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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8. 2017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성소녀, 쿠라하시 유미꼬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를 통해 알게 된 오스틴 라이트라는 작가가 있다. 오스틴 라이트 무슨 담배 이름 같은 이 작가의 이름 난 처음 들었다. 톰 포드의 탐미적인 영상이 빛나는 영화에 매혹되어 교보문고를 찾아 구입해 읽었지만, 정작 영화보다는 책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액자 속 액자, 작가와 창작이 가진 고된 강박증, 예술이 물신숭배의 극단적 상황에서 비틀리는 순간의 숙연함이 시시각각 출몰해서 머릿속을 꽉꽉 채우는 작품이다. 지적인 허영심과 이야기의 잦은 커브가 주는 날렵함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거기에 덧붙여 한 남자가 과거의 상처, 구원의 정도 등을 문학을 통해 측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세밀한 묘사는 문장 하나하나를 밑줄을 치게 만들었다. 

오스틴 라이트는 아쉽게도 현재 세상에 없다. 1992년 미국 뉴욕 주 용커스에서 태어난 오스틴 라이트는 1934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948년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195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토니와 수잔>은 신시내티 대학 영문과에서 강의를 하던 오스틴 라이트가 죽기 10년 전인 72세 때 발표한 작품이다. 48세의 늦은 나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오스틴 라이트는 그가 죽고 난 이후 영화화된 작품의 영향으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는 생전에 상상이라도 했을까.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톰 포드의 영향으로 작신의 소설이 팔리게 될지. 그렇다면 내가 <토니와 수잔>을 읽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라고 봐야 한다. 세상에 살면서 이름 한 번 듣지도 못했던 작가의 작품이 내게 찾아온 것이다. 세상엔 얼마나 더 숨겨진 작가와 이야기가 내 시야 밖에 있을까. 그것이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심란해진다. 소설 속 수잔이 전 남자 친구가 쓴 소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나 역시 숨겨진 걸작을 위해 드넓은 교보문고를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소설 성소녀, 쿠라하시 유미코 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작품이 여기 또 있다. 제목 얘기부터 해보자. 성소녀, 처음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옆자리엔 낯선 여성이 커피를 마시며 야구를 시청하고 있었다. 내게 있어 <성소녀>란 제목에 걸맞은 이는 그녀다. 굳이 서울 시내의 한 커피가게에서 홀로 야구를 보기 위해 부지런히 눈을 굴리는 그녀는 세상과 멀찍이 떨어져 까치발을 들고 도망쳐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성스럽다는 의미는 굳이 신성의 영역까지 단어를 흔들 필요가 없다. 그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이질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면 족하다. 소설의 표지가 가진 성스러운 소녀의 이미지와 그녀를 비교하며 책을 펴 들었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못해 증발해 버릴 듯 위태로운 것이다. 

미키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그녀는 엄마와 기억을 한꺼번에 잃는다. 미키는 K에게 연락해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 썼던 노트를 해독해 달라고 한다. 그 노트에는 미키와 '파파'의 불온하고 광적인 관계가 쓰여 있다. '파파'와 미키의 관계가 사실인지, 또 '파파'란 누구인지 K는 확인하려 한다. 미키 엄마의 옛 애인 혹은 늙고 병든 공업사 사장 혹은 아내를 증오해서 미키와 의도적으로 관계를 맺은 친부인지. 한편 K는 과거 그의 누나 L과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입양된 K와 L 역시 친남매인지 알 수 없다. 사실이든 아니든 근친상간을 해버린 미키와 K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갇히기를 선택한다.

소설 <성소녀>, 난 이것이 어떤 시대에 태어난 문장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책 뒤편에 소개된 작가의 삶과 작품이 시대에 새긴 의미를 길게 추론한 글엔 반감만 든다. 상실감과 허무라는 전공 세대라는 용어는 이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가 굳이 반세계라는 표현까지 들어가며 현실과 이격한 의도를 수긍하지 않는 글이다. 현실감각과 톱니바퀴 같은 서사를 멀리하고 몸을 녹여내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그저 소녀라는 상징만이 가질 수 있는 도발적인 망상이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 화자(K 그리고 나)를 홀리는 행위에 가깝다. 유일무이함에 탄복하며 문장마다 곱씹으며 읽었다. 그리고 이것을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을 때 누군가 상상 속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함에 안도를 느낀다. 지독한 성에 대한 갈망 그리고 일상의 끈적한 권태, 일기장에 부지런히 적은 상상의 나래. 그 시절을 거쳐 온 이라면 모두가 그리워하는 금기에 대한 환상이다. 소설은 그런 세상도 포용할 수 있는 곳이니까. 난 이 소설의 제목에 성(聖)이 들어간 이유를 생각하다 그 고유함에 시대적 고단함도 극복할 수 있는 판타지아가 있음에 손을 든다.

미키라는 열여섯 먹은 소녀가 교통사고를 내고 기억을 잃어버리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그 사고로 인해 잔인하게 죽었다. 기억을 잃은 미키는 약혼자인 K에 건넨 일기장에서 파파라고 부르던 알 수 없는 정체를 구구하게 설명한다. 프로이트의 ‘가족로망스’(Familienroman)로도 보이는 이 비현실적 캐릭터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엄마의 옛 연인이자 치과의사이고, 아내에 복수하기 위해 딸과 동침하는 악인이자 외제차를 몰며 사치를 즐기는 속물이기도 한 이 파파라는 남자는 그녀의 정체를 더욱 알 수 없게 한다. 그리고 한편 화자인 K 역시 친구들과 어울려 여학생을 집단 강간한 사건을 떠올리며 미키와의 첫 만남을 고백한다. 친누나와 사랑을 나누며 한때 코뮤니스트 집단에서 활동하던 과거를 숨기고 이제 미국이라는 대륙에 발을 붙이려 노력하는 화자. 세상과 마주서 보려고 노력하던 K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미키라는 존재는 그의 걸음을 주저하게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끝내 아끼고는 결혼이라는 안식에 죽은 시체를 방치하는 최후의 결말은 슬픔을 넘어선 암담함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은 마치 십 대 시절의 꿈이 끝나는 성인(成人)의 영역으로 들어선 순간을 죽음으로 치환해버림으로써 완전해진다. 외설이라 꾸짖던 그것이 없는 지금 나의 30대의 삶은 화자인 K가 겁내 하는 무력감과 동류의 느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작가 쿠라하시 유미꼬

쿠라하시 유미꼬 작가는 최근에야 주목을 받고 있다. 작가들이 주목한 소설로 많은 이들의 추천도서 목록에 오르내린다. <성소녀>는 귀한 작품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는 ‘창비 세계문학’ 37권으로 국내에서 번역된 그녀의 첫 소설이다. 오오에 켄자부로오를 비롯한 일본 문학이 가장 뜨거웠던 전공투 세대에 끼어 있지만, 그녀는 현실감을 거부하는 반세계를 그려온 작가답게 리얼리즘을 중시하는 80~90년대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나 역시 쿠라하시 유미꼬의 작품은 전형적으로 싫어하는 작품군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읽게 한 원동력은 감정이입을 제거한 공허함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몸속에 심장이 있는 것 같은 존재 방식으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작가의 표현처럼 현실과 등을 진 소설이 지닌 고유함에 충실한 체. 작품의 마무리에 느껴지는 슬픔은 환상 속으로 파고들던 소설이 현실과 마주하는 지점일 수 있다. 너도 나처럼 혹은 미키처럼 각자의 주검을 삶 속에 유기한 채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항상 함께 힘겹게 언덕을 넘어온 친구가 있었다. 20대 시절을 거의 통틀어 추억을 나눴고, 삶의 일정 부분 이상을 같이 하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건 현실의 늪이다. 같이 걷는 게 그렇게 행복하다가도 혼자서 걷고 싶어 지는 때엔 알고 싶지 않았던 마음의 공란을 어루만진다. 변해만 가는 사람 속에 그 사람이 예외일리 없다고 고개를 저어가며 딴 곳을 보는 순간이다. 소설의 미키와 파파라는 미지의 존재, 화자의 L이라는 누나 모두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장담할 수 없는 시간들이 닥쳐온다. 그 이후는 듣고 싶지 않다. 성스러움으로 휘황했던 시절은 종결됐다.


표지사진 :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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