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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9. 2017

세상에 나쁜 늑대는 없다

철학자와 늑대, 마크 롤랜즈 저

쉬운 철학서, 철학자와 늑대, 마크 롤랜즈 저

철학은 철학이다. 고로 지루함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럼에도 철학을 접하고픈 바람이 어느 한 곁에 있었다. 대학시절 그 지루하다는 철학수업을 겁도 없이 수강했다가 흘린 침이 요단강 물결처럼 차고 넘쳤다. 물론 이 고통을 멀리하고 살 수도 있다. 철학은 단어를 정리하는 데만도 한 바닥의 용지가 필요한 귀찮은 짓 아닌가. 이 바쁜 세상 이런 소모적인 길을 접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으려나 싶다가도 철학 어귀에서 노니는 근사한 책들을 접하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마크 롤랜즈라는 스타작가가 쓴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을 읽었다. 철학을 직접 대면하기 겁나니 철학이 친척뻘 되는 녀석과 사귀는 기분이다. 내가 가진 철학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대중철학서라는 상술에 넘어간 걸까. 어째 대중과 철학이 양립이라도 할 수 있단 말인가. 대중가요도 아니고 대중 문학도 아닌 대중철학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색한 동거에 내가 잠입하게 된 이유는 쉽게라도 철학에 다가가도 싶어서이다.

저자인 27살의 마크 롤랜즈는 그 나이에 철학 교수씩이나 하고 있다. 운동도 잘하고, 얼굴도 지가 꽤 잘생겨서 여자들도 그를 따른다고 자신한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그러다 보니 허구한 날 술 마시고 파티를 즐기며 화려한 싱글로 산다. 어느 날, 삶에 난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한다. 보통 다 가진 사람들이 마약과 술에 절어 살듯 그도 삶의 틈을 매우지 못한다. 어릴 때부터 큰 개들과 어울려 지낸 마크는 ‘개’가 필요했다. 그때 마침 신문에 난 광고, “96% 새끼 늑대 판매!” 속는 셈 치고 구경을 간 마크는 이성을 잃고 만다. 보송보송한 털, 꿀처럼 노란 눈, 모난 데 하나 없이 동글동글한 새끼 늑대에게 한눈에 반했다. 농장주는 철학자에게 혼혈종 늑대개가 아니라 100% 늑대라고 속삭이지만, 이미 마음은 엎질러진 물. 즉석에서 입양하고 만다.

<철학자와 늑대>가 여타 다른 대중철학서와 다른 점이라면 책장을 넘기는 무게감이 덜하다는 것이다. 11년간 한 마리의 늑대와 동고동락하며 생긴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이 늑대의 삶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철저하게 확신하는 철학자는 거침이 없다. 인생이라는 주제를 한 마리의 늑대를 통해 단순화시키려는 시도는 다분히 폭력적이다. 가장 밑바닥부터 쌓아 올린 인간 세계의 바벨탑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삐딱함엔 기존 철학과는 다른 양아치 냄새가 난다. 읽는 내내 이거 사짜를 만나서 현혹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마치 영화 <곡성>을 볼 때처럼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대단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작품을 점철하고 있는 중간중간의 잘난 체는 이를 부채질하는데 그건 작가 마크 롤랜즈가 실제로 꽤 잘난 놈이라는데 그 이유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내가 철학에 고팠던 것인지 책장을 덮을 때쯤이면 이해하게 된다는 게 맘에 든다. 브레닌이라는 늑대의 죽음이 다시 브레닌이라는 이름의 아기로 태어날 때 오는 감동이란 참.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교활한 인간으로 유명한 시시포스를 아는가. 시시포스에게 내려진 형벌이란 이 책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기준이 된다. 그는 신을 속였다는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문제는 그 바위는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는 점이다. 끙끙거리며 바위를 올리려고 한발 한발 내딛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이 무한반복의 형벌은 참으로 끔찍하다. 왜 돌이 무거워서? 아니면 다시 굴러 떨어질 돌을 왜 밀어야 하는가에 대한 박탈감일까?

철학자 마크 롤랜즈 그리고 늑대 브레닌

만약 이것이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조약돌이었음 할 만한 벌이었을까. 육체적 고통이 덜하면 시시포스는 행복했을까. 마크 롤랜즈는 이 돌을 옮기는 형벌이 인간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목표가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말이다. 돌을 옮기고 그것으로 끝이 난다면 목표를 완수했다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무엇인가. 다른 목표를 향해 가는가? 그가 이 돌을 옮기는 행위를 통해 목표 달성의 행복을 느낀다면 달라지는 건 또 뭘까?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부질없는 반복이 불행한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매일매일이 시시포스의 형벌과 다를 건 또 뭔가. 만약 이 돎을 옮기는 행위가 인생이고, 한 발 내딛는 순간들이 하루하루라면 우리는 정상으로 돌을 옮기는 것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목적이 있든 그저 무한한 반복이든 존재의 의미는 찾을 수 없게 된다. 이 어리석은 시시포스는 과업이 힘들어서도 목적이 없어서도 불행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과정이 주는 순간을 잡아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시포스의 형벌은 우리가 단순히 인생이 결코 목표의 싸움이 아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본이다. 그것이 작던 크던 목적과 희망 더 나아가 욕망마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끝이 있건 없건 그 추동력이 행복을 의미할 수는 없다. 마크 롤랜즈는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이라는 터울에서 순간에 충실하라는 다소 피상적 설교를 늑대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늑대 브레닌의 죽음을 통해 그가 목격한 영원회귀(永遠回歸)의 실체다. 현실의 삶의 고뇌와 기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순간만을 충실하게 생활하는 데 생의 자유와 구원이 있다는 철학. 브레닌이 죽음을 앞에 두고 마크는 대리한 환영을 본다. 숨결 하나에 실려 온 브레닌의 고통을 환희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시간의 제스처, 공기가 볼에 닿는 냄새, 브레닌이 마크에게 남긴 실상이다. 똑같은 것이 그대로의 형태로 영원에 돌아가는 것이 삶의 참상인 것이다.

마크 롤랜즈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웬 헛소리냐 하고 넘어갈 지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느꼈던 철학에 대한 거부감에 대한 한 젊은 학자의 참신한 제안으로 느껴진다. 늑대가 지상과 공명하며 나아가는 순간순간에 니체의 공상적인 관념과 대위하는 문장들이 그렇다. 삶은 원의 형상을 띠면서 영원히 반복되는 것이고, 항상 동일한 것이 되풀이된다는 시시포스의 세상.

영화 늑대아이おおかみこどもの雨と雪, Wolf Children, 2012

이 책을 읽으며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를 떠올린 것은 다소 진부한 독법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건 이 영화가 늑대이면서 동시에 인간이기도 했던 존재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크 롤랜즈는 늑대를 그 자체로 이해하는데서 동거를 시작했다. 늑대가 집을 찢고 부숴도 그것은 결국 늑대 본연의 것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늑대의 실존을 존중하고 납득할 수 있는 규율을 정해주는 것을 해법으로 삼았다. 인간의 극심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늑대를 본연의 존재를 인식하는 자세인 것이다. 결국 마크는 불가능해 보였던 늑대와 삶의 궤적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애니메이션 <늑대아이>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택하는 모습을 볼 때 비슷한 사유를 하게 된다. 감독 호소다 마모루는 늑대는 짐승의 아먄, 인간의 속세를 이분화하지 않는다. 저 먼 숲 속으로 사라지는 늑대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영역과 인간 세계가 선을 긋는 지점을 말한다. 이는 인간의 룰과 늑대의 룰이 다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동이다. 엄마의 곁을 떠나 산속으로 사라지는 늑대에게서 느껴지는 위엄. 영장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한다. 하지만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의 사실이나 정도가 아니다. 늑대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늑대가 되는가의 문제다. 이 시점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결코 행복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책엔 지속적으로 니체, 쿤데라, 하이데거, 리처드 테일러, 한나 아렌트, 존 롤스 등 시공간을 뛰어넘은 사상가들의 말이 인용된다. 하지만 난 다 무시해버렸다. 그저 브레닌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쉽게 읽었다. 이것도 철학을 대하는 게으르지만 참신한 독법일지도 모른다. 늑대와의 동거를 통해 인간의 통상적인 자기이해를 뒤집어 보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이 정도면 가벼운 철학으로 꽤 많은 아포리즘을 뛰어넘은 것 같지 않은가.


표지사진 : 늑대아이, おおかみこどもの雨と雪, Wolf Children,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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