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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29. 2017

'맨 부커' 상을 아시나요

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저

아카데미 수상작이라고 모두 재밌을 리 없다.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작 중 하나인 <크래쉬> 같은 영화만 보더라도 벌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킹스 스피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어떤가. 모두 좋은 영화지만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비하면 만듦새는 초라하다. 미국의 정치와 사회 논리에 반응하는 시상식의 특성상 이렇게 엉뚱한 결과의 반복을 막기 어렵다. 비단 아카데미뿐만이 아니다. 이제 대중들은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이 매기는 별 숫자에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페이스북의 좋아요 횟수를 더 신뢰하고, 주변 지인의 죽여준다 캬아하는 한마디에 반응한다. 시상식은 그저 심심풀이 땅콩으로만 예측해볼 뿐이다.

세계 4대 예술영화제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칸과 베니스, 베를린 등 해외 영화제 수상작이 작품의 품질보증마크가 되지 못한다. 전도연이 07년 칸에서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탈 때와, 10년이 지난 올해 김민희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베를린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이후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그건 스캔들의 영향도 있지만, 시상식이 뭐?라는 같잖은 시선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게 뭐? 그래 그게 뭐일까. 비평의 기준과 개개인의 취향이 충돌하는 현재의 상황들은 그게 뭐로 그저 단순히 설명되지 않는다.

문학으로 눈에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14년 노벨상 수상작가인 '파트릭 모디아노'는 수상 직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실 그가 무슨 죄가 있을까. 그에게 상을 준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시스템을 의심해볼 뿐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많은 팬을 거느린 훌륭한 작품이지만, 과연 이 작품이 그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 말이 필요 없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영미문학의 터줏대감 '필립 로스' 같은 작가들의 작품보다 더 받을만했는가 질문해보면 말끝이 흐려진다. 올해 수상한 가수 '밥 딜런'시인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들은 논란거리만 만들어냈지. 작품의 질에 대해 논하는 과정은 생략된 지 오래다. 심사의원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평가했겠지 뭘 시끄럽게 하느냐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월드컵 개최지 선정도 아니고 지역별 분배 논리가 작품의 수준보다 더 우선에 있다는 게 말이나 될까.

내가 문학 시상식 중 유일하게 신뢰하는 영국의 '맨 부커상'이다. 매년 영국 연방 국가에서 출간된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여 주는 문학상이다. 이 상은 그간 영국과 아일랜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 작가들만이 대상이었으나, 올해부터 미국인 등 다른 영어권 작가들 및 기타 언어원에도 개방됐다. 노벨상처럼 세계 대륙을 분배하지 않고 독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상으로 알려져 있다. 노벨, 콩쿠르.퓰리처에 비하면 역사는 짧지만, 그 수상작 면면이 신뢰가는 작품으로 가득하다. 우리가 알만한 작품으로는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 영화화되어 유명한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가 있다. 그 밖에도 최근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살만 루슈디의 걸작 <한밤의 아이들>이 있다. 남아공 출신의 작가 존 쿠페(존 쿠체)는 <마이클 K>(1983), <추락>(1999)으로 두 번이나 수상했다.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난 맨 부커 수상작들을 이 블로그에 꾸준하게 다루고 있다. 영국의 대형 출판사인 부커 사가 주관하는 이 상의 특징은 바로 대중성에 있다. 문학적 실험정신과 대중적 호소력을 잣대로 심사한다. 또한 작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처럼 번역가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시상식 중 하나다.

부커상 수상 작가는 자국 내의 명성에 머물러 있다가 수상 이후 전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한강 작가 역시 <채식주의자>의 수상 이후 국내는 물론 해외에 다수의 작품들이 번역되어 출간되는 경사를 맞았다. 상 자체가 대중성이 큰 몫을 차지하다 보니 한국 출판사들도 부커상 수상작이라면 믿고 출간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98년도 부커상 수상작인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을 최근에야 읽었다. <속죄>와 <체실 비치에서>를 읽고 이언 매큐언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진 상태였다. 암스테르담은 이언의 다른 소설과는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좀 얕게 평가하자면 일종의 단막극처럼 쉽고 빠르게 읽혔다.

이 소설은 죽은 몰리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남자들은 그녀에 관해 한 마디씩 보태며 그리움을 표출한다. 그녀는 남자들의 입으로만 형상화되는 사자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오히려 산 자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다. 한때는 세계적인 작곡가 클라이브의 연인으로서, 또 신문사 편집국장이자 클라이브의 절친인 버넌의 동거녀로서, 그리고 외무장관 가머니의 정부로서, 죽기 전에는 출판재벌 조지의 아내로서 그녀는 몇가지 결을 가지고 살았다. 그녀는 줄곧 거기에 없었지만 이야기의 공기를 부유하는 유령인 셈이다. 그녀를 향한 추억과 회한이 작품 전체를 감싸 앉는다. 끝에서는 범죄의 동력으로 발전하여 파국의 단초가 된다. 이언 매큐언은 지극히 사회 풍자적이고, 다소 들뜬 분위기의 이 소설을 통해 말과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남자들 간 일종의 헤게모니 다툼을 중계하고 있다. 그 천진난만하고 바보 같은 쇼맨쉽을 통해 인간 감정의 복잡 미묘한 양상을 표출한다. 이러한 형식적 실험과 도발을 겁내지 않는 공격성은 부커상이 추구하는 참신한 발굴과 잘 어울려 보인다.

소설 암스테르담

구성을 좀 더 살펴보자. 5막의 250페이지의 짧은 분량 안에서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입장을 내세우며 극을 전개해 나간다. 한 가지 사건이 다수의 인간들에 의해 재단되는 광경은 지극히 영화적이다. '안락사', '살해', '불륜' 등 자극적인 소재들 안에서 다섯 남자는 얽히고 섥힌 갈등을 맞이한다. 언론, 예술, 정치, 기업 각 분야에 종사하는 남자들은 말다툼과 법적 분쟁, 치열한 자존심 싸움으로 갈등을 점입가경으로 만든다. 서로 자신이 가장 그녀를 잘 아는 남자라며 수컷으로서 위용을 과시하려 하고, 서로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자기기만의 늪에 빠져 서로를 무시한다. 작품에 그득한 조롱과 멸시의 분위기는 저질스런 농담과 지적인 허영을 오가며 달큼한 맛을 자아낸다. 지구에서 가장 태평한 도시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귀퉁이 골목에서 안락사로 처리된 시체들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끝나버린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전에 볼 수 없었던 그것이다. 이언 매큐언은 캐릭터에 한 치도 애정을 주지 않고, 오로지 서사를 위해 기능하는 희상양으로 남자들을 소비한다. 몇 발자국 물러서서 세상에 불을 지르겠다는 작가의 도발적 시선이 걸작보다는 괴작으로 이 작품을 평가하게 한다.

디테일한 직업적 묘사는 <암스테르담>의 가장 큰 재미다. 특히 언론사의 생태계를 짧은 시간 안에 설명해내는 탁월한 대사들은 극사실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것은 그의 소설 <속죄>에서 전쟁에 끌려간 남자 주인공에 대한 실감 나는 묘사와 유사하다. 자존심, 성적 흥분, 비극을 대하는 존엄까지 이언 매큐언은 부가적으로 보였던 것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고 오는데 절묘한 솜씨를 보여준다. 언론사에서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 현 외무장관의 동성애 스캔들을 도마 위에 올릴 것인가를 두고 판매고와 정당성을 동시에 확보하려 하는 말다툼엔 치열한 취재의 결과물이 보인다. 언론이라는 사회적 지팡이가 썩어 부러지는 광경.  그것이 암스테르담이 주는 문학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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