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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14. 2017

진짜 쾌락과 가짜 삶

종이달, 카쿠다 미쓰요 저

소설 종이달, 카쿠다 미쓰요 저

동전 뒷면의 삶


집 앞 버스 정류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다른 동네에 가고 싶은데...라고 생각하며 노선표를 살폈다. 이른 아침, 구름마저 없는 청명한 날씨였다.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도 어제 내린 비에 씻겨졌다. 작게 다짐한다, 늘 타는 150번 버스 말고 다른 버스를 타리라. 이 동네 저 동네 이름마저 특이한 여러 정거장을 모두 살펴 보았지만, 짧은 고민 끝에 도로 150번 버스에 몸을 넣었다. 결국 그 날, 난 다른 동네가 아닌 10분 거리의 여의대방로의 한 카페에서 책 한 권을 꺼내놓고 주말을 보냈다. 


누구처럼 살지 않겠다고 늘 다짐하면서도 지하철 플랫폼의 어둠 속엔 익숙한 사내가 서 있다. 낡은 지하철에 몸을 기대고 폰을 뒤적이다 액정을 끄면 시간을 허비하는 나를 본다. 애써 고개를 흔들고는 보편타당한 길에서 몸을 지탱하고 서 있다며 스스로 자위하는 모습이란. 우리 집 앞 골목길과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정류장은 늘 평온한 마음을 불러오지만, 내일도 또 내일도 같은 버스에 몸을 싣는 인생이란 무엇일까. 애써 만들어놓은 여권엔 도장 하나 없고, 유예된 하루들이 재고정리를 위해 내 창고에 쌓여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가끔 평온한 일상을 깨고 혁명의 길로 다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는다. 당신들의 업적을 부러워하며 욕을 한다. 거 속 편해서 좋겠소. 깨고 부수고 떠나서 당신은 행복했을까. 남과 다르다고 자랑하는 에세이는 거부감이 든다. 지도를 뚫고 행군하라며 등 떠미는 자기개발서도 질색이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그런 현실에 침묵하고, 더딘 발걸음이라도 진척이 있는 건지 질문하는 책들이 좋다. 


소설과 영화가 서로를 지탱하는 텍스트 <종이달>


서사적으로 <종이달>은 고객의 돈을 착복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의 이름은 리카, 은행에 다니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편과 결혼했다. 리카는 40대 가정주부로 나이답지 않게 곱상한 외모와 상냥한 말투를 지녔다. 늦은 나이어서 아이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적은 월급이나마 벌어보려고 계약직으로 은행에 취업했다. ‘예상대로’ 리카는 특별한 눈빛을 보내는 20대 청년을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처음엔 화장품 가격이 좀 모자라 고객의 예금액에 손을 댔다. 그저 푼돈으로 시작한 행위들이 시간이 지나자 점점 대범해져 10억 원에 가까운 돈이 그녀의 소비패턴으로 흡수되었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것 역시 쉽게 추측 가능하다. 청년의 몸에 걸쳐진 귀금속과 대학 등록금, 더 나아가 헛된 사업자금으로 줄줄이 번져나간다. 리카 역시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하고,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과 외제차를 사서 소비와 시간을 일치시킨다. 그녀는 이것이 자신의 숨겨진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어 진다. 이제 리카의 삶은 변했을까. 그녀의 범죄가 발각되고, 누군가가 휘갈겨 쓴 사회면의 한 귀퉁이엔 불륜과 착복, 도주라는 낯선 단어가 리카의 이름 옆에 붙어있다.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2014

<종이달>은 마치 눈에 아른거리는 잔상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이야기다. 이런 여자 우리는 꽤 많이 들어왔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잔상들이 작가가 만들어낸 의도적인 ‘흔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뻔한 유부녀 불륜 스토리에서 뭘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어느 주부의 삶을 그린 드라마가 늘 그렇듯 그녀의 일상 역시 잔업으로 가득 차 있다. 끊임없이 일하지만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누구도 뭐라 할 것 없는 잔류한 삶에 불과하다. 가녀린 몸에 생명력은 사라져 있고, 부침이 있는 결혼생활의 원인은 알 수 없다. 세심한 듯 무심한 남편의 말 한마디에 스스로 자책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누가 보기에도 행복한 삶이어야 마땅하기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던 리카는 은행에 출근하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한다. 단순 잡무만 맡아볼 거라 생각했지만, 인상이 좋고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리카는 노인을 대상으로 외판 업무 담당한다. 돈은 많은데 자식들과는 멀어진 노인들은 그녀를 딸처럼 대한다. 실적은 올라가고, 그녀는 자신감을 얻는다. 그리고 20살 갓 넘긴 수줍은 청년 고타와의 섹스는 식어버린 남편과 달리 전에 없이 짜릿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허기진 배는 만족을 모른다. 어딘지 공허하고 불안하다. 그리고 책을 뒤적이던 나는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는 ‘만능감’萬能感이라는 단어에 쳐진 동그라미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만능감 품은 가짜의 일상


만능감은 만족이 아닌 만능이다. 마치 이 우주의 중심이 된 듯,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기분. 리카는 고타와의 첫날밤 이후 상쾌한 새벽 공기와 달뜬 표정, 그리고 하늘에 걸친 희미한 새벽달을 보며 행복의 실체를 실감한다. 고타는 리카에서 성적인 만족으로 정의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리카에게 소유욕을 자극하는 대상이다. 그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이다. 리카는 오로지 자신이 만능감으로 정의되는 성취를 얻어내기 위해 고타를 만났다. 그래서 고타가 리카 몰래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할 때, 그것이 분에 못 이길 만한 파렴치한 행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건 유부녀의 도리도 아니고, 고타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리카가 두려워하는 점은 그를 소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타 역시 그녀의 만능감을 위한 소유재산 리스트의 한 건일뿐이니까. 고타의 엇나감은 소유 리스트의 누락에 불과하고, 그녀는 돈과 기회를 고타에게 앗아감으로 해서 고타와의 손익분기점을 맞추려고 한다.

<종이달>의 작가 가쿠다 미쓰요, 대표작으로는 <8일째 매미>, <대안의 그녀>가 있다. 

영화가 자본주의의 병폐와 명확한 한계점을 종이달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 왜냐면 화폐의 불명확한 개념을 대신하는 그 무언가를 소설적 상징으로 만들고자 생각했을 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상징이기 때문이다. 희미하고 미세한 존재감의 달은 어쩌면 리카가 다른 인생, 다름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뜻하는 건 아닐까. 돈과 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인간의 무력한 인생은 화폐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 속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 달의 불분명한 형태처럼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소설은 그 쓸쓸한 뒷맛이 지속적으로 혀를 따끔거리게 한다. 관계의 깊이란 새벽의 희미한 달처럼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어서 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소설의 모든 서스펜스는 그녀의 횡령에 있는 게 아니라, 그녀가 고타를 잃어버릴까 두려움에 떠는 순간 그리고 돈을 누가 낼지 눈치를 보며 다른 이 앞에서 관계의 우위를 점하게 위해 탐색하는 긴장감에 있다. 다른 이의 기색을 살피며 내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이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인생. 그것이 종이달이 종이화폐의 은유로 보이는 까닭이다. 


리카를 둘러싼 사람들


소설 속에서 리카를 기억하는 주변인들의 사연들이 참 좋다. 영화에는 없는 설정으로, 리카를 입체적인 인물로 그리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사치욕을 못 이겨 가정을 깨뜨린 여자, 딸과의 관계마저 돈으로 사려하는 화려한 엄마, 과도한 근검절약으로 부박해진 삶을 수습하지 못하는 동창생. 그리고 늘 상대에 관대했던 맑은 소녀. 그들은 마치 소설을 읽는 내가 ‘우리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말 그대로 주변인들이다. 늘 돈에 휘둘리며 인생의 전환점을 놓치고, 스스로 회안에 젖어 가끔씩 뉴스 속에서 특별해진 리카를 생각하는 우리들. 불륜과 횡령, 도피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조롱당하는 리카. 그녀는 어디 있을까. 리카는 스스로를 향한 가능성을 갈구하는 이름이다.

종이 달 紙の月, Pale Moon, 2014

영화와 소설 모두 돈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는 과정을 적절하게 묘사한다. 처음에 고객의 돈을 사용하고, 다시 채워 넣었는데 소비는 진행되었다. 장부를 조작하고, 고객에게 허위 문서를 주며 돈은 어딘가에 소비된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애지 않았지만 소비거래는 성사된다. 돈이라는 개념이 무턱대고 머리에 덩어리로 자리 잡다 보니 얼마를 벌어 어떤 방식으로 상환할지엔 생각이 가닿지 않는 것이다. 화폐가 단순해지고, 신용카드가 보급되고, 이제 더 이상 눈으로 돈을 세지 않아도 숫자로 적혀있는 허상에 불과한 돈이 과연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가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그 무언가를 시간을 허비하며, 오늘 하루 행복에 젖지도 못하면서 십 년 이십 년 계획을 세우며 행복을 추려내기 바쁘다. 영화의 말미, 그녀의 횡령이 세상에 알려지고 리카는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닌다. 도피를 하면서도 그녀는 스스로 갇혀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소비하지 못하기에 존재할 수 없다.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종이달>의 주요배경은 일본은 버블경제가 사라지던 시점에 있다. 일본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버블경제의 몰락 속 인간들의 군상은 종이달도 비켜가지 않는다. 우리가 민주화 항쟁의 징후를 통해 한 장르를 형성했다면, 일본은 버블경제 그 이후의 삶이 하나의 보편타당한 사회의 지류로 다양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사회파 미스터리를 장르의 외피를 두른 미스터리 소설들은 한국에서도 크게 사랑받고 있다. 특히 각종 명품 브랜드로 대표되는 중산층의 삶은 급격하게 불어난 융자액과 빈부격차, 고금리 대출의 늪 같은 이미지들을 양산한다. 스스로 빚을 늘리면서도 윤택한 삶을 포기할 수 없는 도시인들은 욕망과 섹스를 입에 올리기 주저하면서도 천박한 소비패턴을 바꾸지 못한다. 영화에서 리카(미야자와 리에의 가녀린 몸매)가 구입한 평품 옷과 보석들 그리고 고급식당과 호텔 스위트룸의 모습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마음을 감추기 힘들다. 이는 한국사회의 범죄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신기할 정도다. <종이달>은 리카를 은숙이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은 기시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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