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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로의 긴 여로

by 박민진

오늘 외출을 해서 시내에 들어섰는데 벌써 캐럴에 전구가 환한 트리가 설치되어 있더군요. 날짜도 11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는데요. 올해의 수확은 뭔가 생각하니 약간 허무해지기도 합니다. 아직도 뭔가 나아지는 한 해를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속고도 아직 기대를 해?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할리 없잖아. 그냥 시간을 흘려보내면 되지 뭔가를 12달 내에 이뤄야 한다는 건 얼마나 골치가 아픈가요. 하루를 열심히 쪼개기에도 바쁜데 1년 단위로 생각하는 건 미련합니다. 작년보다 '더 나은 나'라는 걸 믿지 않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요.


독서모임을 비롯한 커뮤니티에서 제가 제가 기획자나 진행자들에게 교육하는 내용 중에는 마무리 발언의 중요성입니다. 끝에 종결 어미가 있는 모임이 가진 만족감에 관해 강조합니다. 이건 모임을 아주 오래 하면서 체득한 사실인데, 끝에 우리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정리하고 나면 열띠게 보낸 3시간의 시간에 의미가 부여됩니다. 어쩌면 눈속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3시간의 소감을 말할 때는 아무래도 다들 서로를 앞에 두고 있으니 좋았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그런 것을 더 믿어요. 함께 즐겁게 보내겠다는 결의. 이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다정함에 삶이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고.


그래서 저도 올해의 수확을 꼽아보려고 합니다. 추수를 한 농부처럼 컨디션이 안 좋은 날도 있고, 변변찮은 수확에 골몰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1년 단위로 보면 미덕이 있을 테니까요. 최근 성만 님과 대구 달서구에 위치한 두류공원을 뛰고 있어요. 오르막이 많아서 정말 힘들더군요. 혼자서는 절대 못할 일을 시쳇말로 갓생을 산다는 성만님의 동력을 벗 삼아하고 있어요. 하루가 촘촘히 돌려나가는 포부스의 파트너 성만 님은 정말 멋진 분입니다. 계획이 딱 서 있다고 할까요. 클럽 명칭이 포부스인 것도 그 포부 때문이에요. 러닝처럼 오르막이 와도 앞으로 팍 치고 나가는 힘. '내리막이 와도 긴장 풀지 마세요 민진 님. 더 촘촘하게 조이세요. 그래야 지치지 않아요.' 저는 책에 나왔다면 분명히 밑줄 그의 조언을 들으며 숨 넘어가는 시간을 버텼습니다.


한밤에 러닝을 하다 보면 캄캄한 와중에 서로의 얼굴을 볼 필요 없이 여러 대화를 하게 됩니다. 대화 중에 성만 님은 내년 26년도에는 새로운 공부를 한다더군요. 뭔가를 하나씩 이루는 것이 가지는 삶의 재미를 얘기했습니다. 저도 흔쾌히 동의했어요. 그거 좋지요. 뭔가를 이루는 공부는 하나도 않고, 암기를 하지 않는 것을 인생 모토로 사는 입장에서 부러운 마인드였습니다. 저는 사실 포부가 전혀 없거든요. 일주일에 몇 번씩 러닝을 하고 풀타임 마라톤을 뛰며 더 나은 기록을 위해 스스로를 재촉하는 성만님의 스텝은 가볍고 맑아 보였습니다. 저의 러닝메이트가 신의 삶을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성만 님의 말을 듣다가 나는 왜 운동을 하는가 따져봤습니다. 물론 아직 연애시장에서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아직 할 수 있어! 그런 마인드로 스스로를 다독여서 헬스장으로 갑니다. 영포티를 향한 조롱에 지지 않으려는 나이키 슈즈와 거꾸로 쓴 랄프로렌 모자는 애처롭습니다. 제게 다음 스텝은 없습니다. 꼭 이뤄야 할 목표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헬스장에서 100킬로의 바벨을 죽상을 하며 들어냅니다. 에어팟에서는 래퍼 창모가 약해빠진 소리 하지 말라고 저를 비난하고, 저는 입으로 쉬벌을 외치면서 스미스 머신 안으로 들어가죠. 노이즈 캔슬링 기능 덕택에 제 쉬벌 소리가 옆자리 제시믹스 형형 색깔의 타이즈 여성분의 귀에 들어가면 비웃음을 삽니다. 고작 100킬로에 욕지거리까지 하다니.


운동의 참맛이라는 책을 쓴 작가도 육체의 쓴맛을 깨닫고는, 두류공원 오르막을 성큼성큼 뛰어오르는 청년 성만님을 보며 부러움에 젖습니다. 올해 군살이 확실히 는 저는 최근 모임에서 이런 얘기도 들었습니다. 민진 님은 울세라 맞으면 딱인데 딱 300샷만 맞아봐요. 샷을 맞다는 것이 군인 출신인 저로서는 이상하게 불온하게 느껴졌습니다. 헤드샷? 클로즈업샷? 그래도 계속 귀가 열리더라고요. 오르막을 오르지 않아도 갸름해질 수 있는 총이라니. 중력의 흐름을 거스르고 제 삶을 추켜세우면 두류공원 오르막을 뛰지 않아도 제 얼굴은 탱탱해질까요? 저는 도리질을 치며 업힐 훈련에 매진합니다. 300샷을 맞고 나면 다음에는 얼마를 맞아야 해? 얼마나 맞아야 죽는다는 얘기야?


커뮤니티를 하면서 또 다른 의미의 샷을 많이 맞게 되었습니다. 모임이 끝나면 기념사진을 찍거든요. 아이폰에 찍힌 제 사진 속 얼굴이 점점 더 커지고 있어요. 살찐 40대 아저씨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배가 나올 순 없죠. 저는 샷을 맞는 대신 러닝화를 사들이고 있습니다. 한발 한발 뛰는 걸음이 날래고 푹신하기를 바라면서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어요. 카카오페이 버튼은 참 잘 눌러지거든요. 스텝을 밟아가는 가치에 0이 줄줄이 달려있습니다. 올해의 목표는 없더라도, 매일 손에 잡히는 하루를 밟아 나가는 실감이 짜릿합니다. 운동 역시도 관계가 개입이 될 때 훨씬 즐겁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어요. 명색이 커뮤니티 대표인데도 말이죠. 성만님 감사드려요.


올해의 수확은 연말에 다다라서 다시 러닝에 발을 붙인 것이라고 봅니다. 버젓이 있었지만 외면했던 공원을 다시 쓸 수 있었고, 신상 러닝화를 착착 사들이면서 행복에 젖습니다. 하나 자랑삼아 말하자면, 올해의 수확에 저만의 서가가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 옮겨사는 군인 입장에서는 책이라는 건 다 버려야 하는 짐덩이였습니다. 책을 버리는 건 금기니, 본가에 다 쌓아놓았죠. 어머니의 신음이 깊어지기 전에 책을 다 제서가로 옮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저는 서가를 꾸릴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되었거든요. 그건 저의 정착을 의미하기에 조금 서글프기도 합니다. 유목민의 삶이 종식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두렵기도 해요. 새처럼 가벼운 삶이라고 외치던 지난날도 끝이 났구나 싶거든요.


오늘 제 서가를 거닐면서 여러 상념에 젖었습니다. 저와 추억을 함께한 책들이 즐비했거든요. 명예의 전당처럼 제 추억을 빛내주었던 놈들이었습니다. 특히 필립 로스, 무라카미 하루키, 엘레나 페란테, 김연수, 김영하, 이언 매큐언, 마루야마 겐지, 은희경, 존 그레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새로운 책을 발굴하기 위해서 제목이 독특한 책도 한 번 꺼내서 읽어보고, 표지가 예쁜 양장도 만져봤습니다. 이걸 다 내 돈으로 샀다니! 사놓고 읽지도 않고 뭐 하는 거지 생각하면 올해가 지나쳐 가는 것이 뼈 아파집니다. 이걸 다 언제 읽지. 이걸 읽고 죽을 수 있을까. 새로운 책이 계속 쏟아지는데 얘들을 펼쳐볼 날이 올까. 지금도 사놓고 잊고 사는데 그럴 리가. 살 당시에는 살 명분과 읽을 의욕이 있었을 텐데.


서가 한편에는 제가 읽은 책들이 가득 꽂혀 있습니다. 다 독서모임에서 읽고 다루고 맛을 본 동반자들입니다. 얘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읽었는데 기억은 잔상으로만 남아서 희미합니다. 분명히 끙끙대며 발제문까지 뽑아냈는데 말이죠. 요즘에는 희곡 읽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소포클레스라던가, 체홉이라던가 이런 작가들 책은 지루하지만 멋져 보여서 가지고 다닙니다. 진짜 재밌는 건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인데요. 때때로 침대맡에서 읽을 때면 여러 배역을 저 혼자 소리 내서 연기를 하며 읽기도 합니다. 제 나름의 새벽감성으로 희곡을 재밌게 읽는 꿀팁이죠. 아마 이렇게 읽으면 책이 잔상으로만 남는 것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배역의 감정에 들어가 본다는 것, 새벽 감성에 소리 내어 그 감정을 표출한다는 각인.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말이 퍽 잘 어울립니다. 올해는 이렇게 지나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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