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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19. 2017

하드보일드 막장드라마

소설 사랑에 난폭, 요시다 슈이치 저

매주 동네 미용실을 간다. 짧은 머리를 좋아하는 난 이발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사장님이 손 힘이 좋아서 머리 감겨주실 때 두피 마사지가 끝내준다. 게다가 게다가 슬램덩크 같은 오래된 만화책에 푹신한 소파는 보너스. 킥보드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과 해 질 무렵의 아늑한 느낌들이 미용실을 내 집 같이 편안하게 만든다. 내가 혼자 살아서인지 이런 가정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동네 미용실이 좋다.

악인 悪人, Villain, 2010

우선 미용실 안에 들어서면 소파에 발라당 드러눕는다. 주인 누나와 친해서 커피도 마시고 TV도 같이 본다. 내가 일주일 중에 유일하게 TV를 보는 시간이다. 얼마 전 이 미용실에 갔다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우선 이 미용실은 가정집 2층과 층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그들의 생활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종종 미용실 누나와 시어머니의 고부갈등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흥미롭기 그지없다. 지난주에는 소파에 앉자마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보고 격앙된 웃음을 짓는 사장님의 얼굴을 보니, 오늘은 왠지 머리를 맡기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하지만 소심한 나는 자리에 앉고 만다. 동시에 TV에서는 이 집 고부갈등은 축에도 못 는 더한 아침드라마가 막장으로 달리고, 난 이 초현실적인 광경에 아득하게 빠져들고 말았다. 아 막장 드라마는 이 재미로 보는구나. 난 고개를 연신 끄덕끄덕, 어디에서도 하지 않던 리액션 가득한 말투로 사장님의 고충을 응원했다. 고부갈등이라는 게 모든 결혼한 여자들의 영원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는 건 조금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갈등을 남들에게 얘기해야만 풀리는 이 수다의 향연이 나를 유쾌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아침 드라마가 막장으로 흘러야 하는지 수수께끼는 풀린다. 그들은 이 드라마와 공감하며 맺힌 노여움을 푸는 게 아닐까. 어떤 것이든 세상에 있다면 그 존재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작가 요시다 슈이치

갑자기 막장 드라마 얘기를 꺼낸 건 일본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분노>가 이번 달에 개봉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감독 이상일은 요시다 슈이치 또 다른 소설로 이미 <악인>이라는 영화를 만든 바 있다는 것이다. 영화와 소설 모두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평균 이상의 재미가 있었다. 마치 막장드라마의 자극처럼 눈을 떼지 않고 보았던 기억이 난다. 스팸 통조림의 짭조름한 맛이랄까. 스팸메일의 유해함도 그 중독성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요시다 슈이치의 또 다른 원작 영화 <요노스케 이야기>, <퍼레이드>를 보지 못한 상황에서 단정할 순 없으나, 그의 소설로 만들어진 또 다른 영화 <분노> 역시 동류의 재미를 선사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의 다른 소설도 난 많이 읽었다. 심지어 교보문고 책상에 앉아 하루 만에 다 읽은 작품도 있다. <악인>으로 시작해서 <퍼레이드>, <7월 24일의 거리>, <사요나라 사요나라>까지 많이도 읽었다. 내가 일본 문학을 읽으러 이리저리 놀러 다니던 시절부터 2년에 한 번 씩은 꾸준히 이 작가의 신작과 만난 셈이다. 요시다 슈이치는 특유의 근면함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온다 리쿠,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다작을 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오늘 소개하려는 작품은 가장 최근에 읽은 <사랑에 난폭>이라는 작품이다.

소설은 결혼 8년 차 주부 모모코의 일상에서 시작한다. 아이는 없지만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섬기며 남편 마모루만 바라보고 살았다. 남편이 열여섯 살이나 어린 애인과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눈치 체면서 극의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가정을 붙잡아 온 마음이 서서히 무너지고, 이상한 것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가령 땅을 파내고, 집에 틀어박혀 온갖 망상을 늘어놓는 기행이 반복된다. 끝엔 칼부림에 협박까지 하며 남편을 도망가게 만든다.
소설 사랑에 난폭, 요시다 슈이치 저

세상에 이 소설의 소재를 나열해보자. 그 뻔한 불륜, 지나치게 어리고 당돌한 내연녀, 아이가 없는 부부, 고부갈등, 남편을 향한 지극정성, 살림밖에 모르고 살았다고 한탄하는 전형적인 주부의 모습까지. 노골적으로 한국 막장드라마의 요소들을 가져다가 욱여넣은 모양새다. 아마도 요시다 슈이치는 한국 드라마를 보며 소설을 쓴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이 통속의 장르에서 새로운 것을 집어낼 수 있을까. 소설의 화자 모모코는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후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건넌방 바닥을 파고 또 판다. 전문 장비까지 사서 방을 뚫어대며 온갖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모모코의 기이한 행동은 작품을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린다. 그리고 시점의 전환, 과거의 회상이 현재로 엄습하는 반전, 독자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그 모든 반전에도 불구하고 새롭진 않다. 다만 내가 믿었던 모모코가 정말 미친 여자일 수도 있어. 그녀가 하는 생각이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몰라. 그런 불안감은 주인공에 정을 주었던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말 그대로 난폭한 결말을 맞이한다. 빛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속으로 여자를 밀어 넣는다.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은 여성 따위 구원할 맘이 없다. 이 소설이 막장 드라마의 공식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여성을 구원하지 않는 냉정함이다.

영화 <분노>  怒り, RAGE, 2016, 이상일 감독

좋은 소설이란 게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이도록 한다고 믿는 사람에겐 이 소설은 따분하다. 하지만 그 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가 왜 반복해서 만들어지냐고 묻는다면 그건 장르의 컨벤션을 익숙하게 느끼는 고정팬의 존재 덕분이다. 요시다 슈이치는 남녀 관계를 미스터리한 감정 상태와 시간의 배열을 뒤흔드는 구조적인 배열을 통해 정보의 접근을 능숙하게 조율한다. 가령 꿈과 사실의 긴장관계, 행동과 회상의 혼돈 등 의도적인 정보의 제한이 주는 서스펜스가 돋보인다. 내가 동네 미용실에서 갈등의 드라마를 찾듯, 응원하는 맘으로 부인과 남편의 입장을 생각하며 읽고 싶은 분들에겐 더 나은 이야기로 느껴질 것이다.

다 적고 보니 왠지 모르게 TV 드라마에 대한 비하가 난무하는 글이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 결혼하면 이 통속극의 주인공이 되려나. 막장은 뭐니 뭐니 해도 남 얘기일 때 구경하는 재미가 큰 건데. 다음 주에 <분노>를 구경하러 가야겠다.


표지사진 : 영화 이상일 감독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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