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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4. 2017

자투리를 모은 시간들

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산문집

구판 랄랄라 하우스, 이 표지가 더 맘에 든다.

퇴근하고 마트에서 장을 본다. 운동을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허기진 배가 시키는 대로 정육코너로 향한다. 값이 싼 수입산 쇠고기 코너 앞에 걸음을 멈춘다. 그래 반 근이면 족하지. 그 많던 인파가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반대했던 그 미친 고기를 바구니에 담는다. 엊그제 같던 그 기억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광화문은 더 큰 물결로 시대를 변혁하고 있다. 나는 거저 멀뚱히 그 광경을 쳐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살아있다. 사회적 혼란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구경꾼, 단백질 보충을 위해 수입산 소고기를 사는 독거남. 뉴스 화면 위로 넘실대는 그들의 목소리를 귀를 파며 고개를 돌린다.

잡생각이 많은 내게 블로그는 필수품이다. 블로그라는 공책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머릿속은 지금보다 위급했을 터다. 책과 영화가 내게 준 목소리들이 내 키보드질로 흰 브런치에 새겨진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은 뭘까. 일기, 수필, 잡글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닮고 싶은 글을 있는 법이다. 몇몇 이름들이 떠오르지만 오늘은 김영하의 산문을 소개하고 싶다.


빨래를 돌리다가 말고, 잠들기 전 한 두 장 틈나는 대로 김영하의 산문집 <랄랄라 하우스>를 읽었다. 그가 여기저기 적은 잡문들을 모아 낸 책이다. 대부분 허튼소리지만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문장엔 헛헛함을 감쇄하는 유쾌함이 있다. 주관이 뚜렷한 지식인의 켱쾌한 말엔 불명확한 세상을 정돈하는 정결함이 있다.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김영하의 글은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정이 가고, 입술이 툭 튀어나온 몇몇 글에서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차가운 도시의 절단면을 훑는 그의 소설과는 다르게 산문은 유머가 넘친다. 동네 호프집에서 노가리에 맥주 하나 시켜놓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잡담을 듣고 싶어 진다. 

김영하의 소설을 늘 좋아했지만 그의 산문을 읽을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어쩌다 중고서점에서 2천 원을 주고 짚어온 <랄랄라 하우스>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씨네 21>에서 김영하가 연재한 칼럼들을 읽은 후에야 김영하의 소설이 아닌 사람 김영하를 찾아보게 되었다.

야생동물들도 놀라고 조용한 등산객도 싫어하니 야호를 하지 말자는 얘기가 나온 지 꽤 됐건만 여전히 주말 산에는 야호 소리가 우렁차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 차제에 야호를 적극 권장함이 어떨까 싶다. 입장권에 "문화 시민은 여호를 합니다"라고 인쇄하고 등산로 입구에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야호와 함께 갑시다"라고 써붙이고 자동차에도 "아빠, 오늘도 야호 하세요"라고 쓴 스티커를 붙인다. 야호를 안 하여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를 충격적으로 편집하여 공익광고로 편성 방송하고 57분 교통정보에는, "오늘 주말을 맞아 산에 가시는 분들 많으실 텐데, 야호 잊으시면 안 되겠죠?"라고 멘트 하도록 하자. 그러면 서서히 "무리한 야호 강요, 시민들 염증"과 같은 여론이 형성될 것이다. 우리도 함께 외쳐보자. 야호!
살인자의 기억법 출판기념회

2천 원의 값어치 딱 그 정도를 해주는 <랄랄라 하우스는>는 누군가 미니홈피에 적은 글을 옮겨온 듯 가볍다. 도서정가제 덕분에 중고서점에 유독 그의 산문집들이 많이 보이는 건 그의 글이 주는 가벼움이 책을 떠나보내기에도 부담이 없다는 거 아닐까. 요즘 지하철을 타면 죄다 코를 박고 스마트폰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우라질 통신사들이 지하철까지 와이파이를 깔아 그 흔한 잡지 하나 찾기 힘들다. 신문을 쫙 펴고 읽던 쩍벌 아저씨들도 이제 스마트폰 게임에 중독됐다. 지하철에서 읽는 산문의 맛이 일품인데, 이름바 활자 기피의 시대다. 

광화문 교보빌딩은 근사한 건축물이다. 로비의 중앙에는 안내 데스크가 있고 그 안에는 유니폼을 입은 아름다운 직원이 도도하게 서 계시다. 로비의 의자에 앉아 유심히 지켜보면 조금 수상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하 서점에 가려는 것 같지도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은 예리한 눈초리로 건물의 곳곳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 다닌다. 처음엔 보폭도 좁고 속도도 느리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보폭이 넓어지며 눈초리도 매서워진다. 그렇게 되면 안내데스크 아가씨와는 더욱 자주 눈을 마주치게 된다. 양자의 긴장이 높아지고 땀도 흐르고 결국 급한 사람이 우물을 판다. "저, 화장실이...."

자신의 소설보다 나은 산문을 쓰는 작가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하루키의 산문은 유쾌하지만,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한 호감 없이는 읽기 어려운 대충 쓴 문장들이다. 하루키 소설이 가진 아우라 없이 수필이 확장되지 못한다. 또한 사회문제에 대한 접근이 없다 보니 수필이 산문의 영역까지 가진 못한다. 그의 하루 일과를 듣다 보면 그다음은 뻔해진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 재즈에 온 더 락 스카치를 마시며 생선을 구울 게 뻔하다. 하루키와 반대의 지점에 커트 보네거트의 산문이 있다. 그의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아 막상 구입해 읽었지만, 작품의 감흥만 떨어뜨렸다. 왜냐면 정치적 언사를 주 메인 테마로 삼는 그의 산문은 지나치게 딱딱하다. 유머마저 칼을 품은 체 다가오기에 쉴 지점이 없다. 김영하는 딱 그 중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있다. 꼰대 같기도 하고, 어느 순간엔 소년처럼 철이 없다.

 

김영하의 산문 시리즈, 보다 / 말하다 / 읽다

요즘엔 김중혁 작가의 산문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통해 알게 된 그의 소설은 나와 잘 맞진 않았다. 하지만 산문은 무척 정겨웠다. 그는 적당한 지점에서 숨을 고를 줄 아는 따듯한 사람이고, 사회에서 땀을 닦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유머를 칠 줄 아는 재밌는 사람이다. <뭐라도 되겠지>, <대책 없이 해피엔딩>은 특정한 주제 아래 자유롭게 글의 방향을 뻗어가는 해방감을 가진 산문집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치 음악을 듣듯 그의 가벼운 문장을 듣고 흥얼거리면 그뿐이다.

최근 김영하의 <보다>, <말하다> 시리즈가 연이어 출간됐다. 잡지에 기고한 내용, 강연한 내용들을 또 싹 모아 출간했다. 또한 그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이 영화화될 예정이다. 그런 와중에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며 여행과 집필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테드 강연에 출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랄랄라 하우스>의 마지막 몇 장엔 그가 여행을 다니며 찍은 사진들이 보너스로 실렸다. 개정판에서만 볼 수 있는 사진들이다. 경주부터 뉴욕, 라이프 히치, 아이오와, 멕시코, 일본까지 세계 각국을 취재와 행사를 참여하며 찍은 사진들이다. 뉴욕엔 1년 넘게 거주했고, 작품을 위해 자주 찾는다고 한다. 그는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면서도 독자에겐 방구석 독서법을 추천한다. 아무리 돌아다녀봤자 고요한 방에서 읽는 소설책만큼 재밌는 건 없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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