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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2. 2017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저, 

오래된 경구(aphorism)는 머리를 울린다. 청명한 소리로 꿰뚫듯 통찰이라는 견고한 벽을 허문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라는 책을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수많은 경구들의 습격으로 당황했다. 그렇게 툭 튀어나오면 난 힘들다. 많은 얘기와 설명으로 다독여줘야 난 안심하고 책장을 넘긴다. 멀끔한 경구에게 고한다. 난 어리니 좀 더 쉬운 설명으로 인생을 설명해주오. 단숨에 머릿속을 지나가는 아포리즘을 붙잡고 하소연해본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의 저자 데이비드 실즈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기록한다. 썩은 농담과 지적인 사유들을 구구절절 풀어놓는 작가의 글은 경구들과 달리 지난하다. 인생의 순간들이 모여 얻은 깨달음은 역사 속 경구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깨달음은 단순 명료하다. 우리의 시간은 부스러진 연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고, 잊혀서 더 이상 드리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에세이에 마음을 주는 건 번거롭게도 인생사에 사족을 붙여주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종착지 안에 드리운 힘겨운 과정들, 부자관계, 직업적 회안, 사랑의 소멸과 같은 고꾸라짐의 연속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이 작품의 저자는 데이비드 실즈는 이름처럼 방어적인 인생을 살았다. 평생 건강하다 죽은 아버지와 이제 늙음의 테두리로 들어선 저자는 연령대별로 받아들인 경험들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되돌아본다. 요통과 식욕감퇴, 근육의 축소, 애석하게도 늘 나이 듦에 저항했던 아버지까지. 늘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았고, 평생 공세적인 무언가를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들은 말한다. 결국엔 죄다 죽었다.

책을 읽다 보면 내 인생의 좌표는 지금 어디쯤 위치해있으며, 이제 곧 어떤 일들이 발생해 날 당혹으로 밀어 넣을지 불안해진다. LA 다저스의 스타팅 라인업으로 글자를 배울 만큼 야구광인 데이비드 실즈는 자신의 육체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야구를 통해 보여준다. 다저스의 탐 굿윈이 쳐낸 타구가 유려한 구도로 펜스에 처박히듯 야구와 인생엔 비슷한 착점이 있다. 플라이 볼을 받으려는 외야수의 위태로운 자맥질엔 우리의 버둥거림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이 죽음이라는 귀착점이 삶의 가장 활동적인 스포츠에서 얼떨결에 뿜어져 나오는 거친 숨결과 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포스트 플레이 이후에 공수전환을 하는 팀 던컨의 긴 팔처럼, 내야안타를 날리고 전력질후한 후 아웃되는 푸이그처럼. 정력적인 스포츠인들은 마치 모든 것이 거기에 있다는 듯 온 힘을 다하지만 죽음 연이어 대학살자의 칼날처럼 연이어 습격하는 것이다. 자신에겐 죽음이 없을 거라며 몸을 뒤틀지만, '어어 이건 뭐지' 하다가 끝나버린 인생이 어디 한둘인가. 뭘 좀 안다고 깝죽거리던 인간들은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땅에서 썩어갔다. 톨스토이는 경솔히 발언했고, 루소 역시 서툰 솜씨로 적었으며, 빌 머레이는 말년에 영화 <브로큰 플라워>를 찍었다.

다저스 스타디움

다행히 데이비드 실즈에겐 97세까지 건강한 삶을 이뤘던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실즈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종의 행동주의자인 아비는 아들의 지적인 고민을 남자답지 못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좌파에 지식인이며 오랜 기자생활과 야구심판을 병행할 정도로 정력적인 남자였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만큼은 일생의 총력을 스포츠에 바치길 원했다. 자신이 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아들에게 스포츠의 위대함을 설파했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대항을 멈추지 말라고는 충고였다. 하지만 데이비드 실즈는 고질적인 허리 부상과 펜을 놓기엔 아까운 지적인 사유력이 있었다. 어느샌가 침대에서 읽는 책 속 언어와 사랑에 빠졌고, 작가라 불렸을 때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둘은 평생 서로를 미워했다. 일종의 애증이라 볼 수 있었던 이 부자관계의 결합은 야구뿐이었다. 기록, 통계의 스포츠인 야구는 수치화된 결론으로 평가하는 일종의 사이버 매트릭스의 놀음과 같다. 지적인 사유와 육체적 폭발력의 결합. 데이비드 실즈와 아버지는 그 지점에서 서로 통했다. 야구의 위대함은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인생의 발로와 유사하다. 수치와 통계를 등한시하는 아버지(그는 홈런과 승리라는 결과론적인 쾌감에 몸이 젖는 사람이었다.)와 다르게 아들 데이비드는 우리의 삶이 죽음 앞에서 무릎 꿇게 될 확률을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계산으로 찍는 마침표로 적확하게 삶의 소용돌이를 잠재운다. 이런 부자관계의 돌고 도는 역학관계가 작품을 팽팽하게 한다.

“내가 6세 때부터, 아버지와 내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문 스포츠면을 읽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애틋하게 간직한 기억은 20년쯤 전의 일인데, 아버지 댁의 소파에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서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라디오 중계를 들었던 일이다. 다저스와 자이언츠 경기였다. 마이크 미셜이 10회에 3점 홈런을 날려서 다저스가 이긴 순간, 아버지와 나는 마주 보았다. 야릇하게도 우리 둘 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책에 밑줄을 치며 책을 읽는 이유는 각인을 위해서다. 어떻게든 책을 머리에 박아 넣고 싶어서 용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를 다 읽고 나서 책을 다시 훑어봤는데 밑줄이 천지였다. 서두부터 시작해 종장까지 굵은 선들이 나 좀 보라고 아우성을 친다. 보통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면 몇몇 인상적인 구절들을 적어놓곤 하는데, 이 책은 마치 겁에 질린 사슴처럼 혹시 잊힐까 두려운 문장들에 줄을 그었다. 수식이 가득한 칠판 앞에서 정답을 찾는 무모함처럼 이 책이 말하는 인생과 죽음에는 모호함의 두려움이 가득하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움직음을 관측하고 현상을 짚어내는 우스꽝스러운 학자처럼 보인다. 누구든 섣불리 죽음을 정의하려 했지만, 결국엔 죽는다는 사실밖에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혹한다. 


친구가 죽은 이후의 농구시합, 요통을 부여잡은 글쟁이, 이제 자신을 괄시하는 10대 딸, 야구모자를 고집했던 아버지. 죽음이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명제다. 저 먼 우주를 암흑으로 혼자 뒤뚱이며 떠돌아다닐 여유가 없다. 그런 식으로 인생을 종 치기엔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니까. 아버지를 떠올리며 쓴 마지막 장은 죽음과 해방감이 뒤섞인 일종의 판타지아를 그리고 있다. 눈물이 흐를 것 같다가도 어느새 이 글을 적을 만큼 차분해진다.

“나는 돌연 무릎이 꺾여 먼지투성이 땅으로 엎어진다. 몸을 받치려고 팔을 쭉 뻗는 바람에 손이 돌멩이에 온통 긁힌다. 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선인장 낮은 가지를 베고,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마신다. 아버지가 이겼다. 또 아버지가 이겼다. 언제나 아버지가 이긴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버지도 진다. 우리 모두 언젠가 진다.”
영화 위아영

작년에 본 영화 <위아영>의 원제는 'While We're Young'이다. 뉴욕의 40대 다큐멘터리 감독 조시가 20대 힙스터 감독 지망생 제이미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언제나 젊다고 자신했던 남자가 늙은 거장과 젊음의 영악함을 앞에 두고 비로소 중년을 자각하는 광경을 따라간다. 다큐라는 진실의 창을 투영하는 순수성은 세대를 지나며 사라진 지 오래다. 젊음은 두려움 모르고 나아가고, 죽음과 가까운 늙은이는 하던 방식을 고수한다. 젊음의 가능성에 기대를 거는 세상은 40대를 좀비처럼 취급한다. 40대 중반의 조시는 도대체 나이를 먹는 동안 무엇을 성취했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됐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빅토르 위고는 말했다. ‘40세는 청춘의 노년기이다. 50세는 노년의 청춘 기이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니라는 말이다.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오슬러도 거든다. ‘세상의 모든 쓸모 있고, 감동적이고, 고무적인 업적은 25세에서 40세 사이의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계단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조시를 아내가 위로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그들이 새 아이를 입양해서 또 다른 도전을 위해 공항에서 수속을 받는 모습이다. 인간은 결국 세포를 전달하는 매개 동물에 지나지 않음을 묵묵히 인정하는 꼴 아닌가. 다소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끝나는 모양새다. 저 앞 야구장에서 아이들이 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간다. 공은 볼품없는 움직임과는 별개로 그 나름대로의 유려함이 있다.


표지 사진 : 영화 위아영(While We're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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