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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6. 2017

논픽션의 빙벽을 녹인 입김

희박한 공기 속으로, INTO THIN AIR 존 크라카우어 저

얼마 전 아사다 마오가 은퇴했다. 일본 피겨스타로 김연아와 라이벌 관계를 맺어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귀여운 외모와 일본인 특유의 말투가 사랑스러운 선수지만, 김연아와 주니어 시절부터 이어져 온 관계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 아사다 마오하니 안도 미키도 생각난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의 언니뻘의 선수로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두 천재 앞에 여과 없이 무너졌다. 코치와의 스캔들, 출산 후의 투쟁적인 열연으로 말년의 선수생활을 혹독하게 보냈다.

한 세대를 풍미한 피겨스타 아사다 마오는 현역은퇴를 선언했다.

아 김연아 선수의 피겨 스케이팅을 얼마나 열심히 봤던가. 세계랭킹에 오른 선수들의 영상도 찾아보고, 이론도 공부하면서 정말 재밌게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러시아의 세계선수권 독식 이후 관심이 뚝 끊어지면서 피셔 스케이팅은 마치 여름 날의 기억처럼 아득한 곳으로 사라졌다. 김연아가 없었으면 피겨스케이팅에 관심을 가졌을 리 없, 러시아 요정들이 빙판위에서 몇 바퀴를 돌던 ‘어우 어지러워!’하며 채널을 돌렸을 테지. 하지만 그녀가 몇 년간 빙판위에서 쌓아온 커리어를 따라다니면서 이제 악셀과 토룹의 점수까지 계산하고 있다. 어떤 것이든 매개가 없이 나서는 경우는 흔치 찮다. EPL은 박지성이 그랬고, 영화감독 로버트 저메키스가 내게 영화적 세상을 선물했다. 임사체험을 소재로 한 농담집을 펴넨 커트 보네거트 영감은 말한다. "나는 거짓말을 지어냈다. 덕분에 사람들은 모두 잘 지냈고 비참한 세상은 낙원이 되었다."


난 요즘 에베레스트의 로체산맥과 쿰푸 빙폭의 얼음절벽 등을 자주 떠올린다. 특히 침대에 누워 자주 그 높은 지대를 상상하곤 하는데, 이건 다 '존 크라카우어'가 쓴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읽게 되면서 시작된 증상이다. 스포츠가 스타를 향한 언론의 보도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끌어온다면, 작가는 오로지 이야기의 깊이만으로 승부한다. 그리고 존 크라카우어는 기자 특유의 지독한 냉철함으로 산악등반이라는 낯선 장소로 날 인도했다. 저자 존 크라카우어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아웃사이더'라는 산악잡지의 객원편집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기자로서의 정체성을 잔뜩 끌어 앉은 르포르타주 작가로 더 유명하다.

영화 에베레스트

<희박한 공기 속으로>에는 1996년 5월 10일 ‘로브 홀’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가이드의 인솔 아래 ‘존 크라카우어’가 직접 에베레스트에 등산한 과정이 담겨있다. 이 과정에서 로브 홀을 비롯한 12명의 동료들은 불의의 악천후를 만나 사망한다. 저자는 당초 상업등반대가 초래한 에베레스트 등산의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 기사를 작성하려고 했다. 고가의 돈을 주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네팔의 봉우리들은 그들이 버린 엄청난 쓰레기에 신음한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그의 인생을 바꿔버린 충격적인 재해가 발생함에 따라 산학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탄생했다.


존은 당초 이 책의 출판 후에 많은 비난에 시달려야했음을 고백한다. 사고로 죽은 이들을 이용해 돈벌이를 했다는 비난이었다. 비슷한 경우로 1994년 퓰리처상 수상 사진인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케빈 카터는 당시 사진을 찍고 독수리를 쫓아냈다고 해명한 바 있지만, 사람들은 그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몇 년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렇다면 존 크라카우어 역시 그 못지않은 죄를 파렴치한인가.

영화 에베레스트

난 저널리즘의 영역과 직업 윤리의 잣대를 헷갈려하는 대중을 보면 짜증이 난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건 인간이지 직업의식이 아니다. 사실의 전달 그리고 그 안에서 줄기를 잡아내 독자가 천착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드는 기록문학과 사진은 묘하게 닮아있다. 저널리즘 윤리는 자신이 프레임에 담은 피사체가 빚어내는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것에 인간으로서의 프레임을 가져가면 초점은 흐려진다. 작가는 그가 가진 무기(펜, 카메라)로 세상을 향해 공헌할 수 있다. 가령 극단적인 예를 들어 독수리와 수단의 소녀를 프레임에 담지 않고 그저 쫓아내기만 했다면 우리는 아프리카 난민의 삶을 생각할 기회는 사라진다.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단순히 그들이 이런저런 사고로 죽었다며 결론짓는 섣부른 글이 아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등산이라는 지난한 행위가 지닌 무게의 총합을 헤아리는 섬세한 글이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에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탐험대원들, 이 중 12명이 사망했다.

책은 에베레스트 등산로가 만들어진 역사부터 시작한다. 수천만 년 전 인도대륙과 아시아대륙이 서로 융기해 오른 산맥인 에베레스트는 그간 수많은 이를 죽음과 영광 안에 머물게 했다. 에베레스트는 티베트어로 '초모룽마, 우주의 어머니 혹은 세계의 여신'이라는 뜻이다. 네팔어로는 '사가르마타, 하늘의 어머니'로 불린다. 이처럼 가장 높다는 상징은 신의 영역으로 귀결되고 인간들은 그것에 도전하려 무던히도 억지스런 도전을 강행한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에는 사건의 전개 뿐만이 아닌, 등정 장비와 기술이 발전하게 됨으로서 생겨난 상업등반대의 역할과 그 속에 산악인들이 가진 고민들이 잘 녹여져있다. 마치 추리문학을 읽는 듯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있는 현상들과 마주한다. 경쟁과 갈등, 죽음이 만연한 이 과정을 왜 지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들이 무거운 짐 속에 차곡차곡 쌓여진다. 고산지대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들에 현실적 판단을 해야 하는 비정한 그들의 모습에서 비현실적인 괴리감을 감출 수 없다. 그리고 셰르파라는 지독하게 타인으로 느껴지는 네팔 현지인 가이드의 정체를 존은 마치 미스터리 소설 속 복심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는 재주를 보여준다. 내가 김연아를 보지 못했으면 알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스핀 동작들처럼, 존 크라카우어가 책으로 담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산악의 세계를 난 소중하게 읽어 내렸다. 자자는 성실하게 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배경을 담아 왜 그곳에 오를 수밖에 없는지 밝혀내는 전개를 통해 단순히 12명의 죽음이라는 관념에 서사를 만들어냈다. 눈 폭풍 안에서 얼어버린 그들의 희미한 죽음을 다시 세상위로 그려 넣었다. 난 그의 침착한 문 감동을 받았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방영된 칸첸중가 오은선 등반 논란

얼마 전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산악인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에 대한 논란을 기억한다. 논란은 그녀가 정상에 자신의 깃발을 꽂지 못했고, 정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인증샷이 과연 어디였는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내 보기엔 여기나 저기나 별 차이도 없구만 왜 그렇게 정상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몇 미터를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재도전을 하는지 알게 되자 그녀를 둘러싼 논쟁이 단순히 시비 거리가 아니라 생계의 문제임을 인식했다. 보는 눈이 달라져버렸다.

“산악인들은 기업체들로부터 계속 후원을 얻으려면 판돈을 자꾸 높여야 한다. 다음 등반은 먼젓번보다 좀 더 어려운 것이 되어야 하고 좀 더 극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건 일종의 악순환 같은 것이 되어 결국에 가서는 더 이상 등반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상업화와 물질화에 물든 에베레스트, 산악인들이 가진 자존심을 지키는 문제 등 그들의 무모한 도전에는 사회적으로 짚어줘야 할 많은 얘깃거리가 함께한다.

‘로브와 개리는 조만간 자기네가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할 수 없게 되거나 아니면 불운한 사고를 당하든가 죽든가 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발언들은 실제 그들은 스스로 이 참극을 예측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제동을 걸어줄 무언가를 찾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올라야 할 사람은 벌써 한참 전에 다 올랐으며, 이제 언론이 자극을 받을만한 지점은 일반인의 등산과 사고로 인한 사건 뿐이라는 건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섬뜩한 생각이었다. 기다려왔던 사상이 벌어졌고, 상업등반대라는 죽음이라는 뉴스거리를 만들어내며 영화화 되기에 이른다.

영화 에베레스트

작년 <에베레스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이 책을 원안으로 해 만들어졌다. 제이크 질렌할과 키이라 나이틀리가 출연한 이 작품은 매끈한 만듦새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모든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재난영화라는 장르로 포장됐다. 이 책이 다시 스테디셀러에서 스크린셀러로 표지를 달리하고 판매고는 상승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산악인과 일반인의 죽음으로서 그들이 살려야 했던 직업 등산인의 운명을 다시 군중들 앞으로 끌어왔다. 그것으로 모든 소임을 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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