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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2. 2017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저

다자키 쓰쿠루는 역을 만드는 남자다. 그가 상상하는 역의 풍경은 다양한 인간들이 드나드는 곳이며, 홀연히 떠나기 좋은 사라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이란 게 도시에 가득 차다보니 요즘엔 역을 개보수하여 역 만듦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역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소설의 첫 장에서 그는 말한다. 죽음밖에 생각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고. 이 난데 없는 고백엔 과거의 일과 그리고 왜 지금까지 살아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보인다. 하루키의 소설이 늘 그랬던 것처럼.
소설 색체가 없는 다카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에겐 네 명의 친구가 있었다. 난 잘 모르겠으나 쓰쿠루의 말에 따르면 이름에 저마다의 색을 품은 멋진 친구들이 있었다. 책의 표지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선명한 색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그어나간다. 그들은 한 모임을 통해 쓰쿠루에게 다가왔고, 쓰쿠루는 그들과 완벽한 다섯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기쁨이 지속되던 시절이었다. 5라는 완전함은 더 할 필요도 뺄 필요도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어느 날 알 수 없는 이유가 쓰쿠루를 공동쳉서 쫒겨나게 한다. 이후 16년간 쓰쿠루는 삶을 버텨내고 있다. 죽지 못해 사는 쓰쿠루.

그가 마음을 다잡고 살게 된 이유엔 사라라는 새로 생긴 여자친구가 있다.

아름다운 여인은 언제나 그렇듯 병든 남자를 구원한다. 그녀는 쓰쿠루에게 가슴속 뭔가가 뻥 뚫린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와의 교제를 보류한다. 그러면서 쓰쿠루에게 과거 친구들을 찾아 떠나라고 제안한다. 건강한 육체와 다소 쿨한 태도를 지닌 사라는 언제든 쓰쿠루를 떠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쓰쿠루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순례를 떠날 것이다. 나는 왜 5의 공동체에서 버려졌는가. 그것을 궁금해본 적조차 없던 쓰쿠루는 사라의 권유로 4명의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어쩌면 놀랍게도 가슴 벅찬 하루키적 여정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죽음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믿었던 '색채 빠진' 이 남자가 맞닥뜨린 과거의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은 읽은 지 2년이 넘은 지금, 이 소설을 다시 꺼내들은 이유는 놀랍게도 깨끗하게 지워진 그 친구들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난 쓰쿠루의 과거를 잊었다.

회한과 여행은 과거를 향한 지향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쓰쿠루의 순례를 다시금 맞이하며 들었던 생각은 ‘회한’이라는 단어였다. 

하루키는 회한이 많은 사람이다. "그때 그랬다면 내가 조금 더 나았다면 바뀌었을 텐데." 그건 현재의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감정이다. 어느 누구는 미래를 보며 살고, 나는 현재를 보며 살지만 하루키는 늘 과거를 그리며 산다. 그리고 그 과거는 하루키에겐 또 다른 세계구조(프레임)를 의미한다. 그때 바뀌었을 또 다른 우주, 가상의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하루키 문학의 핵심이다. 또 다른 공기를 가진 정원풍경의 쓸쓸함을 그리는 것이다. 어쩌면 쓰쿠루에게 역이라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한 개찰구일 것이다. 어디든 뚝딱거리며 짓기만 하면 마치 과거의 나를 향해 다가가 다시금 잊지 못할 공동체와 조우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을 상상하며, 벅찬 가슴을 앉고 친구들을 찾으러 떠난다. 아니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 표를 끊는다. 

사실 그 다음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차를 파는 친구와 사업에 성공한 친구, 자살을 해 버려진 그녀까지 변해버린 현재를 바라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저 다시 볼 일 없는 그 친구들과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출구일 뿐이다. 빠른 걸음으로 다음 여행지를 검색한다. 과거의 색채를 모두 잃어버린 쓰쿠루는 어쩌면 자신이 느꼈던 완전한 집단의 색이 환영과 같은 착각일 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갖는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

Clouds of Sils Maria, 2014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 감독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회한이라는 주제를 좀 더 우아하게 펼쳐낸 걸작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부드러운 내러티브가 온 몸을 따듯하게 감싸주듯 영화다. 마치 알프스의 녹지 위에서 텅 빈 자신을 마주하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주인공 배우 마리아는 20년 전 자신이 맡았던 배역을 신예 젊은 배우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그 상대역을 맡게 된다.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주었던 배역을 젊은 스타에 뺏겨버린 것에 아픔을 느낀 마리아는 배역을 취소하려고 하지만 엄청난 위약금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녀를 옆에서 돕는 매니저는 젊음이라는 유혹으로 마리아를 자극하여 더 큰 혼돈 속으로 몰아넣는다. 늙음이라는 신경증, 20대의 빛나는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마리아는 허구와 현실을 분리해내지 못한다. 

내가 이 영화가 좋았던 점은 허구와 실제, 예술과 삶을 시야 한복판에 놓고 대위하듯 펼쳐나가는 구조에 있다. 그녀가 겪는 혼란이 남의 것이 아니듯 젊음과 늙음이라는 세계의 분리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쉽게 현재 젊은 세대를 걔들의 것이라며 폄하하는 마음에는 젊음을 향한 그리움과 회한이 가득 얹혀져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애달파하며, 현실을 다잡아 매어 씁쓸한 미소를 짓는 현실세계의 모습까지 영화는 인생의 풍랑을 현실적으로 닦아낸다. 화창했던 자신의 그때를 회상하며 둥둥 떠내려가는 젊음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는다.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려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의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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