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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5. 2017

잔혹한 동화 속으로

소설집 맛 (Taste), 로알드 달(Roald Dahl) 저

돌아가신 양반에게 이런 말 뭐하지만, 이 아저씨 얼굴을 좀 봐라 고약해 보인다. 키가 2미터가 넘고, 구부정한 어깨를 지닌 것이 애들한테 으스스한 옛날이야기 하나 해주고는 잡아먹을 것 같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작가로 유명한 '로알드 달'은 중고서점에서 책을 들춰볼 때부터 개 두 마리를 안고 있는 괴기한 사진으로 내 눈길을 끌었다. '애드가 앨런 포' 상을 두 차례 수상했고, 전미 미스터리 작가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어린이 동화작가? 이게 뭔 말이람. 게다가 그는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결국엔 작가가 됐다는 이색 이력을 가지고 있다. 상마초 해밍웨이 님이 전쟁영웅이라는 걸 떠벌이고 다녔다는 사실로 미뤄보아 군인이 작가가 되지 말란 법이야 없다. 하지만 동화작가라니 로알드 달은 참 독특한 양반이다.

동화작가 로알드 달

로알드 달은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전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진실을 조금 흥미 있게 만들 뿐이죠. 전 한번 한 약속은 깨지 않습니다. 그저 살짝 바꿀 뿐이죠."

기상 천 외한 이야기를 자주 써내는 그의 작품들은 현실이라는 맨밥에 MSG만 살짝 쳐서 감칠맛을 낸다. '마틸다', '제임스와 슈퍼 복숭아', '찰리와 초콜릿 공장', ‘그렘린’과 같은 그의 히트작들을 보면 아예 밥에 고추장을 한통은 넣은 것 같지만, 동화작가니 장르 특성을 고려하기로 하자. 이 특유의 낙천성과 이야기 기질 덕분에 그의 작품들은 다수가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되었다.

그가 작가로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건 분명 아동문학 부분이지만, 정작 작가로서 명성을 취득하기 시작한 계기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집을 내면서부터다. 그중 하나가 내가 어제 헌책방에서 사 읽어버린 <맛>이라는 10개의 단편들을 모은 소설집이다. 그의 소설들은 당시에나 지금에나 수많은 어른들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마련한 푸짐한 상차림 같다. 현실에 지친 샐러리맨이 넥타이를 느슨하고 풀고 잠시 의자를 재껴 편안하게 취할 수 있는 소설들이 <맛>이라는 소품집에 모여 있다. 10개의 반찬을 한입씩 베어 물다 보면 청량감이 마치 여름날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다. 그의 작품이 발간 당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꺽다리에 못생겼던 로알드는 오스카상 수상에 빛나는 여배우(퍼트리샤 닐)와 결혼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정치가, 외교관, 스파이들까지도 친구로 삼을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되었다. 역시 상이란 게 좋고, 돈이란 게 참 맛있구먼 쩝.


로알드 달의 <맛>

군인들은 다 안다 넓게 삽질해야 깊게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아도 경험으로 채득 한다. 이건 철학자 스피노자 님이 하신 말씀이기도 하니 진리라고 하자. 새로운 경험을 하는데 거부감이 없고,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두어야 작가로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말은 비단 삽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로알드 달은 다양한 그의 경력처럼 음식, 포도주, 그림, 문학, 경매, 살인, 음악, 고고학까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거침없이 받아들이고, 무분별하게 작품에 포개어 넣었다. 이런 무모함이 아이들의 숙면용 문학으로 교육적인 책을 고르는 부모들의 마음을 끌었으리라. 하지만 결국엔 읽는 사람도 재밌어야 책이 팔린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통해 성인들이 읽어도 책에 침을 묻힐 수 있는 책으로 인정받았다.

한국이 예부터 국영수만 죽어라 강요하고, 유럽 역시 한 가지만 잘해도 성공한다는 교육 논리를 밀고 나갈 무렵부터 로알드 달은 팔불출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그를 담당한 교사들은 반감을 숨기지 않고 로알드 달을 비난했다. 교사들은 생활기록부에다 '정신이 멍한', '이상하게 답답하고 느린', '어린아이 같이 떼를 쓰기도 하고', '퉁명스럽게 구는'과 같은 거의 막말에 가까운 저주를 퍼부었다. 요즘처럼 창조와 창의를 밥 먹듯 외치는 고위 관료들이 정작 되바라진 놈을 보면 못 참듯이 그 역시 어려서부터 주류 밖 악동으로 자라온 셈이다.  로알드 달의 히트작인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조니 뎁'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기억되지만, 내겐 섬뜩한 느낌을 주는 지점들이 적지 않은 작품이었다. 놀랍고 신비한 분위기 속에 초콜릿 강으로 풍덩 빠진 뚱보소년은 하늘이라도 날아갈 것 같지만, 이제 좀 지칠 무렵에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자 당황한다. 결국 구해 달라는 소년의 절박한 청은 어머니에 의해 잔인하게 묵살된다. 그리고 '조니 뎁'은 천진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평생 동화작가로 살아온 로알드 달, 그가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기계로 빨아올린 다음 조각내어 초콜릿으로 만들어진 다음 세계 각국으로 보내질 것’이야.

아니 이게 애한테 웃으며 할 말인가. 이는 곧 로알드 달이 어린 시절부터 가져온 사회적 반감과 세상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꿈꾸는 어린이들의 선동자임을 보여주는 증거처럼 보였다. 사회적으로 억압받은 기질이 동화 속에서 잔혹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로알드 달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얘들아 무럭무럭 자라서 뭣 같은 어른들한테 복수하자. 어른 말 잘 들어봐야 소용없어 결국 세상 다 혼자 사는 거 아니겠니.

소설 얘기로 들어가 보자. 로알드 달의 <맛>은 표제작부터 시작해서, 전 작품이 반전에 의해 평온하던 이야기를 전복시키는 기법으로 구성된다. 술술 읽히던 이야기가 마지막 몇 장에서 탄력을 받더니 지난 책장의 내용을 복선으로 삼아 이야기를 뒤집는 쾌감이 있다. 그 반전의 대부분은 능수능란한 거짓말을 하던 주인공이 결국엔 생각지도 못한 이에게 탄로가 나 골탕을 먹는다는 다소 교훈적인 내용으로 귀결된다. 그 거짓말이 대부분 범죄 거나 상대를 눙치는 기만에 가까워 소재만 어른으로 바꾼 동화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의 작품이 영화화된 흔적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물론 표제작인 <맛>이다.

"아냐, 아냐, 이건...... 이건 아주 상냥한 포도주야. 새침을 떨고 수줍어하는 첫맛이야. 부끄럽게 등장하지. 하지만 두 번째 맛은 아주 우아하거든. 두 번째 맛에서는 약간의 교활함이 느껴져. 또 좀 짓궂지. 약간, 아주 약간의 타닌으로 혀를 놀려. 그리고 뒷맛은 유쾌해. 위로를 해주는 건 여성적인 맛이야. 약간 경솔하다 할 정도로 너그러운 기분. 이건 생 쥘리엥 코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어. 이건 틀림없이 생 쥘리엥의 포도주요."

이 작품에서 포도주의 생산지역과 품명, 연도를 맞추는 내기를 한 남자가 그 맛을 묘사하는 부분이다. 다소 오글거리나 이 분석 작업은 듣는 이의 간을 쥐락펴락한다. 이 내기가 집 두체와 포도주 소유자의 딸을 대상으로 한 대박 거래였기 때문이다. 결국 판돈이 커진 이 사건이 미리 포도주 정보를 훔쳐본 뒤 능청을 떠는 사기꾼의 범행으로 밝혀지며 소설은 끝이 난다. 이 작품을 읽으며 로알드 달이 서스펜스와 반전을 가지고 노는 극작술에 얼마나 통달한 작가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능청스러운 대사에 잘 녹아있는 지식의 허영과 허세를 비틀어 까발림으로 해서 해학을 바탕으로 한 경쾌함이 있다.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세상의 규율과 법칙이라는 게 탐욕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하나의 덫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일종의 허무주의, 불치의 인간사회의 썩은 군상 들일뿐이다. 로알드 달은 어린이들에게 추앙받는 작가였지만, 어른들에겐 봐 커보니 별거 없지 라며 말을 거는 무심한 목사와 같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벼운 어깨 뒤로 사실 세상 만수에 통달한 무림의 고수였다는 뒷얘기가 들려온다.

로알드 달과 결혼한 배우 <퍼트리샤 닐>

사실 이런 영국인 특유의 블랙유머가 낯설진 않다. 최근 폭풍 구독 중인 미국 출신의 영국 거주 저널리스트인 빌 브라이슨의 작품들이 그의 유머와 유사한 데가 있다. 건방지고 짓궂은 데다 무지하게 독설을 퍼붓지만, 아는 게 많아 늘 시니컬한 시비조의 농담을 날리는 영국식 작가들 말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한 줌의 유머를 퍼내 세상에 실어 나르는 그들의 삐딱함을 흠모한다. 글이란 게 지루해지면 승산이 없는 거 아닌가.

"내 등장인물들을 흥미롭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가진 좋은 성격이나 나쁜 성격을 과장해서 보여주는 것이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심술궂거나 못됐거나 혹은 잔인하다면, 그를 매우 심술궂고, 아주 못되고, 아주 잔인하게 그려야 한다네. 그래야 아주 재미있고,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다네." - 생전의 짓궂은 로알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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