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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16. 2017

노르웨이 숲의 소녀

소설집 <렉싱턴의 유령>, 영화 <팔로우>

고개가 하늘로 젖혀지는 어느 5월, <하루키 뮤직룸> 공연을 다녀왔다. 단 1회 공연이었기에 재즈와 클래식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은 가득 찼다. 하루키라는 이름이 붙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공연장을 찾을 놈들이 상당하는 건 알았지만, 하루키의 음악 취향을 앞세운 공연에 이런 인파가 모일지 예측하지 못했다. 사실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다. 소설 없이 듣기에는 흥미가 안 가는 곡들이 대부분이다. 다만 라이브로 '존 콜트레인'과 '빌 에반스'의 곡을 듣고, 요즘 잘 나가는 디토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그것도 세종문화회관에서, 심지어 사회자 이동진의 썩은 농담까지. 재즈평론가 황덕호 선생의 글을 평소에 좋아했다면 더더욱 놓칠 수 없는 공연 이리라. 재즈에 대한 배경지식은 잠시 잊고 공연 그 자체에 몰두할 수 있는 자리였다.

당시 공연을 보며 느낀 건, 하루키의 취향이라는 것이 결국은 혼자 놀기를 위한 것 아닌가 싶더라. 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재즈 피아니스트의 감각적인 연주는 오로지 홀로 거실 의자에 앉아 회한에 젖은 남자의 배경음악일 뿐인 것이다. 19살 소년이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빌 에반스의 서정적인 연주곡 ‘Waltz for debby’를 듣고, 스위스 전원풍경을 배경으로 다자키 쓰쿠루는 리스트의 세기말적인 불안감을 품은 곡 ‘르 말 뒤 페이’를 듣는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녀석들은 언제 어느 순간 태어난 지 알 수 없는 음악들을 들으며 개인의 취향을 고수한다. 혼자 소설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러다 지치면 레코드판을 올리는 외로운 '토니 타키타니'씨들이 공연장에 그득 차 있었다.

공연을 즐기고 나서 그간 잊고 지냈던 하루키의 책들을 중고서점에서 몇 권 구입했다. <렉싱턴의 유령>과 <태엽 감는 새>3권짜리 세트를 가지고 종로의 한 커피집으로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교실 뒷자리에서 숨죽이며 읽었던 작품인데 도통 생각이 나질 않더라. 유독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된 7편의 단편은 ‘토니 타키타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로운 소설처럼 느껴졌다. 


하루키는 <렉싱턴의 유령>을 집필할 당시 거품경제에 휘황찬란한 일본에 막 귀국한 상태였다. 때는 91년 오랜 유학생활 끝에 다시 일본에 정착하려 했지만 뭔가 뒤틀린 공기를 가진 일본을 마주했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서양문학에 심취해왔던 하루키는 전공투 세대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렉싱턴의 유령>을 통해 이질적인 일본 사회에서 떠돌이의 심정을 작품에 녹여냈다. 어려서부터 유독 미국 문학을 동경했던 하루키는 당시 일본 문단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나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류라는 소리를 들었다. 현재 그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놀랄만한 일이지만, 90대 초 일본은 하루키를 군중 속의 고독으로 밀어 넣었다. 늘 겉도는 그의 발걸음은 경제 불황에 시끌 대던 일본인들과 스스로 독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 우리가 아는 평행우주론에 가까운 하루키의 문학적 세계관은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다이후 그의 작품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탈 일본화의 경향을 보였던 것도 마찬가지다. 

7편의 작품은 본디 쓸쓸하고 공허하다. 일본 문학계의 괄시와 붕 뜬 일본 사회의 천박함을 애써 모른척하고 쓴 탈 국가적 소설이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모호한 세계관과 미국 문화에 대한 맹목적 동경이 곳곳에 배어있다. 인물들의 취미와 생황 패턴은 단순하다 못해 심심하다. 재즈와 클래식, 세련된 옷과 서구식 요리들이 인물을 위로해 줄 뿐이다. 일종의 집착처럼 느껴지는 이 취향에 대한 세밀한 묘사들은 인물을 설명하는 단서로 제공된다. 인물들은 누군가와 얘기하고,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의견을 내비친다. 하지만 결국엔 혼자라는 명제 앞에서 늘 덤덤한 자세를 취할 뿐이다. 새벽에 깨어 집 안에 유령이 있다고 생각한 남자는 그 사실을 자신만 알고 집주인에겐 숨긴다.(렉싱턴의 유령)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뒤에 그녀가 남긴 수천 벌의 명품 옷에 갇혀버린 남자는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가는 환상을 가진다.(토니 타키타니) 친구가 파도에 휩쓸려 죽어나가는 모습을 방관해 평생 악몽에 시달리는 남자의 이야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장소가 있다고 믿는 남자를 그린 이야기에는 절망적 고독이 강하게 담겨있다. 인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암흑의 깊이란 어느 정도일지 심문하는 태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후에 집필한 <태엽 감는 새>를 통해 보여준 개개인의 우물의 깊이가 이 작품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루키 뮤직룸 공연에 이어 그의 어두운 단편들을 읽다 보니 우울한 기분에 커피만 계속 주문하게 된다. 혼자 집에서 읽기엔 어쩐지 지나치게 쓸쓸한 작품들이다. <렉싱턴의 유령>을 하루키의 단편집 중 최고로 일컫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들 역시 혼자서 이 거실의 그림자를 떠올렸던 인간들임을 추측해본다. 


<팔로우>라는 공포영화를 아시는가. 이 영화 꼭 추전 하고 싶다. 영화의 소재는 섹스를 통해 전염이 되는 악령이라는 설정이다. 좀 엽기적인가? 내겐 섬뜩함보다 흥미롭다는 기분을 가져다줬다. 금발과 섹스는 만고불변의 공포영화 소재다. 그리고 이 소녀가 악령에 전염되자 달려드는 소년들의 심보도 마찬가지다. 소녀와 잘 수 있다면 악령 그까짓 거 받아들이겠다는 소녀들의 태도는 사실적이다.(울음을 그치고 이야기하자) 이 저주의 특징은 악령이 갑자기 덮치는 게 아니라는데 있다. 천천히 저 멀리서부터 걸어온다. 그래서 누군가 화면에 나타나기만 해도 금발은 겁에 질려 미칠 지경이 된다. 

영화 팔로우
“이제부터 ‘그것’이 널 따라올 거야. 나도 누군가에게 받았고 방금 너한테 넘겼어. 새로운 상대와 섹스해야만 저주를 벗어날 수 있어. 하지만 다음 사람이 ‘그것’한테 잡히면 저주는 네게 돌아와.” 

이 저주의 감염은 섹스다. 또한 이 악령을 벗어나는 출구 역시 섹스다. 자 이제 감염의 연쇄가 시작되겠구나 생각하던 차에 영화는 좀 더 신중해진다. 이 금발의 소녀가 사려 깊음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녀는 친구에게 넘겨버리는 쉬운 선택 대신, 이 악령을 그저 개인의 고통 중 하나라고 받아들인다. 그녀는 물론 잠시나마 친구와 섹스를 해 이것을 넘기기도 하지만, 그 친구의 죽음으로 다시 저주에 걸리자 스스로 체념한다. 소녀는 이제 이 공포의 근원과 마주하기로 결정한다. 마치 개인의 고독은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것처럼 단단한 결심으로 응고된다. 지독한 윤리적 실험 상태에서 그녀는 이 악령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한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종장에 이르면 하나의 성장영화로 느껴지기도 한다. 소녀는 그녀가 되고 그녀는 이제 타인과 분리된 세상을 살아간다. 부모는 도통 개입할 여지가 없는 그녀만의 세상이 시작된 셈이다.


개인의 고독은 단련으로 치유될 수 있다.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들이 과거의 상처를 회한이라는 정서를 통해 잊는 것처럼 말이다. 음악과 요리, 문학과 영화는 그들의 회한을 돋우는 매개체다. 10대 소녀는 섣부른 섹스로 악령을 얻었지만, 결국 일상의 고독에서 무언가를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세상을 향해 뒷모습을 보이고 당당히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통해 공포가 아닌 행로의 거친 파열음을 들을 수 있다. 그녀는 적막한 어느 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 숲 이름이 '노르웨이 숲'이라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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