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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박 대신 차렵이불

by 박민진

책을 읽다 보면 내 삶이 괜찮다고 위로해 주는 곳에 밑줄을 친다. 오 이런 생각을 다 하네 밑줄 쫙 긋는 경우보다 그래그래 맞아 이 작가 딱 내 스타일이네 하면서 긋는 것이다. 별로 좋은 독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감은 결국 안으로 움츠러드는 힘이다. 내 지향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넓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마음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삶이 그릇되지 않았다며 자위하는 꼴은 좀 우스운데. 밑줄이 점점 나를 닮아간다. 오늘도 내게 화색을 가져다준 내용이 있었다.


최근 베스트셀러 순위에도 기웃거리는 '편안함의 습격'이라는 마이클 이스터의 책은 내게 위안을 가져다주는 내용들이 한가득했다. 저널리스트이자 모험가인 작가는 평생 도심의 안온한 보호 속에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역경을 겪은 사람들이 정신적 안정 지수가 높다고 얘기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 중 12퍼센트만이 도시 생활에 만족한다고 한다. 우린 모든 것을 갖춘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도 말이다. 숲으로 처벅처벅 걸어 들어간 소로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우리 커뮤니티에도 가득하다.


실례로 한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한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은 다양한 스트레스 환경에 놓이지만, 육체적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경우에만 건강한 내성이 생겨 삶 전반이 단단해진다고 한다. 즉 몸의 불편함에 대한 인내와 끈기가 인생 전체를 더 나은 상태로 끌어올려준다는 말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우리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 상사와의 갈등과 카톡으로 벌이는 신경전은 예외라는 점이다. 육체가 아닌 잡념의 습격은 인간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질 않는다나.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그토록 많은 곳을 전전하며 살아온 것에 대한 위로를 받았다. 또한 맞벌이하는 부모님과 바깥으로 도는 형 사이에서 외롭게 자란 내 삶에 꽤 괜찮은 덕목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른 직장생활을 했지만 늘 낯선 도시에서 살아온 탓에 친구가 없어 새벽까지 혼자 분투한 시간도 어쩌면 나를 딴딴하게 해 준 게 아닐까. 그땐 불행하다고 여겼지만 그 덕에 운동도 열심히 했고 독서량도 팍팍 늘렸다. 남들은 중고딩 때 읽는다던 세계적인 명작들도 스물한 살 공군에 소위로 임관해서야 손에 넣었다.


이런 이해는 내가 왜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에 서툴고, 퇴근하면 자꾸만 헬스와 러닝에 힘을 쏟으려 하는가에 대한 해답으로도 여겨져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수렵 채집의 삶에 익숙해져 있고, 그 위험도에 노출이 될 때 삶은 더 왕성해진다. 내가 무수한 도시에서 보낸 첫날밤, 그 낯선 밤들이 지닌 통증이 야밤에 숲에서 불을 피우고 야생동물이 오지는 않나 두려워하던 선조들의 불안과 조바심임을 알 수 있었다. 이거 너무 끼워 맞추나?


커뮤니티 진행을 하다 보면 평생 한 집에서 부모 곁에 머물면서 안정적으로 사는 분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주말에 뭐 했어요? 가족들이랑 마라탕 먹으러 갔어요. 와 가족들이랑 주말에 함께 밥을 먹어요? 아뇨 거의 매일 가족들이랑 먹는데요. 아버지가 저녁은 같이 먹자고 해서요. 지겨워요. 저도 독립하고 싶어요. 민진 님은 뭐 드셨어요? 저는 혼자 스팸에 햇반 돌려먹었어요. 프로틴 가루도 물에 타 마시고. 와 정말 건강하게 사시네요. 내 진짜 건강하죠? 건강해서 너무 행복해요. 이런 식의 대화는 날 주눅 들게 했다. 내가 왜 그렇게 연애를 하지 않고는 못 배겼는지 이해가 간다.


부대에서 인사발표가 나고 부랴부랴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매년 2월. 난 짐을 다 뺀 내 텅 빈 방을 돌아보면서 울곤 했다. 누가 볼까 봐 운전대에 머리를 처박고 울었다. 그건 상처로 남은 기억이다. 좋은 사람들과 멀어지고 내가 아끼던 공원과 카페를 버리고 낡은 폭스바겐 골프 해치백에 짐을 욱여넣고 전국을 떠돌았다. 웬만한 건 다 버렸다. 소중한 사람의 살 냄새가 묻은 이불도 다 버렸다. 남들한테는 그게 멋있는 척했다. 어처구니없게 이사를 간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서 상처를 주기도 했다. 미안해요.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했다. 성인이 된 후로 1년에 한 번 꼴로 거처를 바꿔가면서도 그 고장에서 열리는 독서모임과 글쓰기모임을 섭렵했다. 가족 대신 커뮤니티에서 최선을 다했다. 내 살던 동네를 버리고 떠나와서 낯선 방에 짐을 내려놓을 때의 허탈감을 촘촘한 모임 일정으로 채워 넣었다. 낯선 도시의 적응 과정에서 빚어지는 외로움과 상실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을까. 솔직히 그것까진 잘 모르겠다. 잘 버텨내고 무뎌졌을 뿐이다. 알래스카에서 텐트를 치던 작가 마이클 이스터가 그게 좋은 거라고 얘기해 줘서 고마웠다.


책에서는 죽지 않을 정도의 고생, 정확하게는 삶을 가능하면 혹독한 육체 상태에 놓아두기를 권한다. 나는 얼마 전 읽은 노매드랜드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 영화 맞다. 아카데미 작품상 탄 노매드랜드. 근데 난 영화보다 책 노매드랜드를 더 좋아한다. 영화가 스산한 기운과 함께 사색적이라면, 책에서는 그들의 시끄러운 속내를 더 잘 들어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현재 자신의 터전과 관계, 동네와 직장 등 터전을 버리고 길을 떠난 유랑자가 속출하고 있다. 그들이 지키려고 드는 건 야생성일까? 길들여지지 않겠다? 잭 케루악과 같은 비트세대의 반항일까?


노매드들은 작은 봉고차에 기거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문명의 혜택을 거부한다. 그들은 텅 빈 대지에 밤마다 모여서 불을 피우고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난 그 부분에 밑줄을 치고 메모를 적었다. 어 저것도 커뮤니티네. 불멍 유랑자들이라고 모임명을 지으면 되겠다. 대구에서는 팔공산 자락에서 불 피우고 하면 되나? 신고당하나? 봉고차에서 노매드 한다더니 결국 모여서 사네. 나랑 비슷한데?


그래 맞다. 인간은 모여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나도 고독한 게 좋다고 뻥을 치고는 시간만 모임만 보면 신청하곤 했다. 주말에 6개씩 모임을 하는 자의 외로움을 아는가. 이건 아는가? 모임이 여러 개 생기면 운동이 즐거워진다. 동창회에 나갈 때 아무 일 없을 걸 알면서도 속옷을 캘빈클라인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가 삶을 맴돈다. 나의 외로운 삶에 온기가 찾아올랑가.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우리는 인생을 건다.


내 삶 모든 것이 완벽한데 이상하게 공허하고 외롭고 불쾌한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의 습격을 쓴 마이클 이스터는 거친 아생으로 가길 권한다. 정승환이 부른 '사랑에 빠지고 싶다' 가사처럼 삶이 왜 외로운지 의아한 사람이라면 우선 바깥으로 나돌아야 한다. "운동을 하고 열심히 일하고 주말엔 영화도 챙겨보곤 해 서점에 들러 책 속에 빠져서 낯선 세상에 가슴 설레지 이런 인생 정말 괜찮아 보여 난 너무 잘살고 있어 헌데 왜 너무 외롭다 나 눈물이 난다 내 인생은 이토록 화려한데 고독이 온다" 이유가 없다면 그건 히키코모리와 결탁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이스터는 실제 작가랍시고 학자연하지 않고 직접 알래스카에서 모든 위협을 무릅쓰고 1개월을 버텨낸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의 현실판 인간이다. 나도 그처럼 강해지고 싶다. 외롭다고 징징거리지 않고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싶다. 그는 내가 인스타그램에 운동 피드를 올리는 걸 알고는, 다음 문장에 남을 의식하는 운동은 가짜라고 호통을 쳤다. 내가 8킬로 러닝을 킬로당 5분대에 주파한 것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그건 너무 억울한데?


작가 마이클이 알래스카에서 진짜 캠핑을 하는 걸 보면서 나는 밑줄을 치고 메모를 했다. 그래 이게 진짜 캠핑이지. 생존하기 위한 분투! 내가 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캠핑족이었다. 왜 굳이 거기 가서 라면을 끓여 먹어. 왜 차박을 해? 왜 편한 곳 놔두고. 잘 생각해 보니 그 수렵채집 흉내가 못마땅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장비빨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거친 환경을 찾아가서 최대한 편안하게 있으려는 시도가 내 눈에 별로였다.


이제 의견을 정정한다. 캠핑 역시 정신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추운 곳에서 불을 피우고, 배고픈 상태에서 라면을 겨우 끓여 먹으며 칼로리를 보존하는 행위는 수렵채집의 삶을 동경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의 발현이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아 다시 야생의 불안한 곳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다. 왜 '나는 자연인이다'가 장수 프로그램이 됐을까. 그건 자연에서 풀 뜯어서 라면을 끓여 먹는 데서 오는 감동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움막 안에서 르크루제 냄비가 등장하면 혀를 찬다. 역시 자연인도 돈이 있어야 하는구나.


내가 왜 차박을 안 좋게 생각하는지, 왜 캠핑에 반감이 있는지 생각해 보니 전에 만나던 친구가 나와 함께 아트하우스에서 영화 보고 핫한 카페에서 독서하고 주말 아침이면 러닝에 가는 것을 참 좋아했었다. 최고의 데이트코스라고 내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에게 좋은 콘텐츠를 소개하고 운동을 알려주면서 얼마나 뿌듯했던가. 근데 헤어질 때 내게 얘기한 이별의 사유도 딱 그거였다. 너무 지루하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한다. 그녀는 수렵채집을 원했다. 우리 사이는 안락 속에서 편안했지만, 어떠한 불편함도 없이 심심하니 종국에 가서는 수심만 깊어졌다. 우리 관계가 권태롭고 불안했겠지.


난 인스타그램 속에서 그녀가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열심히 차박을 하고 캠핑자에 주저앉아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숨죽이며 구경했다. 라이브 방송에 내 목소리가 들어갈 리 없고, 나는 가계정이었음에도 난 얼마나 긴장했었나. 나는 그때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가. 영화랑 독서가 좋다며? 나는 새벽 내내 인스타그램을 켜고 모로 누워서 그녀와 그녀의 구석기인 남자친구와 차박을 함께했다. 아니 무슨 차에 가습기 기능도 있어. 어 뭐야 멜라토닌도 나와? 지프차를 사야 하나. 거의 집값이네. 나는 자세를 바꿔 누우면서 차 대신 차렵이불을 사버렸다.


책에는 미국국립보건원에서 뉴런을 연구하는 더글러스 필즈의 말이 인용이 된다. 육체적으로 매우 힘든 일을 경험할 때 단기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변환된다. 매일 삶이 비슷하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일상을 해치우며 산다. 나이 먹으면 시간이 금방 간다는 속설이 과학적임을 깨닫게 된다. 삶에 새로울 게 없으니 시간이 점점 빨리 흐른다. 아마도 모험을 떠나면 다를 것이다. 하다못해 오사카 한 달 살이만 해도 삶은 천천히 흐를 것이다. 나차럼 매일 같은 동네에서 카페 3개를 돌려 막기 하면 삶은 2배속이다. 봐봐 벌써 12월이잖아. 벌써 캐럴 나오잖아. 이럴 줄 알았어 내년에 41살이잖아!


나는 매일 비슷한 카페와 영화관에서 새로운 책과 개봉작을 접하며 삶이 다채롭다고 믿었다. 암체어 트레블러처럼 편히 앉아서 다른 이들의 고생을 구경했다. 심지어 운동마저도 같은 무게 같은 기구 같은 헬스장 같은 동네의 러닝코스만 선호했다. 장기 기억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 환경 속에서 내 옆에 지켜주었던 사람들은 지루해 죽겠다고 혀를 찼다. 난 나무라면서 이게 건강한 거라고 우겨댔다. 새로 출간한 소설책을 선물하면서 그들을 조롱했던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여행 가자고 했더니 책을 주네. 맥이는 거야?


어디 한 번 잘 사나 보자. 나를 배신하다니. 나만한 사람 있는 줄 알아? 생각보다 많더라. 전 여자친구는 장기 기억으로 보존될만한 모험적인 경험을 선호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잘만 살고 있다. 나의 왓챠피디아 영화와 소설리스트는 이별 후유증으로 잔뜩 늘었지만, 육체적 모험은 얼마나 비좁아졌는가. 그렇다고 딱히 다른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작 러닝크루에 새로 가입하고, 고작 혼자 하던 헬스를 함께할 친구를 만드는 것 정도가 내 삶의 확장이다. 그렇게라도 편안함의 습격을 피해 달아난다.


이제 전역한 지 4년, 대구에 터를 잡았다. 전과 같이 낯선 도시의 외로운 밤이 올 확률도 낮아졌다. 아무리 집을 사지 않고 월세방을 전전해도 매일 가는 동네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너무 비관적인 얘기는 집어치우자. 자기 계발서를 읽은 것처럼 생각하자. 잡념을 떨쳐버리기 위해 나는 오늘 운동량을 늘리련다. 마이클 아저씨처럼 알래스카는 못 가겠지만, 돌아오는 여름 낯선 도시에서 한 달 정도는 살아보자. 몸을 혹사시키자. 저자 말대로 죽지 않을 만큼 하기는 어렵겠지만, 무릎을 잡고 숨을 헉헉거리면서 나를 버겁게 하자. 두류공원 세 바퀴를 가까스로 뛰면 잠이 얼마나 잘 오는지 글 쓸 여력도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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