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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7. 2017

먹고 자고 살아남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저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우리 시대에는 세계를 일거에 휩쓰는 파멸이나 재해에 알맞은 새로운 영웅주의가 필요하다. 자기도취에 빠지기보다는 삶에 유용한 행동이 더 필요한 상황에서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는 수단들이 그것이다.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만도 기적이 되는 때에 죽음이란 결코 승리일 수 없다.

내가 서두부터 옮겨 적은 내용은 홀로코스트 등 수용소의 생활에 관한 책을 쓴 <생존자, The Survivor>(테렌스 데 프레 저 )의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고집하고 전파하는 사람들을 살해해버리는 것이 해결책으로 주어지는 세상에서 이 말은 내게 무거운 문장으로 눈에서 떠나질 않았다. 테렌스 데 프레는 같은 책에서 ‘소설 속에 나타난 생존자’라는 챕터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다른 제목 : 이반 데니소비치, 일명 수용소의 하루)를 소개한다. 1962년 이 책은 역사상 최초로 소련 강제수용소의 실체를 제대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스탈린이 죽은 소련에서 강제수용소를 통해 스탈린 시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점이 정부 눈에 들어 다소 격한 소련사회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출판될 수 있었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 1951년, 입소 전에는 평범한 농부였던 그는 부당하게 몇 년 동안이나 영하의 기후 속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고 있다. 슈호프는 제대로 된 옷도 잠자리도 없이, 그 흔한 음식마저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 12시간의 노동을 참고 살아가야 한다.

이 참혹한 상황에서도 소설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밝다. 이것은 억지로 만들어낸 긍정이나 유미주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슈호프는 그저 소박한 지혜를 통해 현실적 난관 앞에서 자위하는 방법을 깨우쳤다.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아주 작은 기쁨의 순간에서 굉장히 큰 만족감을 추출해냈다. 소설을 읽는 나는 자연스럽게 구렁텅이에서 자신을 건져 올리는 사내를 응원하게 됐고, 결국엔 그 마음에 동화됐다. 영화 17도의 혹한에서도 노동의 리듬을 느끼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열기에 기쁨을 느낀다. 고통과 절망뿐인 수용소에서 생명을 음미하는 것만큼 그를 기쁘게 해주는 것은 없었다.

존재와 사멸이 팽팽하게 일직선을 이루는 지점에서 마음속 환상으로 숨지 않을 것.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는 더욱더 자신을 강화시켰다.’라는 묘사처럼 오히려 슈호프는 살아남기 위한 시련을 자기정화 혹은 수련의 과정으로 생각했다. 이 초월적 유희는 노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건 먹는 것에 대한 탁월한 묘사다. 거지 같은 품질의 빵과 희멀건 한 수프를 먹으며 아프리카 먹방을 찍을 순 없다. 하지만 노동 후의 굶주린 배는 이 보잘것없는 식사시간을 조촐한 향연으로 바꿔준다. 사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재밌게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며, 육체적 열기가 신성한 순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을 맛본다.

그는 수프를 황급히 들이켰다. 처음에는 국물만 마셨다. 수프가 내려가면서 그의 전신을 따듯한 온기로 채워 주고, 그의 내장은 고기 국물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뱃속에서 아첨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소리가 마치 굳~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Elle S'appelait Sarah, Sarah's Key, 2010

사실 이런 묘사를 보면 자기연민을 뿌리치고 생존 이외의 어떤 것도 희생물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작년에 사무실 귀퉁이에서 몇 장 씩 찔끔거리며 읽었던 책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서도 이 책을 언급한다. 유시민은 슈호프가 시간과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힘든 시절의 자신을 구제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성인이 되어가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도 자신의 순수성을 박탈당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 전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분히 계몽적이고 노동가치에 대한 실현이 진보적인 이 작품은 당시 스탈린이 죽고 난 후 멍한 상태로 일상을 버텨내던 소년 국민들에게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보며 떠올렸던 영화가 있다. 그것은 이제는 잊힌 2010년도 개봉작 <사라의 열쇠>다. 개봉 당시 이 작품의 탁월한 만듦새에 비해 저평가되었던 것은 아마도 이제는 흔하게 소비되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어두운 과거를 희망으로 재포장한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 시절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알아보는 일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영화는 1942년을 배경으로 프랑스 파리의 한 마을에서 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한다. 유대인 가족인 스타르진스키 일가가 살고 있던 그곳에 나치와 협력한 프랑스 경찰이 들이닥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는 상황에서 사라는 침착하게 동생을 벽장에 숨기고 열쇠를 챙긴다. 안타깝게도 동생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만 수용소로 끌려간다. 2009년의 파리에서 우연히 이 사건을 알게 된 미국인 기자 줄리아(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조사로 벽장 속에 묻힌 사라의 사연을 되짚어간다. 참혹한 학살의 칼날은 피하고, 옷장 속으로 숨어버린 진실을 카메라는 끈덕지게 비추고 서있다.

이 작품은 ‘타티아나 드 로스나이’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작품인데, 알아보니 '벨디브 기습 검거'라는 1942년의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 역사는 망각과 왜곡을 동반한다. 불편한 과거는 현대인에 의해 잊은 척 버려져있다. 줄리아는 기자의 본능으로 진실을 알기 위해 사라의 행적을 조사한다.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묻는다. 도대체 그것을 알아서 도움되는 것이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진실인가를 묻는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줄리아는 사라의 삶을 다시금 현실 위로 펼쳐놓는 그 자체가 유의미의 복판이라고 믿는다. 컴컴한 옷장 안에서 소녀가 지키려고 했던 생존의 존엄은 저널리즘의 윤리와 관련이 있다. 영화는 통곡이나 흥분 없이도 숨겨진 개개인의 삶이 현실 속에 녹아드는 과정으로 비탄을 선사한다.

난 줄리아가 들춰내는 사라의 이야기를 두 눈으로 보며 솔제니친이 창조한 수용소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슈호프라는 인간이 지킨 하루의 일과는 생존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영웅이 탄생되는 이기적인 구조의 세상은 누군가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몸부림을 존중해주지 않는다. 육체적 생존을 더 이상 무가치한 관심에서 배재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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