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May 09. 2017

뉴스의 질감과 양감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The News-A User's Manual

아침 7시 기상나팔이 울린 후 움직이지 않은 몸을 이끌고 침대를 나서면 하루가 시작된다. 출근 준비시간은 40분 정도 소요된다. 간단한 요기, 몇 가지 정리, 고양이 세수 그리고 뉴스가 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난 포털을 켜서 뉴스를 듣는다. 가장 처음으로는 새벽에 보지 못한 유럽 축구리그 소식을 접하고, 검색어 순위 순으로 포털이 선별한 뉴스들을 차례로 스쳐나간다. 일부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입력되고, 다수의 데이터는 허공으로 날아간다. 최근엔 이런 헛된 기분을 피하려고 포털 대신 팟캐스트나 라디오를 듣기도 했지만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다. 하루에 난 몇 번씩 포털이 실시간으로 띄어놓은 자극적인 뉴스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실속 없는 정보만 그득 채운다.

예전엔 뉴스가 TV와 지하철 가판대를 통해 내게 접근했다. 한동안 정기구독까지 했던 씨네 21이 모바일로 대체되고, 뉴스마저 인터넷의 자장 안에서 동작하자 내게 선택권은 없어졌다. 그저 뉴스가 내게 쏟아져오면 난 그걸 받아먹는 구조다. 액션이 쉽고 간편하니 더욱 쉽게 잊힌다. 이 정도 되면 한정된 시간에 특정 공간에 갇혀있는 매체엔 관심을 두기 어렵다. 인터넷은 그 양과 속도성에서 이제 거의 모든 뉴스가 될 것이다. 9시 뉴스의 정제된 목소리는 포털의 입김 앞에 무력하다. 스스로 포털을 즐기면서도 난 뭔가 잘못 진열된 쇼윈도를 바라보듯 불균질 한 삶을 느낀다. 아마도 그건 포털이 나름 선별한 주요 기사들의 수준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찌라시라고 명명하는 저품질의 텍스트가 저질 댓글과 만나 오염된 욕망을 싸질러놓는다. 뉴스 주변으로 보이는 값비싼 광고들과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주는 쾌락은 작은 네모상자에 몰두하는 인간들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왜 이 뉴스를 보는 걸까. 그런 자조가 뒤덮는 요즘의 뉴스들이다.


요즘처럼 저널리즘의 윤리가 강조되는 시기는 내 기억엔 없었다. 한 종편 뉴스 프로그램이 정부의 썩은 환부를 들춰내자 종편 뉴스 프로그램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우리가 특정 언론사의 편협한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종편이라는 루트가 대중의 뉴스를 양산했다. 특히 조중동이라고 욕을 먹던 보수 언론사(정부 친화 및 대기업의 투자를 상징하는)가 현 정부에 칼을 들이대자 대중들은 공중파에 관심을 끊었다. TV가 유효하지 않은 요즘의 뉴스 환경에서 종편은 이슈를 선점하고, 활동력을 과시했다. 그렇다고 그것은 진짜 뉴스인 걸까.  

JTBC 손석희 뉴스룸

알랭 드 보통은 저서 <뉴스의 시대>에서 마지막 장을 남겨두고 이렇게 말한다. 

“뉴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독창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 

뉴스란 것이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면 뉴스를 대하는 자세가 결국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는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은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현대의 뉴스란 것이 즉시성의 쓰레기이고, 감정 없는 텍스트의 나열일 뿐이라는 비판적 견지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를 곧이곧대로 흡수하지 않고, 사유의 공란을 마련할 수 있으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강조를 잊지 않는다.

결국은 스피노자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 것이다.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한다. 자신만의 생각을 잉태시킬 만한 인내심 많은 산파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는 단단한 무언가를 갖긴 요원하다. 정보의 선별, 그 힘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는 사고의 무장.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는 뉴스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건 결국 자체적인 검열이다. 내가 품은 비옥한 숲 없이 그 어떤 토양도 무용하다. 사무실에서 옆자리의 아무개와 대화할 때, 늘 느끼는 사실은 내 것이 없이 인용하는 것만으로는 대화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부정을 보고, 연예인의 스캔들을 마주할 때도 그것이 팩트 이상의 가치를 지니려면 내가 품은 사고의 영역에서 그 정보가 어떠한 형태로 주조될 것인가의 판단이 필요하다. 나열된 정보를 그 이상으로 살아나게 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스(choros)는 수시로 이야기에 개입하여 감정의 방향을 설명하고, 등장인물의 행동에 맥락을 부여한다. 코로스가 작품의 주요 요소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공포감만 유발하는 아무 의미 없는 서술이 비극이라는 지극히 문학적인 교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치 <오이디푸스 왕>에 등장하는 비극 속 주인공들을 단순히 미치광이들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건에서 인간이 사악한 사람만이 그런 짓을 저지를 것이라는 문제의식 대신, 내가 같은 상황이었어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경각심이 중요하다. 우리 시대의 뉴스가 냉혹한 현실의 거울이 되기보다는 다소 굴절된 해석이라 할지라도 담론을 자아내는 계몽의 기능을 탑재하지 않는 이상 지금처럼 찌라시라는 오명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State Of Play, 2009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를 해보자. 그가 인기가 있는 이유는 그가 마주하는 다방면의 관심사에 있을 것이다. 사랑, 여행, 예술, 건축 등 가리지 않고 과감하게 옮겨 적는 그의 사고는 어느새 독자들이 동경하는 삶의 자세처럼 보인다. 나 역시 그의 수많은 베스트셀러 중 몇 권을 골라 읽었다. 사실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감동을 얻는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그의 인기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를 더 궁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의 저서 중 불안을 가장 좋아한다. 이 책은 그의 책 중 유일하게 조언이 아닌 자신의 고민에 대한 질문을 연속으로 던짐으로써 공감을 극대화하는 것에 힘이 있다. 그 밖의 책엔 <뉴스의 시대>가 가진 단점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뉴스의 시대를 읽으며 난 알랭이 우리 삶 속에 늘 존재하는 현실적인 소재들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함과 동시에 일종의 자기계발서 역할을 적절히 수행함을 알아차렸다. 대답을 정해놓고 책의 전개를 진행시키는 기승전결의 구조에 천착하고 있다. 문장의 취지와 미학적 결은 좋지만, 끝에 가면 하나로 귀결되는 결론에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내가 알랭의 전작들과 이번 책 <뉴스의 시대>에도 호감을 표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말은 곧 그의 책들이 대중친화적이라는 것과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일종의 자기개발서처럼 인상적인 몇몇 구절에 비해 이야기의 담론이 결론을 위해 갇혀있다. 단정하지만, 흥미롭지 못하다. 때론 물음에 답하지 않을 때 고민은 더욱 확장되고, 결은 더욱 두터워질 수 있다.


어제 TV에서 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 맥카프리라는 기자는 시대의 빠른 흐름에 역행한 고전적 스타일의 사건기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발로 뛰고, 입으로 매수해 펙트를 적고, 손으로 써서 기사를 낸다. 그에겐 빠른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독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젊은 후배가 아무리 블로그와 SNS의 효율성을 설명해도 고지식한 표정으로 무시할 뿐이다. 맥카프리는 지나친 속도성이 글의 질을 저해하는 것을 우려한다. 빨라짐으로 해서 없어지는 것들, 이는 단순 사실의 왜곡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빠름은 곧 이야기의 사려를 없앤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에 나쁜 늑대는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