 운전자의 부주의로 더 이상 몸을 뉘일 수 없는 방주가 된다. 울음과 눈물로 무참히 짓밟힌 남성성에 대한 통념은 언제 다시 터져 나올지 모른다. 이 며칠 간의 여행이 어떤 방식으로 기억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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