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창이 환한 사운즈 커피에서 아메리카노를 사서 나왔다. 고작 1분 정도 걸리는 시간이었는데 쿠폰도 하나 찍고 지역 화폐로 할인도 받았다. 창문 너머 고적한 날씨를 즐기면서도 알뜰살뜰 할인을 챙기는 내가 대구에 살면서도 부산스러웠다.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면 꽤 괜찮은 삶인 것처럼 느껴진다. 허영에 폼이지만 검은 유리로 된 창문을 보면서 짐짓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카페가 통창인 이유는 나를 보정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이게 카페 매출에 상당한 영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허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멋짐 필터를 씌워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잠시 눈을 감고 주문을 왼다. 떼다보목지질케나봉바. 주문의 뜻은 이렇다. 민진아 너 아직 괜찮아 주눅 들지 말어.
지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삶인가? 확실히 출근이 없어져서 수면 부족 증세가 사라지니 삶이 더 낙관적이다. 자연스럽게 몇 해 전 사무실 창문을 바라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 밖에 나가고 싶다.' 모니터 대신 창밖을 응시하던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되뇌었다. '나는 사무실이 싫다. 난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다.' 15년을 다닌 직장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니 옆자리 김 소령이 미쳤냐고 물어봤다. '선배 미친 것 같아요.' 그래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삶에 불만이 가득 차 있는데 뭐 하나 어쩌지 못하니 신세 한탄밖에 할 게 없었다. 이러니 브런치 대상을 받자마자 바로 회사를 뛰쳐나갔지. 창문에 비치는 내 얼굴에 늦가을 마지막 햇살 한 가닥이 희끔하게 걸려 있었다.
그날은 사무실이 꽤 시끌벅적했다. 공군 총장님 강연 세미나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 중령님을 축하하는 자리가 있었다. 아침 다과시간 겸 케이크도 켜고 성과를 치하했다. 어차피 예산으로 사는 거면서 차장님은 온갖 생색은 다 냈다. 내가 또 이렇게 직접 케이크까지 사서 축하해 주는 건 30년 군 인생에서 처음이다 야. 난 조용히 흉을 봤다. 뭐 지가 사긴 지가 사? 김 소령이 아침부터 예약한 거 찾아왔잖아? 저 사람 벌써 노망 났어? 입은 욕하면서도 얼굴은 푸근한 얼굴을 하고 박수를 쳐대는 내 모습이 딱 봐도 미친놈이었다.
계룡대 본부에서 근무하던 난 꽤 잘 된 복지 환경에 만족하면서도 일 열심히 하기로 유명한 분들만 모여 있는 분위기에 진력이 나 있었다. 아니 뭘 그렇게 좋아해. 세미나에서 총장님이 웃으면 뭐 월급 더 많이 줘? 세미나에 참여해서 공짜 밥 먹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이해가 된다 쳐. 경품 추천으로 아이패드 받은 사람은 진짜 부럽긴 하드라. 이 중령님은 그냥 시키는 거 한 거뿐이잖아. 결국 회식 한 번 더하는 거잖아. 진급이 된다고? 세미나 잘했다고 진급을 해? 그걸 누가 보장해? 난 비비 꼬인 심사로 그들의 축하연을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내게 직장 생활은 열심히 해봤자 어차피 모든 영광은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구조였다. 열심히 해봤자 월급이 늘어? 퇴근을 일찍 시켜줘? 다 고스란한데 뭘 더 일을 해? 딱 시키는 만큼 일하면 되는 거 아냐? 조용한 퇴사라는 용어가 왜 나왔는데? 매일 똑같은 일일 뿐이잖아. 호들갑 떨지 말자 좀. 내 말을 듣던 김소령이 듣다 못내 지쳤는지 힐난하듯 얘기했다. 선배, 그렇게라도 안 하면 조직 생활을 어떻게 해요? 힘내려면 자그마한 거라도 함께 축하해야죠. 선배는 참 인간이 부정적이야. 왜 저라나 몰라. 야 알겠다 알겠어. 그래서 장가도 못 가고 이러고 있잖아. 이 새끼야 , 오늘따라 엄청 뭐라고 그러네.
김소령 말이 다 맞는 말이었다. 냉소는 직장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난 점점 더 퇴사 결심을 굳혀나갔다. 누구도 모르는 사이 종무암에 동물 뼈가 퇴적이 되듯 서서히 퇴사라는 단어가 몸에 새겨졌다. 아침부터 먹는 혈당 폭탄 생크림 케이크는 참 달았다. 김소령아 나만 빼고 다 즐거워 보여 질투가 난 것 같다. 왜 이렇게 난 속이 베베 꼬였는지 몰라. 맞아요 선배. 저도 질투 나요. 이중령 님은 대체 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해요? 옆에 앉은 사람들한테 민폐야. 사람이 참 좋잖아. 용서하자. 용서하는 김에 옥상에서 커피 한 잔 할까. 오케이 콜.
난 왜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준 조직이 시시해졌을까. 도태된 자의 썩은 마인드일까? 사무실에서 박소령으로 군복을 입으면 난 거짓 웃음, 가식의 호들갑, 의도적인 새침함으로 동료들을 대했다. 오직 월급을 타기 위한 모드 전환이었다. 내 진심은 옥상에서 마시는 맥심 모카골드와 함께 터져 나왔다. 타는 목마름으로 설탕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종이컵을 구겨버렸다. 아 씨발, 언제 퇴근하냐. 가끔 그때가 그립다. 킬킬거리면서 사무실 사람들 흉을 보면서 저 산 너머 왠지 내가 살 곳이 있을 것만 같던 기분. 넌 퇴사하면 뭐 할 거냐로 시작하던 가능성의 질문들.
분기마다 몇 건의 성과를 올려 차장님을 웃게 만들었던 우리 실 에이스 이 중령님은 내가 15년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할 때 당신을 떠올린 걸 몰랐을 것이다. 말 한 번 제대로 섞은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듣기로는 이 중령님은 자식 교육을 위해 은마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주말마다 3시간씩 걸려 원주와 서울을 오가던 검약한 남자였다. 소탈해서 아내에게는 그랜져를 사주고 자기는 기아 레이를 몰던 나이스가이. 일밖에 모르는 바보였지만 긍지가 대단해서 옆자리 사람까지 부쩍 힘이 나게 만드는 타입이었다. 말 그대로 완벽한 직원이자 부하이자 선배이자 동료였다. 하나 예만 들어보자. 사무실에 간식이 떨어지면 보통 막내가 카드를 타서 피엑스 가서 과자와 음료를 사놓는다. 이중령 님은 그게 불합리하다고 자기가 먼저 출근할 때 사 오는 사람이다. 군대에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어느 날 이중령 님은 창문만 멍하니 바라보는 내게 커피를 청했다. 한 잔 할까? 예 선배님. 해야죠 한잔. 난 멀찍이서 축하만 하다가 그가 말을 걸어온 것에 황송해서 그와 함께 옥상에 올랐다. 그는 갑자기 분위기를 잡았다. 민진아, 너 내년에 어디 가냐? 속으로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본부 인사팀에서 시키는 대로 가겠죠,라고 생각했으나 저는 비행단 가게 될 거라고 별생각 없이 답했다. 그는 심각하게 얘기하더니 너 지금부터 영어 성적 만들어놔. 내년에 국외 교육 과정이 뜨는데, 그거 지원해라. 내가 알아봐 줄게. 이 사람이 갑자기 나한테 왜 그러나 했더니.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는 퇴사를 고민하던 내 푸념을 우연히 옥상에서 듣고는 분기점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고민을 했던 터였다. 화가 날 정도의 선의 아닌가.
난 이 중령님을 볼 때마다 웹툰 미생의 박 부장이 떠올랐다. 요르단 중고차 사업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회사 몰래 가짜 회사를 차리고 자기가 바지사장을 하던 무뢰한. 중간에서 돈을 빼돌리다가 우리 영민한 장그래에게 딱 걸린 사무실의 빌런. 박 부장은 배임 혐의로 중징계가 예상되던 그때,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어떻게 그는 괴물이 되었는가. 이 중령님처럼 일에 모든 걸 걸고, 회사를 이끌던 에이스 시절의 박 부장은 어떻게 부정에 빠지게 되었는가. 나도 명탐정 코난에 빙의하며 장그래의 편에 서서 그의 몰락을 비웃었다. 저런 놈은 콩밥 먹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박 부장은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일 년 전까지 철강팀 에이스로 불리며 중동 관련 사업을 싹쓸이해서 초고속 승진을 했다. 박 부장은 연일 계속되는 소고기 회식에 폭탄주 그리고 빠른 진급까지 따냈지만 어쩐지 허전했다. 억울하고 화가 치밀었다. 밤낮없이 일해가며 성과를 해서 수백억 원을 회사에 벌어줬더니 이것들이 고작 회식으로 입을 닦아? 그는 이룬 것에 비해 얻는 것은 적은 자신의 삶이 성에 차지 않았다. "재미없네, 시발." "돈은 니들이 다 처먹고... 난 월급이나 받아가면, 땡이냐..."
언젠가 출근해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이 중령님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려 있는 그 사무실에는 책상과 소파들이 썰렁하게 놓여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이중령 님은 그 앞에서 맨몸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엉성한 폼이었지만 꽤 익숙한지 눈은 YTN 뉴스를 보면서도 대퇴근을 자극했다. 운동마저 일을 위한 준비운동처럼 보이는 경지였다. 박 부장이 텔레비전 안에서 기어 나와 사무실에서 스쿼트 중인 이 중령님을 마주했다면 별 것도 아닌 걸로 요란을 떤다고 재수 없게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시오? 어차피 돈은 다 회사가 가져가는데.
어쩌면 미생의 박 부장은 중고차 사업을 하면서 '맑스'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무슨 뜬금없는 마르크시즘이냐.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가는 이윤 축적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그로 인해 노동자는 더욱 빈곤해진다. 박 부장은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 비밀을 체득하고 열심히 일하는 이 중령님과 같은 이들을 냉소하다가 괴물이 되었다. 박 부장이라면 이렇게 외쳤을 테지. 이 스벌 것들, 날 착취해? 그럼 내가 자본가가 되련다! 아무리 일해도 삶의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기분. 아무리 이름을 떨쳐도 지급과 계급으로 대변이 되는 내 모습. 내가 나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내 대체자가 나타나서 나를 메우는 구조. 부품의 처지. 나와 같은 박소령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중령 님이라고 그걸 피할 수 있을까.
난 박 부장을 보며 화를 낼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원이 아니었다. 나는 대충 시간이나 때우면서 반쯤 월급 루팡을 자처했다. 성과도 없으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위주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창문 밖에서 '맑스'를 찾아 나섰다. 박부장은 회사를 이기려고 했고, 나는 회사를 뛰쳐나오면서 대응을 달리했을 뿐이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와 오상식 과장이 박 부장을 고발해서 승승장구하고도 끝내 퇴사를 한 것처럼 나도 뛰쳐나갔다. 그날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참 맑았다. 창문 맑스. 옥상 맑스. 당시 난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따위를 들고 다니면서 폼을 잡고 독서모임을 드나들었다. 이 중령님의 화려한 성과를 지켜보면서 난 고개를 돌리고 다른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현재 나를위함 독서모임 대표로 살고 있다. 박 부장이 자기 회사를 차리고 부정을 저지른 것처럼, 나도 낮잠이나 자면서 이중령 님의 조언을 배신하며 산다. 입으로 중얼거린다. 내 삶은 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