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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7. 2017

그는 엄마입니다

소설 다섯째 아이 The Fifth Child, 도리스 레싱 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세계문학을 읽는 이들을 자주 목격한다. 문학이 죽은 시대에 책을 펴고 고개를 처박은 그들의 모습은 사랑스럽다. 세계문학전집 중 민음사의 문고본은 디자인과 표지가 가장 깔끔하다. 새로로 길쭉한 빼빼로꽉 모양 책이 마음에 쏙 든다. 민음사 전집은 번역에도 상당한 공을 들여 라이벌 출판사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자랑한다. 오늘 내가 소개하려는 책은 민음사 27번째 도레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다. 

한 술집에서 해리엇은 데이비드라는 남자를 만난다. 키도 크고 그럴싸한 직업을 가진 그는 어쩐 일인지 연말 파티에서도 자기 내면의 영역을 지키고만 서 있다. 흥겨움에 빠진 이들을 무심한 듯 바라보고 있다. 호기심을 가진 해리엇은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다. 이야기의 시작은 그렇다.


 60년대 영국 런던은 혁명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환락의 도시였다. 삶의 일탈과 전통적 가치의 파괴가 급속도로 젊음의 세계관을 변형시키고 있었다. 68 혁명과 히피, 반체제적인 문화, 기성에 대한 반감 등이 젊은 노동자들에게 동요를 일으켰다. 하지만 '데이비드'와 얘기를 나눈 '해리엇'은 그가 그런 ‘시시한’ 부류와는 다른 ‘진지한’ 남자임을 알아차린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단단한 가정에서 자라온 이들로 자부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서로에게 공통된 인생관을 확인한 후 결혼을 택한다.

 모성애와 자식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가정을 일구는 노동의 신성함. 전통의 가치는 시대의 변혁기에 더욱 절실해지는 법이다. 너나 나나 변화를 추구할 때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니까. 신혼부부는 삶의 순리 운운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인생의 방향을 말한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행복한 결혼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두 얌전한 고양이는 만나자마자 잠자리를 가졌고, 첫 번째 아이를 임신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보수적이지만, 행실은 그렇지 않다. 출산이 임박하여 급히 시작된 결혼생활이 순탄할 리 없다. 재정적으로 궁핍한 데이비드는 자신을 버린 친부에게 손을 벌린다. 그렇게 결혼의 가장 큰 장애물인 주거지를 마련한다. 빅토리아풍의 4층 집을 떡하니 융자를 끼고 구입한 데이비드는 손가락으로는 도저히 암산이 되지 않는 월 할부금을 껴앉는다. 은행의 대출제도를 통해 결혼식을 치르고,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성실함은 어찌나 성실한지. 마치 한국의 결혼처럼 겉은 번지르르하니 때깔이 좋다. 이제 꼬박꼬박 월급으로 대출금을 상환하고, 모든 인생이 잘 풀리길 기도하는 일만 남았다.


 두 사람의 결혼은 이제 행복한 결말로 다다를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이웃 친척과 친구들은 두 사람의 집에 찾아와 파티를 열며 축하해준다. 마치 그들의 행복을 탐내는 듯, 조금이라도 나누어 먹겠다는 듯 며칠씩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삶을 공유하려 한다. 부부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그들과 대화한다. 자신들은 더 많은 아이들을 낳아, 풍요로운 삶을 이룰 것이라며 자신한다. 이것이 모든 이들의 표본,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어째서인지 부부의 부모님들은 자식의 결혼생활을 걱정한다. 이 과정에서 도레스 레싱은 부모세대가 구축한 전통적 가정관이 다시 젊은이를 통해 재현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파열음을 보여준다. 의구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굳이 확인하지 않는 게으름. 남들이 다 그렇듯 학교와 가정에서 교육시켰던 전통적 가치관을 자기식대로 수용하는 아둔함. 작품은 어째 이들 가족의 수가 불어날 때마다 곤혹스러운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이름 모를 화자는 부부가 하는 대화를 엿들으며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큰 저택의 정적, 사람들의 근심 어린 시선, 권태라는 이름의 불확신. 세상의 지표들은 쉴 새 없이 부부를 건드리고, 내재된 비극의 기미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세상이 만든 가치는 과연 믿을만한 것일까. 모두가 옳다는 방향으로 아무런 내색도 없이 따라가는 건 아닌지. 그저 바쁜 일상에 지쳐 커피를 마시고, 침대에 누울 때는 스마트폰의 불빛에 깍지가 씌운다. 삶의 아늑한 태두리가 사실은 다 허황된 상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는지. 어쩌면 혼자 스스로를 직시하기 두려운건 아닐는지. 도리스 레싱은 자신의 작가 생활 전체에 걸쳐 관심을 둔 영역인 계급과 차별 문제, 진화와 문명의 역사, 인류의 미래 등 인류라는 종 전체에 걸친 폭넓은 관심이 결코 기성세대와 무관한일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인류가 상기하는 순리라고 일컫어지는 세상의 관념이 흔들린다.

둘째, 셋째, 넷째 아이들은 차례차례 태어난다. 귀여운 아이들을 보며 경제적으로 시달리는 와중에도 위대한 아버지 데이비드는 힘을 낸다. 다산의 여왕 해리엇 역시 부주의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일지라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아이들을 사랑한다. 부침이 있지만 이겨내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러나 점점 지쳐갈 무렵 다섯째 아이가 해리엇의 배에 잉태되며 뒤틀림이 시작된다. 다섯째는 시작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배를 찢는 듯 요동침이 해리엇을 옥죄어 온다. 진통제를 다수 복용하며 아이를 진정시키던 해리엇은 온갖 포악한 상상으로 점철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다. 다행스럽게도 조산을 통해 빨리 배에서 괴물을 꺼내버린 해리엇은 아이를 보자 더욱 기겁한다. 추한 침팬지와 같은 생김새를 지닌 신생아 '벤'은 백일도 되지 않아 걷는가 하면, 자신을 위로해주려던 형제의 손가락을 부러뜨려 버리기도 한다. 또한 이웃집 강아지를 찢어 죽이고는 마치 세상 다 가진 듯 웃어젖힌다. 두 사람의 집을 찾던 이웃 친척들은 더 이상 그들의 단란한 집을 찾지 않는다. 벤의 형제들은 집을 피해서 하나 둘 다른 가정을 찾아 떠난다. 남편은 더더욱 일에 집착하며 가정을 멀리하고, 그녀를 도와주던 양가의 부모님마저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린다.


 한 아이로 인해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해리엇은 넓은 저택에서 생각한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의심할 만한 근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전적인 관점에서 돌연변이가 생산된 것이다. 인류의 어떠한 흐름 속의 유전자가 헤리엇의 배를 빌려 다시금 태어난 것이다. 인간의 진화 중 어떠한 우연의 산물로 잉태된 바이러스다. 또 하나는 다섯째 아이의 탄생은 불안요소를 간직한 결혼생활의 집합체이다. 그들의 섣부른 선택과 결혼, 다산, 융자 등 모든 결격 요소를 상징하는 문학적 존재인 것이다.  


 사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후자가 분명하다. 인류, 문명, 유전자, 진화와 같은 작가가 드러내 놓은 메시지는 시시하다. 사실 진화의 문제에 손을 댄 이야기들은 흔하디 흔하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며 감동받은 지점은 ‘비계획적인’ 임신과 ‘무책임한’ 출산 그리고 '악'의 탄생이다. 벤은 성격 조절이 힘든 지진아 정도의 아이다. 이미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며 힘에 부치던 해리엇은 어리석게도 피임을 하지 않아 또 다른 아이를 가지게 됨으로써 모든 이들을 실망시킨다.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가족들에 실망한 해리엇 역시 정상일 수 없다. 자신이 꿈꾸던 가정은 파탄이 나고, 벤을 버리려 하지만 그 마저도 실패한다. 최선을 다해보려 하지만 벌써 지쳐버린 그녀는 도움을 구할 곳도 없다. 더 불쌍한 것은 태어난 순간부터 괴물취급을 당한 아이 벤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뜻과 맞는 친구들을 만나 집을 떠나지만, 정신병원에 보내지며 개 취급을 당한 가정의 상처를 과연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풀어낼지 우려만 앞선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두 번의 이혼과 미혼모로서의 삶에 익숙한 여성이다. 그녀는 가정을 꾸미고 아이를 낳아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 삶의 행복을 쟁취하지 못하고, 남들이 모두 정해놓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결과가 어떠한지 <다섯째 아이>는 보여준다. 남들이 선택한 인생이 아닌 스스로 자각하여 선택하는 인생을 향한 열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불의 불식 간에 신이 만든 굴레에 묶여 신음한다. <다섯째 아이>라는 텍스트가 현재 절찬리에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 역시 이 어리석음을 답습하는 현대인의 폐부를 찌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빙이 아닐까. 빌어먹을 세상은 웃기지도 않는 것으로 우리를 속이곤 한다.


 <다섯째 아이>해리엇이 자신에게 닥친 불행, 사랑하는 내 자식의 광기에 굴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모든 고통을 감내할 때 문학은 숭고해진다. 그리고 그 견딤의 자세가 실제 한 비극적인 사건의 가해자에게서 발견될 때 우리는 존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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