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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r 23. 2017

도시의 숨죽인 분노

단편집 <제발 좀 조용히 좀 해요>, 레이먼드 카버 저

평일엔 책 읽을 시간이 빠듯하다. 아침 출근해서 업무 시작 전 , 점심 먹고 10분, 잠들기 전 10분. 이 시간들을 독서에 내어주려고 늘 노력한다. 분절된 여유시간을 핸드폰만 문지르며 보내긴 싫어서 애쓴다. 잠들기 전에는 사회과학 책이나 안나 카레니나를 읽긴 싫다. 단어 하나가 목구멍을 넘어가기 힘든 책들은 주말로 미뤄둔다. 평일 하루는 늘 일과에 지쳐있는 상태라 내키는 소설을 집어 들게 된다.

평일 업무 시작 전이나 점심시간에는 단편 소설이 딱이다. 레이먼드 카버, 안톤 체 호프, 에드가 엘런 포처럼 단편을 잘 쓰는 작가들을 곁에 둔다. 이 셋 중 특히 카버의 단편을 유독 좋아한다. 고단한 삶과 술이 주는 위로가 자주 등장하는 그의 소설에서 개연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도, 화장실에 앉아서도, 피부과에서 대기 중일 때도 술술 읽힌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은 4권밖에 되지 않지만, 늘 곁에 두고 애용한다. 카버의 단편은 분량이 딱 평일 자투리 10분에 읽을 수 있는 양이다. 몇 장 넘기다 보면 마음이 툭하고 떨어지듯 이야기는 종결된다. 그것이 카버의 생전에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묘한 위로를 받는다. 빨리 쓰고 빨리 돈을 벌어야 했듯, 나 역시 빨리 읽고 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

영화 버드맨 중 한 장면, 간판의 연극제목이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이다.

최근엔 영화 <버드맨>에서 카버의 단편을 소재로 하여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마치 인생의 경구처럼 되뇌듯 카버의 소설을 읊조리는 장면들을 보며 영화 외적으로 반가웠다. 주변에서 카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예 없다 보니 영화에서라도 조우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카버의 책은 비교적 최근 개정판이 나온 문학동네 판 <대성당>이다. 몇 해 전 이 책을 구입한 후 자랑하듯 사무실 책장에  꽂아 놓았는데 옆자리 직원이 성당 다니냐고 묻더라. 딱 보기에 종교 서적으로 보였는지 무구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이런 글을 통해서라도 카버를 전하고 싶다. 내가 오늘 소개하려는 책은 그의 중기 대표작인 <제발 조용히 좀 해요>다. 원제는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 다. 초기엔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해줘’로 출판되었다. <대성당>과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보다 좀 더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단편집이다. <대성당>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의 위로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면, <제발 좀 조용히 좀 해요>라는 제목답게 세상에 잠재한 폭력성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집필 당시 카버의 피폐한 재정상태와 회의적인 결혼관을 들어볼 수 있다. 문체는 일러스트처럼 가볍고, 기이한 평온함 속 일그러진 누군가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에서 인상적인 이야기는 <이웃 사람들>이다. 이 이야기는 화자의 이웃 부부 '스톤' 네가 해외여행으로 집을 비우면서 주인공인 밀러 부부가 대신 그들의 집을 맡아주면서 전개된다.

사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여행을 떠난 스톤 부부는 밀러 부부보다 여유로운 편이다. 일과 여행을 겸하는 라이프스타일도 그렇고, 집도 좀 더 넓고 인테리어와 가구도 유럽식으로 고가의 품목들로 채워져 있다. 그에 비해 밀러 부부는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집에 처박혀 잔업을 하는 주말에 여행 간 부부의 집을 맡는다는 건 열 받는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밀러 부부는 배운 사람들 답게 친절을 베푼다.

이 이야기가 재밌어지는 건 부부가 번갈아가며 스톤 네를 출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고양이 밥 챙겨주러 간다고 했지만, 점차 스톤 부부의 프라이버시에 관심을 보인다. 스톤 부부의 버뮤다팬츠를 꺼내 입고, 드레스와 속옷까지 입어본다. 술을 훔쳐 마시고, 부부의 은밀한 사진첩을 꺼내보곤 킥킥거린다. <이웃 사람들> 속 밀러 부부는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정상적으로 보이는 부부이다. 교외에 있는 아파트는 번듯하고, 멀리서 본 그들의 모습은 이상적인 소시민의 모습 그 자체다. 하지만 카버는 그들에게도 균열이 있음을 확신하듯 껍질 속 꿈틀거림을 포착한다. 스톤 네 아파트라는 미지의 영역은 익명으로 감싼 도착倒錯의 공간이다. 이야기는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심각한 얼굴을 하고 서로를 마주 보는 밀러 부부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 작고 단단한 이야기에는 텅 빈 가슴을 마주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늘 먹고 살 방법을 고민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자체에 내재한 폭력성, 욕망이 분출하는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에 있음을 이 짧은 단편이 보여주고 있다.


책 후반부 이 책의 표제작인 <제발 좀 조용히 좀 해요>를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책장을 덮는 손을 주저하게 하고 한없이 긴 날 숨을 유발하는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안정적인 직장과 유복한 가정을 지닌 부부는 오늘도 아이들을 재우고 와인 한잔을 하며 일과를 마무리하려 한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들은 꺼내지 말아야 할 과거를 끄집어낸다. 좀 취해서 실수한 걸까. 아마도 애써 피해온 응어리를 풀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의 작품 중 유독 부부의 이야기가 많은 건 10대 시절부터 시작된 결혼과 그에 따른 생활고, 고단한 집필 활동의 영향이 클 것이다. 카버가 마감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해 집 앞 트럭에서 몸을 웅크리고 집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카버는 트럭에서 글을 쓰며 자신의 집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혼란이 있는 곳. 벗어나고 싶은 책임감이 내재된 곳.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 이 단편집에 실린 이야기들 속 부부들은 그 당시의 카버의 입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치명적이다. 늘 겉보기에는 중산층의 전형으로 비치지만 그 안쪽에는 썩은 악취가 풍긴다. 그것은 이 세상이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안에 귀를 막고 싶은 소음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카버가 가진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다. 카버는 이 작품을 통해 교수라는 직함도 달고, 작품도 꽤 많이 팔려 생활고를 해결하게 된다. 이 또한 이 책이 가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생활고에서 벗어나자 이혼을 택했다. 새로운 결혼생활은 행복을 불러오지만, 언제 전처럼 깨질지 몰라 불안감을 피할 수 없었다.

제발 좀 조용히 좀 해요, 레이먼드 카버 저(영문판, 개정판, 한국판)
2년 전 아내가 술에 취해 다른 녀석이랑 차를 몰고 나간 사건이 다시 도마 위로 오른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꼭 이 얘기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아내는 아둔하게도 그를 자극할만한 숨겨진 비화를 공개하고, 그는 분노를 못 이겨 집을 뛰쳐나간다.

애초에 탄탄해 보였던 결혼생활은 깨진 접시처럼 파편만 남기고 사라진다. 이 도망간 남자의 마음속에 잠시 귀를 기울여보자. 그는 사실 결혼을 시작하기 전부터 자신의 선택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의 일탈은 하나의 징후가 되어 그에게 도망갈 구실을 안겨줬을 뿐이다. 즉 그는 원래 이 집에 없어야 할 사람이었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달아난 것뿐이다. 남자는 야밤에 이리저리 배회한다. 뭔가 다른 자극제를 찾아 정처 없이 찝쩍거린다. 하지만 그는 돌아올 것이다. 그가 다니던 직장, 그가 융자를 걸어 산 집, 아직은 아이들에게 충실한 아내, 그리고 벌거벗고 그에게 다가올 그 여자를 버릴 수 없다. 그는 자신이 가진 사회적 기득을 놓을 생각조차 없으면서 공연이 아내를 비난한 것이다. 그들의 삶은 복구되지 않을게 분명하다.


표지사진 : 영화 <버드맨>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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