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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14. 2017

소년과 호랑이 그리고 바다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저

소설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저

텅 빈 바다에 고무보트가 떠있고, 그곳에 소년과 호랑이가 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나 나올법한 이 이미지는 소설로 주목을 먼저 받았고, 이제 3D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본 이들의 말대로라면 이 책은 고전이 될 것이라 쉽게 예상한다. 오늘은 소설 <파이 이야기>에 관해 몇 가지 적어본다.

16살 소년 파이는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가 파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창작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늘 피싱(Pissing)과 발음이 같은 이름 때문에 오줌싸개로 불렸으나, 그는 앞의 두 글자(PI)로 자신을 축약시키는 동시에 파이가 가진 수의 무한 배열을 암기해 자신의 운명을 전환했다. 파이는 신을 믿지만, 종교의 부박함에 혼란을 겪는 소년이다. 하나를 주면 여럿을 줄 수 있다던 수많은 종교의 신들은 그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골목길을 걸을 때면 눈을 찌르는 햇빛과 땅의 포근한 냄새는 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했지만, 세속의 영역에 들어선 신들은 인간의 혼란을 부추길 따름이다. 파이는 풀리지 않는 몇 가지 명제들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 의문들이 풀리지 않고서는 어른이 될 수 없다는 듯 파이는 머뭇거리는 청년으로 성장한다. 

파이의 가족은 캐나다 이민길에 오르지만 배가 난파되어 모두 죽는다. 파이 자신만 자그마한 구명보트에 올라타 목숨을 연명하게 된다. 보트엔 보름가량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과 헛된 도구들이 있을 뿐이다. 난데없이 무한의 궤도 위를 부유하는 파이에게 닥친 것은 죽음 하나뿐이다. 난파된 배 위에 파이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친 얼룩말, 날렵한 하이에나, 순한 오랑우탄 그리고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있다. 다른 동물들은 금세 목숨을 잃는다. 소설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에겐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의 틀을 만들기 위한 소모품일 뿐이다. 오로지 리처드 파커로 명명된 호랑이만이 파이와 같이 이 바다 위에서 존재감을 드리운다. 


이 잔잔한 바다 같은 이야기 안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소설이 초반에 깔아 둔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신과 종교, 꿈과 죽음, 인간과 동물이 그것이다. 파이는 어릴 적부터 죽음을 두려워해 힌두교(비뉴수), 가톨릭(예수), 이슬람(알라)의 교리를 차례로 섭렵해 나간다. 그들 각자의 교리를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 결과 파이는 행복에 가까운 청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동물원의 주인이기도 한 서구식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아버지의 다른 결 때문이다. 파이의 아버지는 어릴 적 중병을 앓다가 당시엔 드물었던 서구 의학으로 목숨을 건졌던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신앙에 의지해 인생의 기반을 쌓아가는 파이를 위태롭게 바라본다. 신성과 이성의 경계 안에서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한 체 대답을 유보해가는 파이에겐 세상을 쉽게 단정하듯 말하는 아버지가 부담스럽다. 파이는 깨달음으로 인생을 추동하는 승려처럼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종교는 세상을 단순화하여 이해하는 틀과 같다. 인생이라는 조각을 쉽게 끼워 맞췄을 경우에 폭력적으로 요악되는 삶의 다양한 결들을 모른척할 순 없다.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초등학교 시절 난 담임 선생님의 지시로 반 아이들과 함께 십 년 후의 내게 편지를 썼다. 쓰고 난 후에 교실 앞에서 발표할 수도 있었기에 허무맹랑한 내용 없이 건전하게 적어냈다. 그 당시 내가 편지 속에 그렸던 십 년 후의 나 자신은 신념과 믿음 앞에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 당시 내가 그렸던 이상향이라는 건 완벽한 이성주의자 그 자체였다. 인생이 보편적 법칙 안에서 순응하고, 합리적 사고에 수긍하는 그런 어른 말이다. 종교는 기복신앙의 어리석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난 파이의 고민과 아버지의 확신은 불길하게 흔들리는 불꽃처럼 상처받기 쉬운 한 인간의 이중적인 내면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파이가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의 우정을 통해 구명보트 안에서 이야기를 엮어나갈 때 파이가 얻는 것이 있음을 보았다. 파이가 기록한 물에 젖은 일기장의 텍스트, 늘 풍요를 갈망하며 태양 앞에서 얻어낸 상상의 산물. 그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이고, 큰 혼란의 종착지임을 보았다.


처드 파커가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가 이름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에게 성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성격이란 말과 행동을 통해 취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의 행동을 추론하는 파이의 해석이 동물에게 캐릭터의 자리를 부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동물원 아들답게 호랑이의 습성을 정확히 알고,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던 파이는 그를 인물화 하는데 적합한 사람이었다. 이 조촐한 무대 위에 두 사람은 사건을 만들고, 위기에 봉착해 그것을 이겨냄으로써 이야기의 조건을 달성했다. 지극히 본능적인 식욕과 고독이라는 그리움 그리고 신과 바다라는 영혼의 참호가 다시금 파이를 육지로 이끌었다. 이는 스토리의 형성(상상)이 구원의 동아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귀결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2012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 반전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알고 보니 사실은 이러했다며 무릎을 쳐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어른 파이는 분명히 말했다. 원하는 이야기를 취사선택하라고.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우리는 종교에 의탁할 수도 있고, 스스로 이성이라는 지팡이 위에 위태로운 걸음을 지속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은 책과 영화의 맥락에 휩싸여 마치 환각에 빠진 듯 삶을 갈지자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파이는 이야기의 축이었던 호랑이가 실제 땅으로 사라지자 서럽게 울고 만다. 이제 이야기는 끝이 났고, 현실의 막연한 벽 앞에서 또 다른 창작의 고통을 겪어내야 한다.


기서 저자 얀 마텔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재밌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것으로 한 때 뉴스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텔은 

"조금은 뒤로 물러나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독서가 필요하다"며 "현재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광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통령님이 진정으로 무엇을 하기를 바라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냉철하게 판단하기 힘들 것"

이라고 썼다. 특히 그는 소설 읽기를 강조했다. 

"픽션을 읽으십시오.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모든 정치인이 원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 말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너무나 의미심장해졌고, 마치 호랑이를 떠나보낸 파이가 훌쩍 커서 101번째 챕터에 적었을 말을 요약한 것처럼 느껴져 재밌다.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

결국 종교와 현실 그리고 이야기다. 종교는 신이 정해준 스토리에 기거하며 삶의 번민에서 도피하는 아늑함이다.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앞에 벌거벗은 몸으로 위태롭게 걸어가는 자유의지의 여정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현실세계를 조금 변형시켜 자기 입맛에 맞게 살아가는 인간만이 가진 편의적 인생이다. 파이는 이야기를 믿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작가 얀 마텔은 신과 현실 앞에서 갈등하던 소년에게 바다 위의 표류 서사를 주어 결국 이야기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길 원했다. 난 오랜 시간 동안 호랑이 한 마리와 소년의 바다를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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