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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7. 2017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저

과거에 스쳐 지나가듯 본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고 있다.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떠오르는 대로 영화들을 찾아본다. 늘 마음에 담고 있었던 영화들이라 그런지 늘 페이스북으로 훔쳐보던 이와 직접 만나는 기분이다. 매번 놀라는 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영화의 질감이다. 2시간이라는 영화에 내가 내어준 감정은 과거에 본 날과 오늘의 내가 다르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영화 역시 달라진 필터로 걸러진다. 어쩌면 내가 별점을 매겨놓고 단정 지었던 영화들마저 지금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틀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조바심이 든다. 지금의 날 위한 영화가 되어주오.

A Most Wanted Man, 2014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은 존 르카레의 소설에 원작으로 하는 영화답게 치밀한 첩보전이 시종일관 흥미롭다. 첩보 영화 특유의 사무실 속 정치력과 대외관계의 복잡성은 머리를 아프게 하지만, 그걸 보고 싶어서 에스피오나지 영화를 찾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에 기여하는 사람들. 그들의 냄새라도 맡고 싶어서 난 영화를 본다. 영화에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그리운 모습으로 날 찾아주었다. 여러 번 감상한 영화는 작품의 방향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재 관람 땐 인물의 옷차림과 버릇들을 응시하게 된다. 필립의 흐릿한 표정과 누추한 옷차림에 계속 눈길을 보낸다. 

함부르크로 좌천된 노후한 스파이는 삶에 대한 기대감이 없어 늘 비틀린 듯 어두운 밤거리를 걷는다. 습관적으로 무는 담배와 커피, 감정이 없는 말투와 부스러진 유머의 조각들이 스러져가는 항구 도시와 잘 어울린다. 자신을 챙김 없이 술과 담배에 의지한 체 몸의 기댄 그의 표정에서 실제 그가 죽음을 향해 투시한 상황들과 엮여 착잡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로 말미암아 필립이 출연한 <마스터>의 랭커스터 교주와 <카포티>의 트루먼 카포티가 겹쳐 보이며 사무치는 그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필립이 텅 빈 운전석을 남기고 저 멀리 걸어갈 때 뭔가 없어진 듯 허기를 느꼈다. 오늘 끄집어낸 기억의 조각들이 과연 다음 이 영화를 접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작가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외에 한 편의 소설을 한국에 출간했다.

오늘 소개할 책은 '앤드류 포터'라는 낯선 작가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단편집이다. 이 책에서 가장 좋은 건 역시 독특한 제목의 표제작이다. 책방 직원이 이 책을 받아 들면 물리 서적란에 넣지는 않을까. 앤드루 포터라는 이름부터 뭔가 공학자의 냄새가 나니까.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 이후 가장 난해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역자의 해설을 보니 이 제목은 일련의 물리학 실험에서 따왔다고 한다. 낮에 램프를 켜놓고 보면 빛이 유리창의 표면에서 부분적으로 반사된다. 가령 빛의 입자 100개가 있다면 96개는 투과하지만 4개는 부딪혀 돌아온다나. 문제는 어떤 녀석이 투과하고 어떤 녀석이 돌아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적 설명은 소설집 안의 10개의 작품들을 설명하는 좋은 주석이 된다. 하루하루 스쳐 지나가는 인생에 여과된 기억들은 제한적이고, 난 이 책에서 몇 가지 장면들만 내 기억 속에 투과했다.


이 작품집은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편안하게 읽히는 문장과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카버’식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카버의 소설들이 일상의 뒤틀린 지점을 자주 엮어 넣어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면, 앤드류 포터의 인물들은 회한에 젖어 그때는 그랬었지 떠올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문장으로 적어낸다. 점점 더 많은 소설들을 읽다 보니 현실을 쉽게 재단하고, 튀어 오르는 사건들에 반응하여 단정해버리는 이야기들에 지친다. 격정에 사로잡혀 토로하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바꿀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그랬을지도 모른다며 반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저하는 사람들이 좋다. 내가 그랬다면 더 나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한에 젖어있는 문장들에 마음이 놓인다.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저

물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표제작이 좋지만, 하나 더 꼽자면 <구멍>라는 작품일 것이다. 친구를 죽게 한 사건을 겪은 후 인물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그 사건을 재구성한다. 자신이 부추겨서 그런 사고가 난 거라고, 당시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내용이다. 사건 당일 여름날의 아득한 동네 풍경과 주어 담지 못한 후회의 말들이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버지니아는 가뭄철이었다. 2주째 비가 오지 않았고, 기온은 세 자릿수를 기록했으며, 저녁이 되어도 40도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늦은 오후의 공기는 투명하고 가볍고 아주 얇아서 마치 그 속을 움직여 다니는 것이 느껴질 정도이고, 눈을 찡그려 뜨면 쇄석 진입로 위로 물결치듯 솟아오르는 연기가 보일 듯했다.” 

사건 당일의 날씨와 동네 풍경들이 눈에 그려질 듯 정확하게 묘사하면서도 정작 왜 그 구멍 안에 친구를 두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가가지 않는다. 그 사고가 과연 우연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의 기억처럼 편의적으로 편집되고 스스로 막을 씌워놓은 듯하다. 앤드류 포터의 단편이 적극적으로 취하는 것은 그때 그곳의 분위기이고, 과감하게 덜어낸 제스처뿐이다. 이야기의 전후 맥락이 중요한 소설이 아니고, 그때 내 머릿속에 각인된 집과 동네를 둘러싼 스케치를 묘사하는데 공을 들인다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운전석에 앉아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볼 때가 있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어떤 사람은 체크무늬 티셔츠를 입고 껌을 씹는다. 음악을 듣는 여고생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한다. 난 그들을 보며 그들 각자의 인생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상상해본다. 과거에 회안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저 그런 이야기. 차마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하고, 했어야 했을 말을 하지 못해 우리는 지금 여기 이렇게 서있다. 곤란한 표정을 미처 감추지 못하고 흐트러져 있다. 앤드류 포터의  소설 속 인물들이 하는 이야기 안에는 주저하는 말투와 혹시 엇나갈지 모르는 시간의 배열들에 유독 신경이 곤두서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어떤 순간에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다가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사실적이라 가슴을 시큰하게 한다. 가끔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고, 꿈속 장면처럼 몽롱하게 나열된 집 앞 뜰 풍경에 취해버린다. 어쩌면 그들의 기억이야말로 한낮의 꿈이었을지도 모르니까.


표지사진 : A Most Wanted Ma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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