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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1. 2017

범죄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

소설 <64> 그리고 <사라진 이틀>

스파이물의 전설 존 르카레,

그의 소설을 읽다 보니 관련 영화까지 모두 찾아보았다. 아직 허기가 덜 가셨는지 지난 주말 책방에 가서 아직 보지 못한 존 르카레의 소설들을 찾아보았다. 책이 두껍지 않고, 하드커버에 만만한 외양을 가지고 있어 앉은자리에서 상당 부분 읽다 나왔다. 내가 그의 글에 빠지게 된 건 조직의 생리에 대한 그의 기민한 감각이다. 존 르카레의 소설엔 거의 대부분 베일에 감춰진 영국 정보부 MI6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일상이 있다. 공간과 인물들의 외모를 형상화하는 문장들엔 스파이물을 현실감이 엄습하는 생활의 채취가 있다쟤들도 커피믹스에 탄 커피로 아침을 시작하고, 출근은 버스를 타고 하려나. 건물 외형에 감춰진 사무실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트렌치코트에 가죽 가방을 들고 근엄한 표정으로 담배 하나 물겠지. 이런 추측들은 작품의 초반부터 내 몰입도를 높여간다. 근엄한 정보부 건물과 그 안에서 기거하는 존 스마일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직무를 해가는 것에서 작품의 공기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마치 공간과 시간에 그 특질을 제거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서늘한 정적이 머무른다. 그래서 난 존 르카레의 소설을 사무실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우측 극중 스마일리(게리 올드먼 분)

일본 최고의 범죄소설 전문가, 요코야마 히데오

내가 오늘 소개하려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조직과 사무실을 가장 잘 묘사하는 작가로 유명한 히데오는 마치 논픽션을 읽는 것처럼 조직을 묘사하는 작가다. 존 르카레가 MI6에 오랫동안 근무한 이력을 가진 것처럼, 히데오 역시 대학 졸업 후 신문사에 들어가 12년 간 기자로 일하며 형사들과 마주하며 겪은 경험들이 작품 속에 녹아있다. 히데오는 인물을 설명하기 전에 마치 밑그림을 그리듯 사무실 배치와 조직의 구성, 부서원들의 임무를 모두 설명한 후에야 주인공 화자가 맺고 있는 사건의 주변부로 나아간다. 마치 이 설계도를 모두 그려야만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듯한 공력이다. 그렇게 관계의 날실을 모두 파헤치고 나면 한 인간이 군상이 그려진다. 

소설 64

<64>의 주인공 ‘미카미’는 경찰 홍보실에서 근무하는 홍보담당관이다. 그 흔한 강력계 형사가 아닌 말로 떠드는 얍샙이다. 그는 안과 밖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딸은 가출해서 행방이 묘연하고, 조직 내에서도 완전히 출세에서 밀린 탓에 안과 밖으로 치고 들어오는 압력들이 그를 질식시킬 것만 같다. 수사부와 경무부가 이권을 모두 가져가는 경찰청에서 박쥐처럼 옮겨 붙는 홍보부의 선임 경찰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잘 들어보면 마치 미생의 장그래를 보는 것 같다.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에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이 그의 속을 썩인다. 경찰청장의 난데없는 미제 살인사건 현장 방문 계획이 그것이다. 도대체 14년 간 미제로 남은 사건을 왜 들추려는 것인지. 이유를 좀 들어보니 공소시효가 1년 남은 이 사건을 해결해서 진급을 노리려는 청장의 무리수라고 한다. 미카미는 홍보실 수장으로 이 정보를 언론에 흘리지 않아야 한다는 첫 번째 임무를 맡는다. 게다가 유괴살해사건 피해자 가족을 설득하여 이 취임 쇼에 협조해 줄 것을 요구해야 하는 두 번째 숙제도 있다. 그런 와중에 과거 사건을 모방한 범죄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일명 '64'라 불리는 유괴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작가가 10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고치고 또 고치며 썼다는 이 작품

은 언론과 경찰 간의 정보 전쟁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64>가 히데오의 최고작이라 불리는 이유 역시 기존 다른 범죄물에서 언론과의 물타기 전쟁을 이처럼 현실감 있게 그려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기자 출신인 히데오만 쓸 수 있는 소설로 유명세를 탔다. 제한 없이 정보를 빼내려는 언론은 조직의 구린내를 맡으려고 주변을 맴돌고, 정보를 적극적으로 막는 경찰 홍보실은 언론을 어르고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결국 정략적으로 정보를 주고받아 악용할 지라도 결국엔 최종적인 선을 위해서라면 과정의 악행은 눈감아 줄 수 있는가? 언론과 경찰이 맺을 수 있는 거래는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가? 공적인 선을 위해서 희생하던 미카미는 정작 자신의 가족 하나 돌보지 못한다는 비난을 달고 산다. 악과 선의 기준들이 사건과 개인사에 녹아 있어 난 심란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어야 했다. 한치의 어둠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 삼한 묘사와 인물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

조직 내에서도 배신과 줄 서기를 연신 반복하고, 사건을 해결을 위해 과거 자신의 동료를 배신해야 하는 고민은 존 르카레의 소설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 고민은 모든 샐러리맨들의 보편적 고민과 맞닿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가족사와 친구, 피해자 가족의 사연까지 모두 들어줘야 하는 홍보실의 구구한 업무들이 종종 극의 흐름을 더디게 한다는 점이다. 작품의 전개 속력을 높여야 하는 시점에서 미진하게 끝맺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여러모로 할 말이 많았던 소설이지만, 이야기의 얼개를 위해 몇 가지 인물들을 등장만 시켜놓고 모른 척한 것 역시 단점으로 드러난다. 개인적으론 그것을 미카미의 피로감으로 이해했다. 사건의 끝을 향해 달리기에는 가정사를 비롯한 그를 괴롭히는 사연들의 피곤함이 주변을 돌아볼 여력을 없앤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미스터리소설 <사라진 이틀>로 엄청난 스타작가가 되었다. 

제128회 나오키 상 후보에 사건 해결에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하기는 했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 결과를 두고 한 인터뷰에서 지독한 현실에서 문학의 판타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논픽션을 읽으라는 투의 인터뷰도 했다. 그는 굴복 않고 나오키 상과 완전히 결별을 선언한다. 히데오는 이어 발표한 이 작품 <64>를 통해 더 큰 히트를 기록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은 작가로 자리 잡는다. <64>엔 나오키상 측이 말한 지독한 현실감을 꽉꽉 채워져 있다. 최근에는 아베 총리가 <64>를 들고 해외 순방길에 오르는 것이 포착되기도 했다.

소설 사라진 이틀

난 <64>에 감복하여 <사라진 이틀>을 연이어 읽었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던 아내를 죽이고 자수한 전직 형사 ‘가지 소이치로’라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의 밝혀지지 않은 이틀간의 공백을 둘러싸고 알리바이와 증거들이 혼합되어 흥미진진한 추리가 이어진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 사건에 관계되는 수사관, 신문기자, 검사, 변호사, 판사, 교도관 6명을 각 장에 배치해 한 사건을 각 조직별 입장에서 바라보게 했다. 조직에 따라 한 사건을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현상들에는 관료주의의 역기능이 잘 드러난다. 자기 조직이 우선하는 이익에 부합하는 해석으로 사건을 몰고 가는 현상들이 사건에 입체적 재미를 부여한다. 수많은 조직이 거미줄 같이 촘촘하게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일본의 관료조직은 결국 한 인간의 선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적도 하지 못한다. 한 개인이 가진 고민에는 무관심하면서, 큰 성취목표를 위해 인간성을 말살하는 시스템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히데오의 차가운 시선이 드러난다. 이쯤 되면 그를 일본의 존 르카레라고 불러도 무방한 거 아닌가.


히데오의 소설을 읽다 보면 복선을 찾는 재미가 상당하다. 

그 어떤 대상도 이야기의 흐름에 엮이지 않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제거한다. 그래서 히데오의 소설에는 시간적으로 비거나, 캐릭터가 기능적으로 배치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트릭과 추리를 중심으로 두뇌운동의 즐거움을 주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일화들이나 캐릭터의 입체성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단점으로 보이기도 했다. 존 르카레가 조직에 녹아든 인간이 그 밖에서 얼마나 무력하였는지에 대해 스쳐 지나가는 대화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을 자아내는 것을 생각하면 히데오의 소설은 지극히 일본스러운 데가 있어 아쉽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한국에 이런 미스터리 작가가 어째 한 명도 없는가 불만을 가지게 된다. 분단을 비롯한 현대사의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모티브로 한 추리소설이 나올 법도 한데 미진한 걸음만 반복하는 중이다. 일본 추리소설 시장은 한국에서 고정 팬이 실로 엄청나다. 하지만 한국은 김성종, 이상우 같은 히트 작가 한 둘 이외에 참신한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독자들의 눈높이는 높아져만 가고, 장르문학 전문지도 폐간되기 일쑤니 걱정이 크다. 장르가 약한 나라에 순수문학이라는 말을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사라진 이틀>에는 '사무라이 정신'이라 불리는 ‘자살 문화’가 등장한다. 

역자가 친절하게 일본이란 나라는 수치스러운 일을 할 경우 스스로 할복하는 문화라는 게 있다며 당혹스러운 주석을 붙인다. 아무리 가깝고도 먼 나라라지만 읽고도 좀 놀라웠다. 작품에선 형사들이 이틀 전에 아내를 살해한 남자에게 '넌 그동안 자살하지 않고 모했냐'며 따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당연히 스스로 죽어야 마땅한 상황에서 뭐 하고 있냐는 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일종의 자살 종용이 이루어진 셈이다.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일본 작가들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문호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자가 말한 자살 문화라는 건 어쩌면 사무라이 정신과 유사한 일본의 '사소설'에 의한 전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개인의 삶과 문학을 동일시하는 일본의 작가들은 사소설의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비극과 자신의 생을 일치화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그 여파는 더 커져 일본인 개개인의 삶에 파고들었다. <사라진 이틀>은 이 자살에 대한 일본 사회의 우둔함을 범죄물의 소재로 사용했다.


인간 실격 도서 사진 출처 : https://www.vingle.net/EdwardKim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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