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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n 07. 2017

희박한 공기 속으로

논픽션 <희박한 공기 속으로>, 영화 <에베레스트>

2년 전 영화 <에베레스트>에서 로브 홀과 스캇 피셔가 마주했을 때 오랜 친구와 재회한 느낌이었다. 화려한 배역진마저 무색하게 할 정도로 원작에서 읽었던 두 사람의 인장印章이 대단했다. 영화는 원작을 필사하듯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갔고, 난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읽었던 기억에 빠져들 수 있었다. 대자연의 위압감 앞에 스러지는 인간들은 비극을 향해 더딘 발걸음을 지속했고, 죽어가는 로브 홀의 시신을 머릿속에 그리며 지친 고독감을 느꼈다. 영화라는 시각매체가 아니면 구현할 수 없었던 이미지의 해방감은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더 자유롭게 만들어줬다. 그 자유란 마치 원작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서사 너머의 혼란이었다. 글이 아닌 이미지가 주는 재난의 현장, 어쩌면 원작을 읽고 이 영화를 보는 건 그 혼란으로 투신이 아닐까.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가장 뜨거웠던 1996년, 이 책의 저자인 존 크라카우어는 <아웃사이드> 잡지사에 근무하던 1996년 5월 10일, ' 로브 홀'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가이드가 인솔하는 상업등반대의 일원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전한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상업 등반 가이드 로브 홀과 치열한 경쟁 시장에 갓 뛰어든 등반 사업가 ‘스캇 피셔’,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최고의 등반대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한다. 그러나 이 등정 과정에서 가이드 로브 홀을 비롯한 다른 4명의 대원은 불의의 악천후를 만나 정상을 밟고 하산하는 길에 사망했다. 그리고 당시 다른 팀의 대원 8명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지상 위 산소의 1/3,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영하 40도의 추위, 뇌를 조여 오는 극한의 기압까지. 높이 올라갈수록 열악해지는 기후에 맞선 이들은 자연 앞에서 낙엽처럼 스러져간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눈사태와 눈폭풍이 에베레스트를 뒤덮고 수많은 목숨은 눈 속으로 증발한다.

원작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처절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이라 그런지 영화에 인물 하나하나가 등장할 때마다 그들의 인생이 고스란히 내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영화를 보면서도 원작의 서브 텍스트가 그들의 등 뒤로 자막 처리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마치 20부작 미드처럼 그들의 인생 하나하나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는 기분이었다. 스캇 피셔를 보면 그의 20대 시절의 모험담이 생각나고, 로브 홀을 보면 그가 혼자서 상업등반대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감당하며 되뇌는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이 책의 원제는 Into thin air : a personal account of the Mount Everest disaster이다. 말 그대로 존 크라카우어가 기자라는 직분을 십분 이용해 쓴 사고 당사자들을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이다.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고, 산 사람들은 감정의 날이 잔뜩 서있다. 사고를 향한 이해관계는 저마다 다르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적 착각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집필한 때가 사고의 여파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건 1년 후라는 점은 꽤 충격적이다.) 때로는 이 참혹한 재앙에 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아직 정신적 상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당시 생존자를 향해 사정없는 질문을 쏟아부을 때면 격렬한 분노가 피어오른다.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고조되는 감정에 못 이겨 인터뷰를 포기한다. 이 모든 상황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기자 존 크라카우어는 사건의 생존자지만, 삐딱한 시각으로 보면 당시 사고를 멀찍이서 지켜본 방관자다. 하지만 사실을 완벽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중계하는 기자로서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건조하면서도 주저 없이 치고 나가는 힘 있는 문장으로 날 사로잡았다.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저

재난 이 책을 읽으며 저널리즘이 실화와 만나 피어나는 문학이란 게 어떤 방식으로 독자를 파고드는지 경험했다. 영화 <에베레스트>는 크라카우어의 목소리가 없어 매력이 덜하다. 하지만 비극의 이미지가 명징해질 때 그 비극은 속성을 달리한다.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주는 과거와 희생자를 기다리는 가족의 얼굴들이 마치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는 격한 감정을 불러오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이 책은 더 유명해질 테고, 아마도 나 이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자신의 마음에 담을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영화에서 재밌는 점은 존 크라카우어가 실물보다 더 못생긴 외모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크라카우어를 연기한 배우 마이클 켈리의 기존 이미지가 워낙 차가워 더 그런 기분을 안겨줬다. 원작을 읽을 땐 이 거친 이미지의 잘생긴 청년이 보는 시각으로 사건 현장을 둘러보았다. 크라카우어의 감정에 이입해 호주에 가서 인터뷰를 따고, 그의 기억 속에 들어가 희미한 기억을 들춰 올려 사건을 재구성했다. 하지만 롭 홀과 스캇 피셔를 주인공을 한 영화를 보고 나니 사고의 내용과 상관없이 크라카우어는 이 사고의 철저한 외부인임을 깨닫는다. 그가 이 사건에서 로브 홀처럼 희생자의 구조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희생해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그저 이 처절한 이해관계의 각축장에서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그는 완벽한 중계진,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한 완벽한 적임자였을 것이다.


영화가 감동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 과장되게 섞어 넣은 가족과 임신한 아이를 향한 부성애는 이 영화의 옥에 티에 가깝다. 난 이 여행에 참여한 개개인의 사연들이 복합적인 시선으로 그려졌기를 바랐다. 그래서인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크라카우어의 눈빛은 원작과 함께 중요한 복선으로 암시된다. 산은 거기 있기 때문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돈을 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고, 돈을 벌 수 있기에 무리해서 오르는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비록 사고를 예상하며 이 사건 현장에 방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 사고를 세상에 내놓아야 할 충분한 입장을 가진 기자였다. 그는 본 것을 자신의 소신대로 해석하여 우리가 모르던 그들만의 세계를 서울에 사는 내게 알려줬다. 텅 빈 거실 소파에서 창문을 열고 따듯한 햇살의 냄새를 맡으며 난 수 천 킬로 떨어진 에베레스트 산맥에서 벌어진 가슴 아픈 사건을 그토록 현실감 넘치게 맛본 셈이다.

영화 에베레스트

흥미로운 사실은 사건 현장이 철저하게 돈으로 엮인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가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택한 무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는 인생의 전환점을 가지겠다며 눈물짓고, 그 누구는 아내를 위한다며 설치지만 결국은 다 돈으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구매하려다 죽은 사람일 뿐이다. 심지어 롭 홀은 명당 5만 달러를 받고 정상을 노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업가였기에 그가 참여자 개개인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고 극찬할 수만은 없다. 낙오자가 많으면 그의 사업에 지장을 받는다. 그러니 2번 실패할 위기에 있는 앤디 해리스(우체부)를 기어코 정상에 올렸다고 해서 감동할 건 없다. 오히려 상식과 순리를 벗어나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던 어리석은 판단에 안타까움을 표할 뿐이다. 


에베레스트를 티베트에서는 ‘초모룽마’라 부른다. 뜻을 살피면 초모(Chomo)는 '여신, 수도녀, 여주인'을 뜻하며 룽마(Lungma)는 '산골짜기, 지역, 경지'를 뜻한다. 그래서 초모룽마는 '대지의 여신, 세계의 여신'을 뜻한다. 또 네팔인들에게는 사가르마타(Sagarmata)로 불리며 그 뜻은 초모룽마와 같다. 결국 이 신성한 산은 그들에게 성역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곳에는 인간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가득하고, 서구인들에게 노예처럼 부려진 셰르파들의 시체가 한가득이다. 티베트와 네팔의 가난한 사람들은 셰르파가 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어려서부터 고된 산에서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사고는 필연적이고, 돈이 개입된 정상 탐험은 그 필연을 애써 무시한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그 확장성에서 더 큰 가치를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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