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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8. 2017

폴 오스터, 뉴욕의 은둔자

소설 <달의 궁전> Moon Palace, 폴 오스터 저

세계적인 소설가 폴 오스터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자면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소설가의 이미지라면 헤밍웨이처럼 괴팍한 노인의 얼굴이거나, 마루야마 겐지처럼 어딘지 모르게 이 세상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마련인데 말이다. 폴 오스터는 기상천외하면서도 고혹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소설들을 펴내는 뉴요커다. 거기에 분위기 있는 눈매와 세련된 옷차림까지 사진 속에서도 근사하다. 모든 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설가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그의 대표작 <달의 궁전>이다.

폴 오스터 형님

어떤 이야기가 날 사로잡는 경우는 대부분 서사의 힘이다. 난 서사가 추동하는 흐름이 소설의 원류라고 보는 사람이니까. 그 반면에 전체적으로 크게 내 기억을 점유하지 못하더라도, 이야기가 만들어낸 특정 장면의 공기가 날 사로잡는 경우도 있다. 소설 속 공간에 한 없이 머무르고 싶게 하고, 이 소설의 제목을 들을 때마다 회한 속에 머무르게 한다. <달의 궁전>이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책장 넘어가지 않아 힘에 부치는 지점들이 여러 군데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서술하는 1인칭 화자인 'M.S. 포그'라는 소년에겐 친밀함을 느낀다. 이는 소년이 처한 불우한 환경을 바라보는 연민 비슷한 감정은 아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소년이 머무르는 허름한 집, 방안의 색상, 책의 먼지가 만들어내는 냄새까지 놓치지 않는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은 내가 생각하는 소설(작은 이야기)이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책을 꺼내 한 장씩 넘기는 소년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때는 1968년, 아폴로 우주선이 달을 점령하고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해다. 이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마르코 스탠리 포그라는 작가 지망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자발적 파산을 선택하는데 당시 미국이라는 사회를 자기 삶의 자궁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일 터이다. 사랑과 광기의 여신이었던 달은 이제 미국의 서부 사막처럼 변해버렸고 아시아의 한쪽에서는 살육이 자행되고 있다. 자학에 가까운 굶기와 노숙의 생활 속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 정체성 찾기에 골몰한다. 좀 어렵지만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라는 철학적 주술을 마치 숙명처럼 받아 든다.

M.S 포그 불과 막 23세를 넘긴 소년이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했지만 앞날에 대한 포부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M.S 포그는 감당하기 힘든 실의 따위에 빠져있다.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고, 아버지는 어릴 적 자신을 떠나 이후로 본 적조차 없다. 그리고 포그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외삼촌이 얼마 전 죽어버렸다. 불행이 동네 강아지처럼 따라다니던 소년은 삼촌의 유산인 작은 셋방과 얼마 안 되는 돈, 삼촌이 남긴 1492권의 책을 가지고 삶에서 종적을 감춘다. 대신 소년은 문학을 장식하는 주인공답게 자신을 찾는 일 따위에 얽매여 있다. 청년 백수의 삶이란 소박하고 단출하다. 소년이 택한 인생의 방법은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은 읽는다는 것은 소년에게 일요일 정원 풍경처럼 침묵의 온전함을 준다. 뉴욕이라는 도시 뒤편에 얽힌 여러 갈래의 골목길처럼 늘 새로운 가능성을 준다.

폴 오스터의 작품들

소년의 불행은 마치 답안지를 작성하듯 질문으로 점철된 덩어리다. 책만 읽는 선비처럼 생계를 멀리한 삶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법. '인간이 달 위를 처음 걸었던 그해 여름'으로 세상이 들끓을 때 포그는 가난이라는 놈과 맞닥뜨린다. 포그는 앞길이 구만리인 젊음을 포기한 체 외삼촌이 남긴 책을 읽으며 어쩐지 이제부터는 미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지상 최대의 쇼가 펼쳐지는 떠들썩한 세상, 그중에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기도 하는 뉴욕에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실의란 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포그는 독백을 통해 도시에 함유된 개인의 고독을 말한다. 조금은 유치해도 참아주자. 중 2병은 누구나 겪은 질환 아닌가. 달걀 두 개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책 속에 뭐라도 있다는 듯 읽고 또 읽는다.

<달의 궁전>을 기분 좋게 읽을 수 있었던 건 허풍을 떨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학의 위대 함이지! 소란 떨지 않아 좋다. 결국 문학으로 투신해봤자 배고픈 생계가 떡하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는 문학의 효용성, 책을 읽는 것의 의미에 대한 폴 오스터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잠시 이야기를 스쳐 지나가며 위로를 얻을 수 있지 모르지만, 결국 이야기 밖 세상에 던져진 사람에게 잘 구운 식빵이 놓여있을 리 없다. 작가 폴 오스터의 검소한 삶을 생각해보면 ‘고물 타자기’ 하나에 의지해 주택의 벽돌 사이로 절박하게 펼쳐지는 일상이 그에겐 글을 쓰는 미덕이 아니었을까. 소주만 마시고 고독을 안주 삼아봤자 소년에겐 근사한 한 끼의 식사만 못하다.

폴 오스터는 스타작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규칙적인 글쓰기로 유명하다. M.S. 포그라는 캐릭터는 폴이 밝힌 대로 자신의 자전적 캐릭터로 보인다. 글을 읽고, 읽어주고, 또 글을 쓰는 것만이 오로지 자신을 지탱하는 소년의 허세는 귀엽다. M.S. 포그의 배고픈 인생은 폴 오스터 자신이 바라는 문학의 역할이란 무용의 역사다. 가혹한 인생, 꼴 같지 않은 세상에 미동조차 주지 못한다. 잠시 사담을 보태자면, 이 책을 읽을 당시 여의도 공원에서 책을 읽다가 산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당시 딱 포그가 집에서 쫓겨나 공원에서 노숙을 하던 대목을 읽고 있었다. 뉴욕의 공원처럼 여의도공원 역시 도시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녹지공간으로 조성되었다. 공원의 쓰레기통과 비둘기들이 먹는 음식물쓰레기를 입에 넣으며 생을 연명하는 포그가 풀밭에 누워있는 듯 현실감이 엄습했다. 녀석에게 페티 우라는 섹시한 중국계 여성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공원에서 거대한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달 착륙과 혁명 그리고 전복의 기운이 흐르는 1960년대 녀석은 공원 안에서 딴 청을 피운다. 책을 읽고 또 비워내며 달의 궁전이라는 중국집 간판을 떠올리는 무용한 녀석. 그런 농담들이 가열한 인생을 배반하는 쾌감을 느꼈다.


이 이야기는 포그라는 소년의 사연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녀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펼쳐놓는 장광설을 듣는 구조로 진행된다. 인터넷에는 여전히 달의 궁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담론들이 풍성한 장을 이루고 있다. 워낙 상상의 범위가 넓어 소설의 리듬을 깨버린다는 의견과 이 상상력만이 폴 오스터를 특별하게 만드는 장치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기계와는 거리가 먼 폴 오스터가 구글링을 통해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지적인 얼굴을 떠올리며 <달의 궁전>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것을 알고나 있을까. 아마 꽤 큰 감명을 받아 다음 그의 소설 속 여신의 이름을 키티 우 대신 미숙이로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산책하는 폴 오스터

작가 폴 오스터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본다. 그는 규칙적인 생활로 유명하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오렌지 주스 한잔, 홍차 한 잔을 마시며 신문을 45분간 읽고, 집 인근 작업실로 간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까지 글쓰기를 계속한다. 내 상상대로라면 새벽의 작업실에서 술이라도 한 잔 하면서 문학적 영감을 주체 못 하여 멈추지 않는 기침을 뒤로한 채 글 쓰는 모습을 연상한다. 하지만 그는 작은 다락방에서 마치 직장을 다니듯 규칙적인 소설 집필을 즐겼다. 넥타이까지 매고 뿔테 안경을 닦아가며 일을 하는 노동자다. 폴은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모눈종이 공책에 글을 쓴다. "더는 손 볼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고쳐 쓰기를 거듭한 끝에 타자기로 원고를 정리한다. 폴 오스터는 "펜은 (컴퓨터 키보드보다) 훨씬 더 원시적인 도구"라면서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공책에 한 땀 한 땀 새겨 넣는 기분이 든다. 내게 글쓰기란 늘 그런 손맛을 느끼는 일이며 육체적인 경험"이라며 글쓰기가 미화되는 현실을 경계했다.

표지 이미지 출처 : 구스 반 산트 감독의 <파라노이드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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