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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9. 2017

패왕별희와 발자크의 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저

어릴 적부터 중국 영화를 꽤 봐왔는데 대부분 지루했다. 홍콩영화라면 주윤발이성룡까지 죄다 신나는데 도대체가 중국은 왜 저렇게 딱딱한지 모르겠다고 불평하기 일쑤였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영화 중 대표적인 작품이 장이모우의 <홍등>다. 사실 이 작품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장이머우의 작품이라면 보지도 않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뭐 편견만은 아닐 수도 있다.) 덩달아 장이머우의 페르소나이자 중국의 대표적 여배우인 '공리'에 대한 호감도 이 영화를 기점으로 사그라졌다. 대체적으로 난 중국 영화라는 딱지만 붙으면 우선 지루하니 피하고 봤다. 뭐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중국의 정치적 격정과 일당 국가의 편협함을 말해 무엇하랴. 시뻘건 국기와 함께 '문화대혁명'이니 '천안문사태'니 국민들을 박해하는 나라에서 뭐 좋은 작품이 나오겠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중국의 정치·문화적 탄압이 부른 경직성과 그것이 문학과 영화를 저개발 지대에 놓이게 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내 편협함을 비웃듯 장이머우, 첸 카이커, 지아장커, 허안화를 비롯한 중국의 거장들은 위 두 사건에 직·간접 영향 아래 놓인 작품을 만들며 세계 영화제를 휩쓸었다.

영화 패왕별희

그래서인지 난 중국의 문화콘텐츠를 대할 때 그들에게 드리운 상처를 먼저 의식한다. 중국의 영화가 신나게 웃을 수도, 분노를 표출하지도 못한 체 꿍한 표정만 짓고 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비교적 최근에 본 두 작품 <5일의 마중>(감독 장이머우), <황금시대>(감독 허안화> 역시 시대의 상처가 남긴 인간들의 군상을 그리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고픈 배를 움켜쥐고 피어나는 정서들은 우리의 고달픈 시절과 맞아 들어가는 지점다. 장중한 드라마에 알 수 없는 음울함은 우리의 70~80년대 영화들에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서 아니던가.


어릴 적 주말의 명화로 <패왕별희>(Farewell My Concubine, 1993)를 봤을 때, 난 이 영화가 마지막에 하려는 말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무대에서 자살을 하는 주인공을 보며 나도 같이 울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1966년 문화 대혁명이라는 사건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책에서 읽었다. 중국을 때린 사회주의라는 풍랑은 홍위병이라고 지정된 젊은이들에게 칼을 쥐어주고, 지식인이라 규정되는 인간들은 다 잡아 족쳤는 사건. 그 ‘반혁명 인사’라는 기준이 애매하다 보니 대부분 고학력에 돈 많은 것들을 잡아내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결국 마오쩌둥의 정치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다 보니 저항이라는 징후가 보이면 그대로 잡아 족치는 거다. <패왕별희>에서 홍위병들에게 샬로(장풍의)가 인민재판의 수모를 겪고, 자아비판 때문에 이성을 잃은 그는 데이(장국영)마저 동성애로 고발한다. 이에 맞선 그들은 서로의 과거를 폭로함으로써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게 되며 파국을 맞는다. 이 당시 젊은이들은 동시대 동련배들의 자살과 죽음을 방조하며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상처를 이마에 새기고 게 된다. 공연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국영은 결국 살인자는 중국이며, 사상의 검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역사적 상처는 이 무대처럼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길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무대의 처연함과 부스러질듯한 장국영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영화 <5일의 마중>, <황금시대>

그렇다면 문학은 어떨까. 내가 읽은 중국 소설은 모두 '위화'의 작품이다. 하정우가 감독한 <허삼관 매혈기>의 동명의 원작으로 먼저 만났고, 그다음으로 연이어 그의 치대 히트작인 <인생>을 읽었다. 딱 거기까지다. 우습게도 굳이 꼽자면 <삼국지>(이문열 버전과 황석영 버전 두 가지 읽었으니 스무 권이 훌쩍 넘는다.) 정도가 있다. 최근에 중국 문학이 최근에 활발하게 유입되는 모양새다. 위화의 작품들 외에 노벨상 수상자인 모옌의 <개구리> 등 이제 한국 서점에서도 중국 대표작가의 소설을 사서 보는 분위기다. 작품들의 기조는 과거보다는 너그러운 시선으로 그 시절의 중국을 추억하고 있다.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중국문학의 위상도 올라갔다. 정작 중국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데, 훌륭한 작가는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엔 문화대혁명 시기를 겪은 중국 출신 프랑스 작가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라는 소설을 읽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54년생 다이 시지에는 이 소설의 배경인 문화대혁명 시대에 재교육 학생이었다. 그녀의 부모가 당시 지식층 부르주아라는 이유로 두메산골로 쫓겨나는 신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다이 시지에는 이후 프랑스 유학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화자와 뤄 역시 부모가 의사라는 이유로 용징이라 불리는 마을로 유입된다. 맨날 똥지게나 지며 젊음을 탕진하던 두 소년은 시계도 볼 필요가 없는 마을에서 노동 기계가 되어갈 뿐이다. 그런 허송세월 중 우연히 같은 재교육 학생 안경잡이의 집에서 '발자크'의 소설을 얻게 되면서 그들의 인생은 다른 노선을 타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다. 두 소년이 재교육으로 잡혀가서 소설과 소녀를 만나 예술과 사랑을 배운다는 것. 작품의 배경으로 다뤄진 문화 대혁명과 마오쩌둥은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하다. 사실상 소설의 주인공은 그저 제목만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발자크'(문학)다. 두메산골의 두 소년은 발자크의 소설을 우연히 손에 쥐자 또 다른 소설이 없이는 이 삶을 버텨나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문학이라는 또 다른 세상이 그들을 확장시킨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소설을 안경잡이에게 얻어내기 위해 즉흥연극을 기획한다. 각색과 각본이 없는 허술한 연극. 결국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또 다른 서적엔 농부들의 민요가 담겨있다. 또 마을 여성들의 미적 감각을 자극하는 사실상 화가에 가까운 재봉사의 딸은 두 청년이 가질 수 있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어준다. 한 달에 한번 보러 가는 고전영화와 마을 촌장을 유혹하는 이야기꾼의 기질 등 모든 것이 예술을 모티브로 한 일종의 희비극처럼 보인다. 이 촘촘한 이야기의 결실은 발자크를 넘어 빅토르 위고, 플로베르, 스탕달, 뒤마, 보들레르, 로맹 롤랑, 루소, 톨스토이,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로까지 이어진다. 특히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모험담을 상상하는 낡은 오두막에서의 하룻밤과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두 소년을 떠나는 소녀의 뒷모습은 이 소설을 더 넓은 지대로 확장시키는 쾌감을 선사한다. 250쪽짜리 얇은 책이지만, 그 문화적 포용력은 내 문학사랑에 대한 위로처럼 느껴져 찡한 마음을 선사했다.


다이 시지에는 1980년 천안문 사태를 비롯한 중국 정치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던 시절중국 문학의 황금시대라고 말한다. 그땐 다들 책을 읽고 토론하길 즐겨했으며, 착 귀한 줄 알았다. 두메산골의 두 소년이 발자크 소설을 잠바 때기에 적으며 죽은 시인의 해방을 꿈꿨던 것처럼,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한국처럼 중국도 이제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책 보다 더 좋아한다. 문학은 개나 줘버리고 모바일 게임에 돈을 쏟는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문학 추종은 중국 한 시골마을에 국한된 정서는 아닐 것이다.

영화화된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의 한 장면

소설엔 생애장면이 다수 묘사된다. 물에서도 하고, 바위 위에서도, 모기장 옆에서도 거침이 없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여성이 두 소년의 성적 도구로 다뤄지는 순간들이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이에 대해 소년 뤄는 이 소녀를 자기가 재교육하여 미모에다가 예술을 비롯한 종합적인 지적능력을 추가시켜 완전체를 만들겠다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결국 더 넓은 세상을 비상하는 그녀를 잡지 못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어쩌면 가장 허망하고도 통쾌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도시로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두 소년은 고구마나 까먹으며 울고, 그를 비웃듯 소녀는 세미 정장에 흰 테니스화를 신고 나비처럼 비상한다. 마치 발자크가

“당신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소. 사랑하는 여인은 매번 우리로 하여금 양식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게 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소”

라며 여성을 칭송한 것처럼 말이다. 붉은 옷을 입고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는 소녀를 당해낼 그 어떤 예술도 없다는 게 방점이라면 방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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