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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9. 2017

지극히 사적인 역사

소설 <투명인간>, 성석제 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저

스테디셀러인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는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이 작품의 화자인 토니는 고등학교 시절 교사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평범한 질문에 '승자들의 거짓말'이라는 답변을 한다. 그리고 T.S. 엘리엇이 말하는 인생의 총체, ‘탄생, 성교, 그리고 죽음’을 모두 마주한 일련의 삶이 지난 후 토니는 다시금 이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대답을 교정한다. 이제는 뭔가 알았다는 듯 얼굴을 구기고는 이렇게 대답한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라고. 중년의 토니는 옛 친구의 죽음과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의 비극적인 소식 안에서 자신의 흔적을 마주한다. 그건 진실에 얼마나 근접할까. 진실이 하나이기는 할까. 토니는 모조리 뒤틀린 기억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금 기억을 바로잡기 애를 쓴다. 주변 지인들을 만나고, 불충분한 문서들을 모아 납득할 수 있는 맥락을 만든다. 그건 진실일까? 그저 삶을 버텨낼 수 있을 만큼의 근사치를 찾아낸 건 아닐까. 진실의 불의 불식 간에 그에게 다가오지만 미동조차 못하고 듣고 있을 뿐이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정치가 요동치니 과연 내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진실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구심만 생겨난다. 주변 사람들은 최근 나라 정세를 걱정하며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만, 난 비슷한 사건들을 연이어 맞이했던 근현대사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 한국의 역사는 지속적인 비극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개선책은 미봉에 그치고 있다. 그저 현재를 잊기 위해 급급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과연 지금은 이 혼란들이 과거에는 없었을까?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강 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비슷한 비극은 최근에도 끊이질 않는다. 정치적 혼란 역시 과거와 다를 바 없이 헌정에 기록되고 있다. 난 근현대사의 좌표 속에서 과연 지금 이 시점에 역사 속에 어떤 방식으로 기록될지 궁금하다. 인터넷 뉴스 포탈에서 지껄이는 자극적 언동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나와 비슷한 생각들이 많아서인지 서점에서 근현대사를 다룬 책들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루하루 휘발되는 인터넷에 질려버린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다. 좀 더 꼼꼼히 이 시간을 점검하는 이들을 난  문헌적 인간이라고 부른다. 역사에 대해 한 마디쯤 거들려는 수많은 명사들의 저서들 중 하나를 골라 내 생가곡 일치시키는 이 과정이 서점을 지탱하는 힘이 아닐까. 난 뜨내기들 말고 한국의 근현대사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지고 노는 두 명의 작가를 소개하려고 한다. 

소설 투명인간, 성석제 저

성석제의 <투명인간>의 첫 시작은 마포대교다. 안전모와 마스크로 머리까지 숨기고 자전거를 타고 나선 투명인간이 화자가 되어 작품을 이끌어 나간다. 나 역시 몇 년 전 즐겨 마포대교를 찾았다. 마포대교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확보된 몇 안 되는 한강 다리다. 난 주로 소설 속 화자처럼 자전거를 타고 마포대교를 지나 용산까지 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실제 성석제 작가 역시 자전거를 타고 마포대교를 많이 오간다고 인터뷰에서 읽은 바 있다. 한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며 자주 마주치는 건 온 얼굴을 꽁꽁 싸맨 라이더다. 미세먼지와 황사에 의해 손상될 피부와 기관지를 보호하려는 것이리라. 작가라는 사람이 다르다는 건 난 그걸 보며 혀를 찼고, 성석제는 얼굴이 없는 투명인간을 떠올렸다. 저 얼굴 없는 사내의 인생에도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상상. 그리고 그가 투명해졌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슬픔. 이제 기억 속에서 지워져 투명인간처럼 역사 속에 희석된 한 인간이 소설로 탄생했다.

성석제 작가의 <투명인간>엔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과 함께 시간을 보낸 한 가족이 등장한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나 <국제시장>과 같은 다 수의 영화들이 택하여 만들어진 역사드라마 장르다. 한국 현대사를 개인의 역사에 녹여낼 때 주안점은 바로 인물의 나이다. 소설은 1960년에 태어난 만수를 통해 21세기 현재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고난의 인간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86년생인 내가 가장 뜨겁게 보냈던 2000년 이후 17년 간의 시간이 약해서 좀 아쉽기도 했다. 성석제가 말하는 역사로 내 인생이 겪어낸 역사를 듣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이 소설엔 기억마저 흐릿한 90년대를 지나 역사책에서 읽은 유신과 베트남 전쟁, 레이건 대통령 방한과 공장 노동자의 투신까지 역사는 차고 흘러넘친다. 영화 <박하사탕>처럼 역사의 한 단면을 거칠게 잘라내어 보는 재미가 있다. 


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저

이 책과 같이 보면 좋을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도 흥미로운 텍스트다. 다루고 있는 시기도 비슷한 데다, 글을 맛있게 쓰는 유시민의 글이라 역사책 답지 않게 술술 넘어갔다. 물론 그의 정치적 편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도 없다고 말은 못 하지만, 유시민처럼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인물의 공과를 거시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작가가 있을까 싶다. 실례로 유시민은 이 책에서 정치인 이인제 의원에 대하여 치적과 오판을 냉정하게 짚어내기도 했다.

뜨거운 감정으로 흘러넘치는 소설 <투명인간>과 유시민의 냉정한 역사서 <나의 한국현대사>를 같이 읽는 경험은 마치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혈액순환을 돕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 <국제시장>이 기성세대들의 정신 승리를 강조하며 약을 팔 때, 근처 교보문고에서는 역사에 관한 냉정한 텍스트가 진열되어 있다는 사실에 감복하게 된다. 심지어 유시민과 성석제는 태어난 해도 거의 같다. 같은 세대의 두 사람이 하는 역사의 기록을 들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맥락 없이 비교를 하자면, 유시민의 기록은 역사에 직접적으로 뛰어든 주인공의 믿음이다. 그가 정의한 역사에는 대표성을 가진 사건 위주로 그 문맥을 짚어나간다. 그는 이 굵직한 사건들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진 장본인이기에 확언하는 문체로 기술한다. TV 프로그램 <썰전>이 부드러운 화법을 통한 설득의 과정이라면, <나의 한국현대사>는 주장과 반목을 두려워 않는 거친 텍스트다.

반면에 성석제가 그린 1960년생 만수라는 주인공은 남들 입으로 빌려 정의되는 역사를 살아온 인물이다. 조국의 민주화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베트남에 참전하지도 않았다. 그저 형이 죽으면 가장이 되었고, 어리석은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IMF에 회사가 망해서 막노동을 했고, 역사가 변해가는 것을 애써 느끼려 하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타협하고 살았다.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하나마나한 공자님 말씀이지만 꼭 흔적을 남기기 위한 삶이 숭고한 것은 아니다. 묵인하고 체념하는 삶에도 아침은 밝아온다.

우리의 현대 역사는 기존 학자들이 너덜너덜하게 다뤘다. 그래서 이 두 권의 책이 신선하다고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석제가 <투명인간>을 통해 기존 작품과의 아귀 싸움에서 승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역사적 배경 뒤로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사라진 주변인들의 삶을 애틋하게 담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화자가 되어보지 못했던 그저 그런 존재들이 울부짐도 성석제를 통해 문학이 되는구나 싶다.


소설 소년이 온다, 한강 저

최근 역사 드라마가 인기다. 영화며, 드라마며, 웹툰까지 가리지 않고, 조선과 고려 신라까지 끄집어내어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근현대사를 맑게 다룬 작품들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아직은 부끄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쉽게 입밖에 꺼내어 놓기 힘들지도 모른다. 역사적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압박도 받을 것이다. 즐기기엔 어둠이 너무 클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와 같은 역사의 특정 사건을 다룬 소설은 내게 소중하다. 책을 읽으며 아버지를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말하길 주저하는 아버지 시대의 삶을 생각했다. 이제는 완전히 투명해져 버린 아버지의 가슴을 떠올린다. 비겁한 역사적 변명에 젖어들고, 회한이라는 그림자에 숨어 감성팔이를 하고픈 것은 아니다. 다만, 이렇게 묻혀 버릴 투명 인간들에 말을 걸어 준 이 소설의 마지막을 생각한다. 만수형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름 없는 남자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표지 사진 :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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