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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Apr 30. 2017

스토너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

스토너, 존 윌리엄스 저

가을에 책을 읽기 좋다는 말은 다 거짓부렁이다. 가을은 걷기 좋고, 봄은 놀기 좋은 계절일 뿐, 독서와는 거리가 멀다. 여름이야말로 책이 맛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청명 해지는 그런 계절이다. 카페에 앉아 소설을 읽다 보면 절로 여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서避暑는 바로 피서書를 말하는 단어인가 생각이 들 정도다. 옆자리 짧은 스커트로 날 유혹하는 흰 허벅지에 눈길을 뺏기지 않으려면 꼭 재밌는 소설이어야 한다.

소설 스토너

잔뜩 사서 쌓아놓은 책들 사이에서 <스토너>를 집어 들었다. 1890년 미주리주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스토너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리 없다. 저자는 존 윌리엄스, 처음 듣는 소설가다. 할리우드의 유명한 음악감독 존 윌리엄스라면 알지만, 작가 존 윌리엄스는 금시초문이다. 게다가 벌써 세상과 작별한 지 꽤 된 분이더라. 무슨 이유에 선지 세상에 지워진 그의 이름이 <스토너>를 통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2013년 영국 최대의 체인 서점인 ‘워터스톤’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도서이며,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스토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출판계와 평론가,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50년의 시차를 가볍게 뛰어넘어,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세상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의 갓 30대에 들어선 나 같은 놈에게도 이 책이 찾아왔다.

찢어지게 가난한 미국 미주리주 분빌의 한 농부는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으로 아들 스토너를 근처 대학에 진학시킨다. 아들의 이름은 스토너다. 스토너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근면하고 금욕적인 기질로 대학생활에 점차 적응해간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택했던 길. 그런데, 영문학 개론 수업에서 접한 셰익스피어의 일흔세 번째 소네트가 그의 인생을 온통 바꾸어놓는다. 문학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는 대신 대학에 남아 영문학도의 길을 택한다.

이 통속 소설과 같은 배경 아래 그에게 문학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온다. 연애도, 혁명도, 그 흔한 전쟁도 아니다. 그렇다고 농업학도 답게 신종 작농법에 관한 책도 아닌, 영문학이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스토너는 필수 교양수업 중 하나인 영문학 수업에서 자신이 인생이 지금까지와 다를 것이라는 예감을 받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교양수업에서 문학에 대한 강의란 개념 위주의 개론일 뿐이란 걸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문학에 심취한 자에게 매주 책을 읽고 쓰는 리포트는 일종의 사랑고백과 같다. 이제 막 인류의 전쟁이 시작될 즈음 미국의 젊은이들이 참전으로 눈을 돌릴 때, 운 좋게도 스토너는 문학이라는 세상을 만난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정념에 혼란스러워하던 스토너에게 문학 교수 아처 슬론은 이것이 분명한 신호임을 귀띔해준다.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출간된지 50년만에 전 세계적인 히트작이 된 <스토너>들

이 이야기의 배경인 미주리주 분빌과 미주리 대학 주변을 구글 지도로 검색해봤다. 소설이 세상에 나온 지 언 오십 년이 됐지만 공간은 여전히 삭막하다. 농지는 기계의 횡포에 무력하며, 날씨는 여전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미주리 대학의 풍경도 소설이 묘사한 그대로다. 무뚝뚝한 다섯 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고요한 기조를 사명처럼 받든다. 미주리 대학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스토너가 절로 떠오르는 로드뷰였다. 스토너가 느끼고 걷는 세계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위안거리로 다가온다. 그건 마치 작가와 스토너와 내 삶이 일치된 것만 같은 위로다. 스토너의 참고 견디며 인내하는 삶은 마치 어깻죽지에 그어진 흉터처럼 의식하지 못한 체 불현듯 발견된다. 스토너의 조용한 기질과 고요한 주변 환경처럼 소설의 문장 역시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인생을 한 줄 한 줄 헤쳐나갈 때, 스토너의 주변엔 그저 책장에 꽂혀있는 문학서적만이 그 존재감을 드리운다.

세상에 내가 오늘 죽는다고 누가 수년이 지나서 날 기억할 텐가. 그런 생각은 슬픔보다는 이 시간을 재밌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일깨울 뿐이다. 스토너가 몰두한 책상 위 헌책처럼 펄럭이는 한 장의 무게만큼이 오늘 짊어질 생각인 것이다. 내가 읽은 건 스토너가 가진 인생을 향한 예의였다. 누군가를 의식하고 기억될 삶에 대한 동경보다는 그저 순간적으로 반해버린 아내 '이디스'의 눈처럼 사랑으로 산화하는 시간들이다.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고통으로만 점철된 아내 '이디스'와의 관계를 꼽을 수 있다. 그녀는 말이 없고, 부부지만 서로 성욕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뚜렷한 인생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상처를 지녔는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악역을 떠맡게 된다. 첫날밤 그가 그녀의 위로 올라섰을 때 그녀는 마치 범해지듯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이 순간부터 스토너의 부부생활은 버팀과 체념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눈을 질끈 감다 아예 뜨는 걸 잊어버린 것처럼 암담한 현실이 계속된다. 이 명백한 실패를 되돌릴 수도 그럴 맘도 없다는 걸 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유지한다.

영화 우리 선희, 북촌의 한 원룸 책들이 그득 쌓여있다.

스토너가 일생의 유일한 사랑이자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 후배 여강사 캐서린과의 불륜이 내 추측을 일깨운다. 이디스는 젊은 날의 불꽃과 같은 욕망으로 쟁취한 사랑이었지만, 이내 무언가를 공유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부터 완전히 닫혀버린다. 하지만 학교에서 만난 캐서린은 다르다. 그녀는 그와 같은 지점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여성이다. 스토너가 그녀에게 반하는 지점은 명확하게 소설 속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작성한 리포트를 읽고, 그녀가 발표시간에 제시한 의견을 들으며 캐서린에게 매료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캐서린의 집에서 그녀를 앉았을 때 소설은 더없이 관능적인 문장으로 변모한다. 그 좁은 방, 뜨거운 열기, 작은 창문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오로지 연구를 위해서 만들어진 듯 전등 하나에 의지해 빛나던 책들 사이에서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스토너는 훗날 그녀가 저술한 책을 읽으며 사랑의 단락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 책 속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캐서린이라는 문장은 몸 냄새처럼 향긋하다. 무언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는 그 생명력이 쉽게 지치지 않을까. 캐서린은 이디스와 달리 스토너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스토너의 결혼생활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딸과 보낸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엄마의 관심을 받지 못한 딸은 아버지와 보내는 서가에서의 시간에 행복을 느낀 듯 미소 짓는다. 고요한 책들과 어둠으로 둘러쳐진 아늑함, 침범할 수 없는 전등 아래서 지적인 생각을 쌓아가는 부녀의 모습은 아름답다. 폐쇄된 가정에서의 소멸된 교류가 서가에서 다시 피어날 때 이 책의 지향점을 느낄 수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이디스가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을 나타낸다. 또 다른 위기가 딸을 집어삼키기 전에 학자로서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스토너의 부성은 구원을 떠올리게 할 만큼 뭉클한 감동을 준다. 난 책을 읽어나가며 딸 그레이스와의 시간이 언제 깨어질지 몰라 걱정스러웠다. 그레이스가 부디 행복하게 자랄 수 있길 기도했지만, 이디스는 부녀의 관계를 질투했다. 그레이스 역시 이디스처럼 불행한 삶으로 자신을 내몬다. 난 이디스를 저주한다.

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카프카의 뜬금없는 등장

스토너라는 남자는 가문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늘 미주리 안에서 점철되었다. 이 의식적인 절단은 그의 학문적 몰두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 그의 부모 역시 이 폐쇄구조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다 죽었다. 하지만 스토너의 인생은 불행이라는 단어로 칭할 수 없다. 그의 앞에 놓인 좁은 문들 사이를 가뿐하게 가로 지을 수 있는 문학에 관한 숭고함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너가 예정대로 농부의 삶을 살았다면 농지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세계는 그를 더욱 풍성한 상태로 변모시켰다. 그는 과거와 현재를 넘어선 문학의 시간성에, 세계를 아우르는 그 점이지대 속 문장들을 사랑했다. 어쩌면 그가 가정에서 취하는 관조적 태도와 수동적인 직장생활에서 정치행위는 보다 나은 연구 환경을 확보하기 위한 인내라고 볼 수 있다. 출세욕 없는 허전한 모습의 남편, 사랑을 떠나보내는 애인, 무력한 아버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아들. 자신의 거점을 잃을 수 없어 인생의 유일한 사랑을 잡지 못하는 모습에서 그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갇혀 살았지만, 학문을 통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죽기 전 무엇을 기대했는가를 스스로 물었으나, 그 대답을 듣기 전에 벌써 난 책의 퀴퀴한 냄새를 떠올렸다.

“그는 책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그 책은 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책장을 펄럭 펄럭 넘기며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책장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짜릿한 느낌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와 그의 살과 뼈를 훑었다. 그는 그것을 어렴풋이 의식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그를 가둬주기를, 공포와 비슷한 그 옛날의 설렘이 그를 지금 이 자리에 고정시켜주기를 기다렸다. 창밖을 지나가는 햇빛이 책장을 비췄기 때문에 그는 그곳에 쓰인 글자들을 볼 수 없었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지자 책이 고요히 정지한 그의 몸 위를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빨리 움직여서 방의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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