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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5. 2017

샐린저의 쓸쓸한 죽음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저

호밀밭의 파수꾼

얇고 듬직한 <호밀밭의 파수꾼> 문고본을 한 번이라도 안 펼쳐본 사람이 있을까. 다 읽진 않아도 근사한 제목에, 청춘 소설의 대표작품이라는 칭호에, 샐린저라는 신비한 작가가 가진 사연에, 미국에서 선정하는 100대 소설 뭐시깽이처럼 근거 없는 찬사에 이 책을 펴 들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나도 최근에 다시 읽기 전까지 적어도 다섯 번 이상 읽었다 포기하기를 반복했으니까. 문학이란 참 심오해서 이 작품에 대한 얘기가 우연히라도 나오면 난 다 읽어본 척을 했었다. 왠지 청춘이라면 꼭 접해야 하는 의무처럼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정작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 이 소설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몇 마디쯤 보탤 수 있었다. 샐린저의 은둔자적 삶, 홀든 콜필드를 모델로 한 수많은 하위 장르들까지. 

내가 처음 호밀밭의 홀든 콜필드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시절 사서 선생님을 좋아해서 방과 후에 학교 도서실을 찾았을 때였다. 괜히 문학청년처럼 보이고 싶은 맘에 그녀가 읽던 책을 외워놓고 다음 날 찾아가서 나도 펴 들었다. 인터넷으로 찾은 짧은 지식들을 나열하며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차가운 에어컨 공기와 책 냄새, 티백 녹차 같은 것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물로 난 녀석의 가출 일기에 공감하지 못했다. 지속되는 푸념을 들어주기엔 내가 더 혼란스러웠으니까. 안 그래도 세상 살기 뻑뻑한데 이런 불만 많은 놈의 이야기까지 들어줄 맘이 없었다. 그 당시 내겐 문학의 위대함이란 그저 주변머리 사나운 자들의 헛소동으로 느껴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이 책의 무엇이 좋다고 콕 꼬집어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난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우연히 읽은 인터넷 기사에서 그의 죽음을 접했기 때문이다. 2010년 샐린저는 자신의 방에서 91세의 생을 마치고 타계했다. 


샐린저 평전

‘은둔 작가’, ‘괴짜’, ‘사생활 보호에 과민한 사람’ 등 예사롭지 않은 표현들이 늘 따라다닌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생전 대중매체에 자신의 개인정보가 오르내리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오지에 있는 작은 집에서 스스로 은둔생활을 해온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으나 말년엔 더 이상 유명세를 타고 싶지 않다며 모든 인터뷰를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내 생각에 그는 평생 홀든 콜필드의 그늘 안에서 신음하며 살았다. 그의 작품은 단 한 작품도 홀든 콜필드를 상회하지 못했으니까. 최근 그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샐린저 평전>은 그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읽어보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어주었다.

<호밀밭은 파수꾼>에 대한 인터넷의 반응들은 대부분 가십으로 이루어진 똥 덩어리들뿐이다. 홀든이 아마 살아있다면 토악질을 하며 한 티스푼도 되지 않는 스카치를 게워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존 레넌’과 ‘케네디’의 암살과 연관시켜 놓은 더러운 음모론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소린가. 이러저러한 말들로 가득 찬 세상은 홀든이 밤거리를 배회하며 낯선 세상을 헤매고 있을 때 더욱 화려한 빛을 낸다. 책상에 앉아 그럴듯한 이야기로 세상을 더럽히는 범생이들은 알 수 없는 그런 연놈들이 매음굴을 채우고는 악취를 풍긴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향한 가장 흥미로운 헛소리는 이 작품을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선 젊은이들의 히피 정신으로 묘사하는 부분이다. 청소년의 영웅 만들기에 익숙한 미국인들의 취향에 딱 걸맞은 작화 법이다. 아예 제목이 음모인 <컨스피러시>란 영화에서는 얼굴마저 할리우드 스런 '멜 깁슨'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집에 쌓아놓다가 정보기관에 붙잡히는 촌극을 보여준다. 홀든의 표현대로라면 소설로 암살자를 양산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야말로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시시껄렁한 이야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정작 홀든이 걱정하는 센트럴파크 작은 호수의 오리 들일뿐인데. 녀석들의 행방을 말해주는 이는 하나도 없다.


홀든은 크리스마스 휴가 바로 전에 펜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다. 쫓겨나다시피 짐을 싸서 학교를 떠나게 된 홀든은 3일 동안 집으로 가기 전에 도시를 전전한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쫓겨났고 부모님을 마주 대하고 싶지 않았던 홀든은 죽음과 매춘 그리고 술과 마약, 섹스, 사랑, 도피와 같은 세상의 것들을 맛보지만 결국 욕지기를 멈추지 못한다. 뉴욕 시에서 홀로 며칠을 보낸 홀든은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한 체 서서히 미쳐버린다. 결국 정신병원에서의 독백으로 끝나는 이 책은 죽음을 꿈꿨던 겁쟁이의 투정이었다며 자책한다. 책의 내용 자체가 형에게 혹은 병원에서 하는 독백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팩트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당신이 만약 이 이야기를 도무지 기승전결도 없고,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정신 나간 헛소리처럼 읽었다면 그거야말로 제대로 읽은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홀든의 거짓말하는 성격으로 보건대 지극히 주관적인 허풍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혹자는 이 이야기를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개소리와 다를 바 없다. 어떤 이야기든지 정치적으로 소비하려고 하는 대중에겐 그 어떤 해석도 와 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 콜필드처럼 멋대로 읽어야 제맛인 소설이다.

영화 파수꾼, 감독은 이 작품의 제목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따왔음을 밝힌 바 있다.

하룻밤의 방황 끝에 동생을 찾아간 홀든은 짧은 대화를 나눈다. 유일하게 마음을 주고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생이라는 존재는 그들의 대화를 애틋하게 한다. 그러다 무심코 한 질문이 홀든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한 가지라도 좋아하는 것이 있냐는 동생의 물음에 홀든 콜필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홀든이 겨우 생각해 낸 것은 창문 밖으로 자살한 제임스라는 녀석과 자신의 죽은 동생 앨리 정도다. 홀든은 말한다. 

“누가 죽었다고 해서 좋아하던 것까지 그만둘 순 없지 않니?” 

내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줄을 쳐 두었던 몇몇 구절 중 하나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는 소년 홀든은 아직은 순수했던 때 세상을 등졌던 친구와 동생만을 좋아한다. 홀든이 마음을 주는 것들은 대부분 다 세상과는 분리되어있다. 자신의 머리가 컸다고 해서 좋아하던 것을 버리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한다. 세상 모든 이가 성장과 어른으로의 통과의례라고 말하는 것들을 부정한다. 홀든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말이 없고 정숙한 샐리라는 여자아이, 세상 사람들이 다 놀릴만한 싸구려 모자, 외딴 숲 속의 오두막과 말 못 하는 벙어리 부인 그리고 아이들을 지켜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꿈꾸며 살아간다.

케니스 슬라웬스키의 <샐린저 평전>을 각색한 J. D. 샐린저 전기영화 의 연출은 대니 스트롱이 맡았다.

특히 자신이 존경하던 형이 할리우드의 작가로 편입되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지점이 인상적이다. 형을 항상 좋아하면서도 그의 선택을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 초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말로 나를 황홀하게 만드는 책은, 그 책을 다 읽었을 때 작가와 친한 친구가 되어 언제라도 전화를 걸어, 자기가 받은 느낌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물론 그런 일은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홀든은 형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이야기를 써낼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이 현실세계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자 바로 등을 돌린다. 저자 샐린저가 평생 <호밀밭의 파수꾼>의 영화화를 반대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허름한 술집에서 짐 스틸이라는 가명으로 서지 않는 성기를 부여잡고 떠벌이는 모습을 볼 용기가 없었겠지. 하지만 그의 삶을 그린 영화는 만들어진다. <샐린저 평전>을 각색한 작품이 니콜라스 홀트 주연, 대니 스트롱 감독의 작품으로 탄생한다. 벌써부터 헉구역질을 멈추지 못하는 홀든 콜필드의 표정이 연상된다.


홀든 콜필드식 허세는 나 역시도 자주 하던 헛짓거리다. 괜스레 검은색 옷을 얇게 입고, 종로나 서대문 쪽 황량한 골목들을 걷다가 커피집에 들어가 감상 어린 글들을 블로그에 적고 눈을 감는 짓거리는 많이도 해봤다. 콜필드는 집이 부유해서 받은 용돈을 도시에 펑펑 쓰고 다닌다. 호텔에 들어가고, 술집에 가서 여자들과 술도 마신다. 창녀를 부르고, 택시를 타고 뉴욕을 쏘다니는 이 녀석의 얘기에서 어떤 숭고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단 말인가. 남아있는 감정이라고는 그저 아 나도 저땐 그랬었지 하는 회한 정도일 뿐. 돼지 표 본드 한 사발과 검은 비닐 봉지 한 장으로 마치 세상 다 산 것처럼 반항하는 용기도 없고, 자신을 엿 먹이는 놈에게 주먹 한 번 뻗지 못하는 루저에게 회한은 곧 스러져갈 기억이다. 

영화 Rebel in the Rye

홀든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어른으로 한 선생이 등장한다. 그는 홀든의 방황을 보며 이런 조언을 해준다. 

“미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대의를 위해 고결하게 죽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홀든은 이 말을 되새기지 않는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어른의 꼰대 소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읽은 나는 작가 샐린저의 속내를 얼핏 읽어낼 수 있었다. 자살과 상상 속의 복수는 결코 세상 속에 아무런 파장을 미치지 못한다. 홀든은 자신이 잠든 사이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선생을 보고 급히 집을 빠져나온다. 근처 역에서 잠을 청한 홀든은 그저 자신의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이내 그날 저녁의 기억을 잊고 만다. 

어찌 보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은 세상 모든 부적응자들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용되고 출판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와 화자 되고 있는 것일 테지. 지하철 구석자리에서 이 책을 주머니에 넣고서는 비좁은 사무실 자리로 출근하는 모든 이들에게 홀든의 미친 헛소리들은 주문과도 같은 말일 것이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표지사진 : 영화 Rebel in the Rye의 스틸사진, 17년 여름 한국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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