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Mar 05. 2017

현대적 아파르헤이트의 기원

소설 추락(Disgrace), 존 맥스웰 쿠체(존 쿳시) 저

난 소설을 통해 지구 어느 곳 다른 삶을 접하길 즐겨한다. 가끔 소설을 읽다가 구글 지도를 켜고 어느 곳 사진을 한참 살펴본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을 그곳에 놓음으로 해서 상상을 형상화한다. 어제는 오스트리아의 이름 모를 전원도시를, 그저께는 오슬로의 한 항구를 눈으로 거닐었다. 광대역의 인터넷은 이제 세계 어느 곳도 내 노트북 안에서 마주하게끔 한다. 이 지도 위의 삶, 사진 속의 골목길을 거니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은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고즈넉한 집을 방문한다. 존 쿠체의 소설 <추락>의 책장을 열고 작품 속 화자 루리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존 쿠체, 소설 추락

추락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화자는 데이비드 루리, 영문학자이자 교수다. 쉰둘의 남자치고는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한다. 혼자 사는 남자에게, 그것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교수에게 섹스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매춘을 할 수도 없고, 결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가볍다. 그는 혼자 사는 삶을 원한다. 실패한 결혼생활 후 누군가와 같이 집에 있는 게 불편하다. 늘 혼자 살아왔다. 양육권도 포기하고, 수업 끝나면 책이나 읽으며 유유자적 살고 있다. 그런데 가끔 불러 잠자리를 가지던 창녀 소라야가 어느 날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 사라져 버린다. 루리의 삶은 규칙적으로 설계된 일상과 같아서 그녀의 부재는 그를 곤경에 몰아넣는다. 그녀와 주고받던 농담, 따듯한 살의 대화를 잊기 힘들다. 얼마 남지 않은 삶, 확고한 태도로 혼자를 외쳐왔는데 매끈한 직선이 구브러지듯 그의 삶도 궤적을 달리한다. 

소라야 상실 이후 복구 불가능한 고독으로 몸서리치던 루리는 또 다른 곤경을 만난다. 어느 날 집 앞에서 마주친 자신의 제자 멜라니와 즉흥적으로 잠자리를 가진다. 이후 몇 번을 그녀와 함께한다. 학처럼 긴 다리와 따듯한 숨결이 소라야를 잊게 한다. 그는 며칠 후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차갑다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챈다. 그리고 오늘 오후 한 동료 교수로부터 멜라니의 부모가 자신을 고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교수라는 지위를 내세워 여학생을 농락한 파렴치한으로 몰린다. 그는 사과를 거부하고 교직을 스스로 내놓는다. 그리고 추문을 뒤로한 채 딸의 집으로 떠난다.

소설 추락

루리는 교수 명함을 가지고 있지만, 선생질은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윤택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는 스스로 혼자 살며 책을 읽고 쓰는 학자로서 자의식을 가진다. 그가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는 바이런의 작품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살았던 삶이다. 스캔들을 피해 이탈리아로 도망간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은 그와 많이 닮았다. 아니 그는 바이런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부재한 자존심을 견딘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추문, 매춘, 성 유린, 인종차별, 야만의 범람에 그는 지쳐있다. 소라야의 부재처럼 자신 역시 케이프타운을 등지고 흑인들의 거주지인 아파르헤이트의 바깥쪽으로 떠난다. 그는 딸이 그리운 것일까, 아니면 그저 도망칠 곳이 필요했던 것일까. 자신의 도피에 대해 딸은 묻는다. 그리고 그는 대답한다. 

"지금은 청교도 적인 시대야. 사생활은 공적인 일이 되지. 사람들은 성적인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보는 거야. 그들은 가슴을 쥐어뜯고, 뉘우치고, 가능하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구경하기 원했지. 사실상 TV쇼를 원한 거지." 

이 무슨 개소린가. 그녀는 개와 가축을 키운다. 그렇다 그의 대답은 개와 가축의 것보다 못하다. 심지어 짖지도 못하는 농작물과 과일보다 천박하다. 자신의 대답을 흘려듣는 딸의 인생은 어떤가. 살이 많이 찌고, 그녀가 배운 지적인 영역의 삶을 모두 버린 듯 하지만 그녀는 행복해 보인다. 근처에 사는 흑인 남자에게 일정 부분 의지하고 수다스러운 친구들과 잘 살고 있다. 루리는 그것이 영 못마땅하다. 그녀에게 자신과 함께 도시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그는 자신의 딸이 흑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문명인이 되길 원한다. 하지만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아버지의 삶과 자신의 삶은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다며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안 있어 흑인 강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딸은 성폭력에 의해 흑인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리고 가해자는 옆집에서 버젓이 산다. 그녀는 그녀가 겪은 사건을 하나의 통과의례라 말한다. 이 땅에서 그들과 공존할 때 내야 하는 '세금'일뿐이라고. 우리는 그 룰에 적응해야 한다며 고개를 숙인다. 비문명의 세계, 야만의 공간, 흑인들의 거주지, 남아공의 아파르헤이트가 가진 어둠. 딸의 고통과 그것을 바라보는 루리는 이 모든 것들이 왜 자신에게 닥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는 '아파르헤이트' 관련 남아공 미식축구팀의 실화를 다룬 <인빅터스>를 연출했다.

존 쿳시는 노벨상과 부커상 2회 수상이라는 약력이 자랑스럽게 따라다니는 위대한 작가다. 사실 이런 히스토리야 나와 관계없고, 난 그를 통해 남아공의 역사를 공부했다. 남아공에 사는 백인, 지식인, 작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교수 등 존 쿠체의 다채로운 이력은 소설 속에서 지독한 현실감과 뒤섞여 무엇이 화자인지 작가 자신인지 헷갈릴 정도다. 무엇보다 제국 식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흑인정권의 손아귀에서 백인이 갖는 고민이 남아공의 역사와 묘하게 뒤섞이고 있다. 남아공은 오랜 시간 동안 외부 백인 세력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것은 곧 흑인 인종차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이는 지금까지 대표적인 인종차별 법으로 기억되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이기도 하다.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하는 이 법은 존 쿠체의 문학세계, 좁게는 추락의 흑인과 백인의 갈등을 묘사하는 근원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아파르트헤이트 법의 요지는 도심은 백인, 외곽부의 낙후지역은 흑인이 차지하는 양상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1994년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는 끝이 난다. 마치 천지가 개벽하듯 수많은 희생자를 뒤로한 채 그들은 봉합된다. 그렇다면 모든 갈등은 이제 사라진 걸까. 아파르헤이트의 철회 이후에 흑인과 백인의 어색한 동거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혼란은 작품을 복잡한 층위로 가져다 놓는다. 존 쿠체는 실제 인생의 절반을 해외에서 살았다. 그는 아파르헤이트 이후의 남아공 사회를 견디지 못한 도망자다. 그래서 작품의 루리 교수를 존 쿠체와 대입해서 생가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렇다면 딸의 존재는 어떠한가. 이후 세대의 고민을 걱정하는 존 쿠체의 근심이 들려오는 듯하다.

배우 김혜수는 여려 매체에 '존 쿳시'의 <추락>을 추천하였다.

추락을 읽으며 소설과 관계없이 자주 한 생각은 늙은 독거남의 삶이다. 내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새로운 사고방식을 지닌 젊은 세대와 마주하여 위엄을 지키고 살 수 있을까. 누구나 자신이 꼰대가 되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젊은 순간에 고착화된 관념들이 무너질 때 이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나를 기대하긴 쉽지 않다. 그 두려움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엄습했다. 구글 어스에서 남아공의 도시 요소요소를 들여다보며 난 그곳에서 책을 읽는 루리 교수를 떠올렸다.

작가의 이전글 북유럽의 낭만과 고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